9월초 한국 개봉을 앞둔 자신의 새 애니메이션 '바람이 분다'가 1920년대 군국주의로 치닫던 일본을 배경으로 한 탓에, 한일 양국간 민감한 과거사 문제와 연결짓는 한국 내 목소리를 들어서 아는 까닭이리라.
하야오 감독이 5년 만에 내놓은 바람이 분다는 실존인물인 일본의 비행기 설계사 호리코시 지로(1903-1982)의 삶에다, 같은 시대를 산 작가 호리 타츠오(1904-1953)가 쓴 동명소설 속 로맨스를 버무린 작품이다.
이 작품의 제작자인 스즈키 토시오(63)와 함께 기자회견에 참석한 하야오 감독은 "지로가 설계한 비행기 1만 대 이상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에서 쓰였는데 '무조건 열심히 살아 왔다고 죄가 없어지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며 "내 경우 아이들이 밖에서 뛰어놀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토토로 캐릭터를 만들었지만, 오히려 TV 앞으로 아이들을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열심히 한다고 꼭 좋은 결과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실제로 지로는 군부의 요구에 대항하며 살았고 토시오 역시 전쟁 내용을 전혀 소설에 넣지 않았던 인물로, 시대가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에 따라 당시를 살던 사람들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는 만큼 그 때를 살았기 때문에 죄를 짊어져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며 "이번 작품에서처럼 일장기를 많이 그려 본 적이 없고 극중 그것이 전부 다 떨어져 내리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을 보고 다양한 생각이나 말이 나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하야오 감독은 한일간 과거사 문제 해결에 대한 질문을 받자 단호한 의지를 표현하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일본은 1989년 거품 경제가 무너지고 비슷한 시기 소련도 붕괴되면서 역사 감각을 잃어 버렸다"며 "역사 감각을 잃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을 일본 젊은이들이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예전에 청산했어야 할 위안부 문제가 지금까지 오르내리는 상황은 굉장히 굴욕적인 것으로 일본 정부가 한국과 중국에 사죄해야 한다"며 "당시 일본 군부가 자국민조차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탓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을 깨닫고 반성해야 한다"고 전했다.
바람이 분다에는 1923년 일본 도쿄 등지에서 발생해 10만 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관동대지진이 자세하게 묘사됐는데, 이는 2011년 동일본대지진을 떠올리게 만든다.
하야오 감독은 "이 작품 속 지진 신의 콘티를 그리고 나서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났는데, 점점 피해 규모가 커지는 것을 보면서 스스로 '이 작품을 계속 만들어야 하나'라는 생각을 했고 스텝 중에 더이상 못 만들겠다던 사람도 있었지만, 우리가 재난 영화를 만들던 것은 아니었기에 계속 이어가는 것이 옳다고 결정했다"며 "관동대지진은 당시 일본의 운명을 결정한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으로 아버지로부터 그때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렇게 이 작품 속에도 내 아버지의 모습도 들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작품 속 대지진, 불경기, 우경화 등을 겪는 1920년대 일본의 풍경은 지금 2013년과 무척이나 닮아 있다.
하야오 감독은 "도대체 이 사회가 어떻게 될까 하는 고민으로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1984년)를 만들었을 때 일본 경제의 거품은 최정점에 있었고, 지진을 다룬 '벼랑 위의 포뇨'(2007년)를 완성하고 바람이 분다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정말로 큰 지진이 일어났다"며 "내 작품이 재해를 따라가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는데 현실을 관찰해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으로 제작 방향을 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일본은 최근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압승하면서 급격한 우경화를 피할 수 없게 됐다. 앞서 하야오 감독은 스튜지오 지브리가 매달 발행하는 소책자 '열풍'을 통해 '선거를 하면 득표율도, 투표율도 낮은데 정부가 혼잡한 틈을 악용해 즉흥적인 방법으로 헌법을 개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참의원 선거 뒤 개헌을 추진하려는 아베 정권을 강하게 비판했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도 그는 "시대가 크게 움직이는 상황에서 좋게 만들 수도 있는 헌법을 굳이 나쁘게 바꿀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개헌 반대 입장은 변함이 없다"며 "지금의 총리는 곧 교체될 것이기 때문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어 "그동안 일본은 경제가 안 좋으면 모든 것을 잃어 버리는 것처럼 얘기해 온데다, 사람이 얼마를 버는지 물어보지 않던 것이 예의였는데 영화도 흥행 수익만, 스포츠 스타를 볼 때도 몸값만 따지는 것이 현실"이라며 "지금도 아베노믹스 등의 얘기가 나오는데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매일 열심히 일하면서 사는 것이 필요한 시대"라고 덧붙였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하 하야오): 애니메이션을 만든지 50년이 됐는데 지금도 아름다운 꿈이다. 하지만 지금 시대 애니메이션은 꿈이 아니라 사업 수단이 되고 있다. 이런 애니메이션은 없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제작자 스즈키 토시오(이하 토시오): 1983년 나우시카 제작을 시작으로 하야오 감독과 30년째 함께 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후회할 틈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 왔다. 좋은 인생을 살았다. 만족한다.
-지진, 비행기 프로펠러 소리 같은 효과음을 사람이 직접 낸 것이라던데
토시오:전 세계적으로 기술혁신이 계속되면서 영상뿐 아니라 음향도 정밀해지고 있다. 하지만 영상이나 소리가 좋아진 만큼 잃어 버리는 것도 있다고 생각한다. 극장들이 사운드 시스템으로 5.1채널을 채택하고 있는데 앞으로 7.1채널, 8.1채널 식으로 계속 갈 것이다. 이렇게 정밀해져 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멀리서 들리는 사람의 대화나 발걸음 소리가 여러 곳에서 들려 올 때 대체 어떤 소리를 들어야 하나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때 하야오 감독이 사람이 직접 소리를 내보면 어떨까라는 제안을 했고, 크게 공감했다. 소리 전문가에게 의뢰해 비행기 프로펠러, 지진 등 어떤 것을 넣고 빼야할지 균형을 잡고 사운드 디자인을 시작해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하야오: 소리 전문가는 종 소리, 기차의 기적 소리까지 모든 것을 사람 소리로 내자고 했는데, 그런 것들은 기계에게 맡기자고 설득했다. (웃음)
-'에반게리온'으로 유명한 안노 히데야키 감독이 주인공 지로의 목소리 연기를 맡았다.
하야오:히데야키 감독과는 30년 동안 알고 지낸 사이다. 목소리 연기는 제작자 스즈키 씨가 나에게 먼저 제안을 했고, 나 역시 너무 전문가들이 하다 보니 작품의 신선감이 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그래서 영화를 살리고 싶은 마음에 히데야키 감독에게 부탁을 했다. 실제로 작품이 공개된 뒤 그가 목소리 연기를 맡아 주인공의 존재감이 더 돋보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야오 감독이 완성된 작품을 보고 오열을 했다던데.
하야오:오열까지는 아니다. (웃음) 히데야키 감독이 일본 언론매체와의 기자회견에서 그렇게 말해 와전된 것이다. 눈물을 흘린 정도였다. 눈물이 난 이유는 나도 모른다. 울 때 꼭 이유가 있어야 하나? 사실 감독이 울면 안된다. 반성하고 있다. (웃음)
-지로와 연인 나오코의 로맨스가 인상적이다.
하야오: 지금도 그렇게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실제로 나오코의 삶과 자기 어머니의 삶이 같았다고 말하는 관객도 봤다.
-3D 애니메이션 제작 계획은
토시오: (단호한 목소리로) 없습니다. (웃음) 지금 미국에서도 3D는 쇠퇴하고 있다고 본다. 20년에 한 번씩 3D 붐이 일어났는데 모두 영화 산업이 불경기일 때였다. 보통 3년 지나면 끝나는 분위기였는데 지금이 그 시기다. 3D 영화는 지난해 미국에서 100여 편 밖에 안 만들어졌고, 올해는 거의 없다고 들었다. 1, 2년 전쯤 일본에서 3D TV와 모니터 붐이 일었었다. 3D TV는 정면에서만 봐야 하고 옆으로 누워서는 볼 수 없는데 이러한 이유로 붐도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작품관·세계관을 설명하면.
하야오 : 어렵다. 머리카락은 머리에 그냥 붙어 있는 것이 아니다. 긴장을 하면 머리카락이 쭈뼛한다. 그러한 미묘함을 발견할 때 세계가 열리는 것 같다. 애니메이션의 움직이는 그림은 얼마든지 그릴 수 있다. 하지만 머리카락이 쭈뼛하는 것 등은 쉽게 발견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들의 몸짓이 수많은 표현을 하고 있다. 세상을 어떤 렌즈로 보느냐의 문제인 것 같다. 이에 따라 작품의 방향도 달라진다. 현재 인간의 능력 이상으로 세상을 보여 주는 다양한 렌즈가 만들어지면서 육안으로 세상을 보는 맛을 잃어 버린 듯하다. 작품에 쓸 장소를 물색하러 다니면서 스텝들이 사진을 굉장히 많이 찍는다. 나는 사진을 찍지 않는다. 렌즈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렌즈가 아닌 나의 신경이 흐르는 눈을 통해 멀어지는 풍경 등을 보고 기억해야 커다란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