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정권 당시 중국 인삼 수입 문제를 놓고 정권 실세와 말싸움을 벌이다 멱살잡이까지 벌인 일화는 유명하다. 결국 그는 관세청의 수입 금지 조치를 해제시켰다.
1935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태어난 최 회장은 유년시절 일본학생들에게 '조센징'이라는 놀림을 받으면서 자랐다. 해방이 되고 외가인 경북 달성군으로 들어온 뒤에는 반대로 '쪽바리'라는 놀림을 받았다. 이후 그는 학교에 취미를 잃었다. 가세도 기울어 정식교육을 받은 건 초등학교 4학년까지였다.
그는 13살부터 나무장사, 과일장사 등을 하면서 장사에 대한 안목을 키웠다.
군 제대 후 최 회장은 고려인삼사업사에서 '경옥고' 외판원으로 입사했다. 3년 연속으로 판매왕을 차지하며 창업자금을 마련, 직접 경옥고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1963년 용산구에 차린 30평짜리 공장이 오늘날 광동제약의 첫 모습이다.
이후 광동제약은 거북표 우황청심원, 광동쌍화탕 등 다양한 인기 제품들을 탄생시키며 중견 제약회사로 자리잡았다.
최 회장은 약재를 직접 고르는 모습으로 소비자들의 신뢰를 얻었다. "우황을 고르는 일만큼은 30년째 내 손으로 해오고 있다"는 그의 모습과 '40년 최씨 고집' 문구가 들어간 광고는 유명하다.
2000년 이후 광동제약은 '비타 500', '옥수수수염차' 등 건강과 음료를 결합시킨 제품을 생산해 음료시장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
최 회장은 제약산업과 기업문화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국민훈장 목련장(1996년)을 받기도 했다. 한국능률협회 한국의 경영자상(2006), 대한경영학회 경영자 대상(2008년) 등
경영전문기관으로부터도 수차례 상을 받았다.
한편 심장병 어린이에게 무료 수술을 지원해 500여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치료를 받는가 하면 가산문화재단을 만들어 불우 청소년들을 돕는 등 활발한 사회공헌을 펼치기도 했다.
주말에 부인과 자주 골프를 즐겼던 그는, 휴가 기간 중 골프를 즐기다 숨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평창경찰서에 따르면 이날 낮 12시 30분쯤 평창군 대관령면의 한 골프장 사우나에서 최 회장이 갑자기 쓰러진 것을 일행들이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최 회장이 심장마비로 숨진 것으로 보고 정확한 경위를 조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