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160cm 안팎의 깡마른 체구를 한 70대 노인이 피고인석에 앉아 긴장된 얼굴로 재판부를 살피고 있었다.
지병을 앓는 듯 캡슐이 든 자그마한 약병을 움켜쥔 오른손이 살며시 떨리고 있었다.
지난 1976년 대통령긴급조치9호를 위반한 사상범으로 몰려 꿈과 젊음을 빼앗긴 지 38년만에 서는 법정이었다.
1975년, 김찬업(당시 34세)씨는 주변 동료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 장래가 촉망되던 유능한 공무원이었다.
대구 계성고와 서울대 농대를 졸업한 뒤 공직에 입문한 김씨는 사상 최연소 대구시청 계장(사무관) 자리를 꿰찼다.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되돌릴 수 없는 시련이 닥친 건 칼바람이 몰아치던 그해 12월 10일 밤이었다.
마침 그날은 대구 실내체육관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새마을지도자 대회가 열렸다.
대회에 참석하는 외부 요인들이 묵을 숙소점검 업무를 맡은 김씨는 행사를 끝낸 뒤 자신이 담당했던 대구 동성로에 있는 한 고급 여관에 감사인사를 하러 들렀다.
마침 내실에서 술을 나눠마시던 주인 부부의 권유에 이끌려 술자리에 합류했다.
방송 뉴스에선 새마을지도자대회가 보도되고 있었고, 갑자기 내실에 들어온 한 투숙객과 가벼운 실랑이를 벌인 기억도 난다. 그것이 전부였다.
이튿날 아침 그는 느닷없이 자택으로 들이닥친 경찰에 영문도 모른채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전날밤 술을 마시며 "우리나라 대통령과 김일성이 뭐가 다른가”라며 박정희 대통령을 비방하고 새마을 사업을 폄하했다는 혐의였다.
한때 새마을 운동 담당 주무관으로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야당 후보에게 단 한번도 표를 던진 적도 없는 그에겐 상상할 수도 없는 억울한 누명이었다.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된 대공분실에서 그는 이틀간 지옥보다 더한 고문을 당했다.
틈만 나면 쏟아지는 몽둥이 세례속에서 살아나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절망감이 그를 경찰이 미리 꾸며놓은 자술서에 도장을 찍게 만들었다.
당시 경북도 부지사였던 장인이 한 고위 검사를 찾아가 통사정 해봤지만 “당신부터 용공혐의로 조사를 해봐야 겠다”는 싸늘한 답이 돌아왔다.
결국 대통령긴급조치9호위반 혐의로 기소된 그는 이듬해 4월 26일 1심 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다"며 억울함을 거듭 토로했지만 변호인조차 “어쩔수 없는 일이다”는 말에 항소도 포기했다.
검찰의 항소로 항소심이 진행되던 같은 해 6월 4일 김씨는 마침내 보석으로 석방됐다.
강제 연행된지 176일 만에 만끽하는 따사로운 햇볕이었다.
누명을 벗고 명예를 회복하자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그러나 담장 밖 세상은 모든게 달라져 있었다.
대구시는 진작에 그를 파면한 상태였고, 손에 쥔 퇴직금은 46만 4천 원이 전부였다. 당장 생계가 막막했지만 누구도 일자리를 주지 않았다.
'빨갱이'라는 손가락질과 따돌림 속에서 매일밤 악몽에 시달리며 그렇게 2013년을 맞았다.
38년만의 재심이 열린 이날 공판에서 최후변론에 나선 변호사도 목이 매인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변호인은 "재심 결정을 내려준 재판부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면서 "그 무엇도 피고인이 빼앗긴 세월을 보상해줄 순 없지만, 수십 년간 떨쳐내지 못한 악몽같은 기억을 이제 그만 내려놓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김찬업씨는 마지막 진술에서 “엉뚱한 사건에 휘말려 부모님에게 막심한 불효를 저질렀고, 아내와 자식에게 단 한번도 가장 노릇을 하지 못했다”고 흐느꼈다.
이날 검사는 김씨에 대해 ‘무죄’를 구형했다.
재심 선고 공판은 오는 1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