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급 5300원' 재택집배원…'벼락 사장님' 된 사연

우정사업본부 "앞으로 개인사업자" 일방통보…소득세에 건보료 '폭탄'

아파트 단지 등을 돌며 우편물을 배달해온 재택 집배원들이 이달 들어 갑자기 '사장님'이 됐다. "앞으로는 개인 사업자"라는 정부 당국의 일방 통보가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우체국 직원'이란 자부심 하나로 시급 5300원에 수당 한 푼, 퇴직금 한 푼 없이 초과근무를 일삼아온 수십 년. 하지만 우정사업본부의 갑작스런 방침에 이젠 소득세와 국민연금, 건강보험까지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

◈자부심으로 일해왔는데 '공장 시다'라고?

“재택 집배원이요? 편의점에서 일하는 알바 정도로 생각하시면 돼요. 공장으로 따지면 시다 정도?”

순간, 8년차 재택 집배원인 김모(45·여) 씨는 들고 있던 수천 통의 우편물을 땅에 팽개친 채 그대로 도망가고 싶었다.

한 민원인이 김 씨 앞에서 우체국에 전화를 걸어 "재택 집배원이 뭐냐"고 묻자, 우체국 직원이 들려준 대답이었다.

재택 위탁 집배원이란 주로 대도시 아파트 밀집 지역에서 일반 우편과 등기 우편을 배달하는 집배원을 가리킨다.

경기도 한 아파트 단지에서 1500가구의 우편물을 맡고 있는 김 씨가 처음 이 일을 하게 된 것도 8년전 아파트 게시판에서 발견한 '우체국 집배원 모집' 공고 때문이었다.

“아이를 돌보면서 일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시작한 일이었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기도 했다.

◈'6시간이면 지구를 구한다'…그들이 자조하는 까닭

매일 저녁 우체국에서 재택 집배원의 집으로 보내는 우편물은 평균 2500여 개.

재택 집배원은 이를 단지별·동네별로 나눈 뒤 다음날 보통 4-7시간씩 배달을 한다. 시급 5300원. 한 달 바짝 일해도 손에 쥐는 월급은 70-80만 원가량이다.

하지만 정작 더 심각한 문제는 '6시간 이상 일할 수 없다'는 것. 김 씨가 우정사업본부와 맺은 계약서에는 '1시간당 250세대'를 맡도록 돼있다.

김 씨가 1500세대를 담당하고 있는 걸 감안하면 6시간 이상의 근무는 인정하지도 않고, 시급도 지급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김 씨는 “8시간 근무를 허용하면 ‘주 40시간 근로자’가 되기 때문에, 계약서에 명시된 근무 시간은 하루 7시간을 절대로 초과하지 않는다"고 했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주 40시간을 초과하는 연장근로나 휴일근로 등에 대해 통상임금의 50%이상을 추가 지급하게 하고 있다.

결국 6시간 안에 맡은 일을 다 해야 하지만, 실제는 어림도 없다. 매일 저녁 큰 수레에 가득 담겨 김 씨의 집에 도착하는 편지와 소포, 등기 등은 분류에만 두세 시간이 걸린다.

이튿날 아침 9시부터 서둘러 단지를 돌면 오후 3시 무렵 일을 끝내야 한다. 하지만 고지서가 쏟아지는 월말이나 공보물이 홍수를 이루는 선거 기간, 택배가 폭주하는 명절에는 종일 근무도 허다하다.

그렇다고 2000세대를 맡은 사람에게 8시간 근무를 허용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김 씨는 “재택 집배원들끼리는 '6시간이면 지구도 구한다'는 농담을 하곤 한다"고 했다.


◈"모든 책임은 우리 몫…우편물보다 못한 신세"

재택 집배원들은 "우편물보다 못한 게 우리"라고 입을 모은다. 계약서에 따르면 배달 도중 우편물이 사라지거나 망가지면 모두 이들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물론 배달 도중 다쳐도 본인들의 책임이다.

김 씨는 “‘소송자료가 제대로 배달이 안되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재판을 당신 때문에 졌다’며 소송을 거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심지어는 신용카드를 건네준 수취인의 아들이 마구 쓰고 다니는 바람에 "카드값을 대신 내라"고 요구하는 민원까지 있었다.

이러다보니 수취인이 부재중이면 안내문을 붙여놓는 것도 모자라, 세 번씩 방문하기 일쑤다. 아무리 단지를 돌아도 6시간 안에 일을 끝내긴 불가능한 까닭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사고를 당할지 모르지만 산재 신청도 할 수 없다. 계약 조건이 그렇다 보니 스스로 긴장할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노동자들을 '사장님' 취급하며 부려먹는 꼼수"

하지만 이들을 황망하게 만든 건 오랜 기간 버텨온 열악한 근무조건 때문이 아니다. 정직원은 아니지만 우체국 소속이란 이유로 해온 일이었다.

하지만 지난달 우체국은 김 씨에게 "재택 위탁 집배원은 '근로자'가 아니라 '개인 사업자'이기 때문에 사업소득세 3.3%를 내야 한다"고 통보했다.

김 씨를 비롯한 재택 집배원들은 분노를 감추지 못해 파업까지 했지만, "당장 복귀하지 않으면 해고하겠다"는 엄포에 사흘만에 접었다. 얼마든지 새 인력을 대체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꺾이지 않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지난달 월급에서 소득세 3.3%는 속절없이 빠져나갔다. 70만원가량 월급에서 많게는 20만 원씩 국민연금과 건강보험료도 꼬박 떼야 한다.

재택 집배원들은 "우정사업본부가 노동자들을 '사장님' 취급하며 마음껏 부려먹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김 씨는 "이제 우리는 영원히 근로자가 될 수 없다"며 "우체국에서 시키는 대로 일만 하다 죽어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 아니냐"며 울분을 토했다.

◈ 우정본부 “업무 단순 위탁했을 뿐 고용관계 아냐”

이에 대해 우정사업본부 측은 “재택집배원을 근로자로 볼 수 없다는 판례가 이미 나와 있다”고 했다.

우정사업본부 관계자는 “우체국은 재택 집배원에게 단순 업무를 위탁했을 뿐 복무나 인사규정 등을 지휘감독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고용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업무 도중 다른 일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사업자로 봐야 하며, 소득세법에 따라 사업소득도 징수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전문가들은 우정사업본부의 이런 논리를 '꼼수'라고 지적한다.

박종천 노무사는 “재택집배원을 근로자로 인정하면 임금과 퇴직금, 연차 휴가와 초과근무 수당, 4대 보험까지 챙겨줘야 하니 '사업자'라고 우기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많은 재택 집배원들이 불만을 품고 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저 분을 스스로 억누르고 있는 형국"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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