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으로 철거됐던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이 2011년 서울 남산 자락에 다시 세워지던 당시의 첨예했던 정치적 논란이 이번에 더 강하게 재현되는 모습이다. 최근 이화여대에서 뜨겁게 달궈진 김활란 동상 철거 논란도 모두 인물에 대한 정치적 기념물을 놓고 벌어지는 논란이다.
이를 계기로, 우리 근현대사 인물을 기리는 기념물의 역사와 맥락이 주목을 받고 있다. ''''서울, 동상의 정치학''''은 어떻게 작동해왔고, 또 지금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신의 좌파 활동 전력과 일본군 장교 출신 이력을 가리고 쿠데타 정권의 정통성을 메우기 위해 ''''반공, 민족문화, 조국근대화''''라는 통치 이념을 선전하기 위한 작업에 대대적으로 착수했다. 그 가운데 추진된 것이 1966년 만들어진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를 통한 동상 건립이었다.
당시 정권 2인자 김종필이 위원장을 맡아 일사천리로 서울 도심 곳곳에 동상들을 세워갔다. 동상의 주인공은 대체로 ''''국가의 위기에서 조국을 구한 영웅'''', ''''일제에 항거한 열사'''' 위주로 채워졌다. 시민들의 합의나 동의 없이 관 주도로 무리하게 진행되는 과정에서 전국 각지 초등학교에 ''''이승복 동상''''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고, 항일 열사 동상 제작자의 친일 경력 논란과 구국 영웅 동상의 왜색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현재 이 동상들 가운데 11개가 남산에 몰려있다. 안중근, 이준, 사명대사, 김유신, 김구, 이시영, 이황, 정약용, 김용환, 류관순, 이승만, 이렇게 11명이 남산에 서 있는 동상의 주인공들이다.
남산이 ''''동상의 요람''''이 된 것은, 일본의 최고 위계 신사인 조선신궁과 이토 히로부미 추모를 위한 박문사가 자리했던 남산에 정신적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항일 인물 동상들이 다수 배치된 것이 1차적인 배경이었다. 그리고 후일 도심 곳곳의 동상들을 공원으로 몰아넣게 되는데, 그때 선택된 곳이 기왕 동상들이 많이 자리 잡고 있던 남산공원이었다. 남산은 이렇게 동상의 집합소가 됐다.
서울 도심 속에 자리 잡은 그밖의 동상들은 대부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숨겨졌다. 정몽주 동상은 양화대교 북단 강변북로 방향 램프에 숨은 듯 서 있고, 을지문덕 동상도 양화대교 양평동 쪽 녹지에서 어린이대공원 후문 옆으로 밀려났다. 도심의 한복판에서 랜드마크처럼 기능하며 시민들을 만나는 동상은 세종대왕과 이순신, 이렇게 단 2개의 동상이다.
이 계획은 무산됐고, 남산에 세웠던 동상도 1960년 4·19 혁명 이후 탑골공원의 동상과 함께 철거됐다. 그리고 2011년에 자유총연맹이 남산 자유센터에 있는 한국자유총연맹 자유공원에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동상''''을 세웠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철거된 후, 51년 만에 다시 남산에 세워진 것이다.
지금 서울 도심에 있는 우리 근현대사의 정치인, 즉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의 정치인 동상은 총 3개다. 김구, 이시영, 이승만 동상이 그 것. 이 세 인물의 동상은 지금 모두 남산에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의 동상이 일제 조선신궁 터에 세워지고 백범 광장이 조성된 것은 1968년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총장이자 해방 후 대한민국 첫 부통령이었던 이시영의 동상이 이곳에 세워진 것은 1985년이다.
그 옆에 나란히 서있는 이시영 동상도 마찬가지다. 당시 조선의 손꼽는 부자 집안이 일가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회영, 이시영 등 여섯 형제 일가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회영의 동생 이시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총장 등 핵심 간부로서 가난과 시련 속에서 임시정부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 역할을 했다. 독립운동을 하던 6형제 중이 5형제가 모두 죽고 자신만 해방 후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으로 당선됐지만 이승만 정권의 사회부패상과 국정혼란에 책임을 통감한다는 요지의 성명을 내고 정부를 스스로 떠났던 인물이 이시영 선생이다.
따라서 김구와 이시영 동상이 일제강점기 내선일체 핵심기지였던 조선신궁 터에 세워진 것은 동상 건립에 나선 정권의 정치적 취지를 떠나 그 장소성이나 맥락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바로 옆에 1970년 안중근 기념관, 1974년 안중근 동상이 세워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은, 2011년 들어선 동상의 주인공 이승만과 기존에 자리 잡고 있던 김구, 이시영의 관계다. 백범 선생과 이시영 선생에게는 공통점이 있으니, 바로 이승만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다. 김구와 이시영 선생 모두, 이승만 전 대통령과 독립운동 초기에는 동지 관계였으나 임정 후반기 그리고 해방 후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으로부터 견제와 배척을 당했다.
재미있는 것은, 지금 김구와 이시영 선생 동상이 있던 자리가 1956년 광복절을 기념해서 이승만 대통령 동상이 건립된 자리였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 도심에 단 3개뿐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의 근현대사의 정치인 동상의 주인공, ''''김구, 이시영, 이승만''''.
수도 서울 도심에 역대 대통령 등의 정치인 전시관을 만들고 동상을 세우는 행위는 그들의 고향에서 기념 행위가 이뤄지는 것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수도 서울은 대한민국 정치의 심장이자 상징 투쟁의 핵심 공간이다. 이곳에 역사적 평가에 대한 대중적인 합의를 넘어서는 수준의 기념물이 만들어지는 것은 국론을 분열시키는 적극적인 정치 행위가 되는 것이다.
서울 도심에 김구 동상과 이시영 동상이 무리 없이 세워진 것은 이들에 대한 역사의 평가가 대중적으로 합의됐기 때문이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경우, 역사의 평가가 일정 부분 일단락됐음에도 이념적 갈등 속에 합의가 이뤄지지 못했고, 한번 철거됐던 동상의 재건립이라는 정치 행위는 그 때문에 첨예한 논란과 사회 갈등을 낳았다.
박정희 기념공원 조성이 지금 논란을 일으키는 것은, 아직 역사의 평가가 온전히 매듭지어지지 않은 인물에 대해 수백억원의 국민 세금이 쓰인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것을 추진하는 주체가 서울 도심 한복판을 점하는 지자체 중구청이라는 점이 함께 작용한다. 수도 서울 도심 한 복판에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전시관을 만드는 것은 도심에 동상을 세우는 행위와 다를 것이 없는 정치 행위다.
서울 도심이 갖는 상징성을 감안한다면, 그 안에 들어서는 정부 주도의 공식 기념물은 역사적 평가의 대중적 합의가 이뤄진 가치와 인물로 한정지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서울 도심은 지자체간 노골적인 상징 투쟁의 장으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
정치적인 이유로 수없이 세워진 뒤 후일 옮겨지고 종국에는 시민들이 알 수도 없는 곳에 숨어버리거나 철거된 동상들, 또 새로 세워지면서 첨예한 갈등을 촉발시켰던 동상들, 이러한 서울 도심의 동상들이 건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서울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픈 분들은 twitter.com/js8530 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