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국회 의원회관 638호 임수경 의원 사무실. 임 의원의 북한 방문 미공개 사진과 각종 관련 자료가 사무실 한 쪽에 빽빽이 쌓여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북한 문예출판사가 제작해 1990년 9월 남북고위급회담 참석차 방문한 연형묵 당시 정무원 총리를 통해 전달한 임 의원의 사진앨범 두 권이다.
숙소인 평양 고려호텔에서 수많은 인파의 환영을 받는 모습, 당시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외국인들과 함께 평양거리와 백두산 등을 행진하는 사진이 눈길을 끈다.
대동강에서 배를 타는 임 의원의 모습을 호기심 있게 지켜보는 평양시민들이나 평양 창광유치원에서 지금쯤 30대 초반이 됐을 어린이들과 찍은 사진도 이채롭다.
임 의원은 "북한쪽 관계자에게 ''조국은 하나다''라는 어깨띠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해 나만 그 어깨띠를 두르고 다녔다"고 설명했다.
"평양 제1백화점에서 천과 물감을 내가 사서 직접 만들었다. 당시 북한에서 태극기를 공개적으로 두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 임 의원의 회고다.
비유하자면 북한에서 태극기를 앞세운다는 것은 서울 거리에서 인공기를 게양하는 것과 같다. 물론 북한은 임 의원이 천과 물감으로 태극기를 그릴 줄은 몰랐단다.
최근에는 국가기록원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서로 사진을 보관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국내 일부의 이념적 시비와는 관계없이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임 의원은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는 입장이다. 다만 "많은 분들이 공유하면 좋겠다"며 머지 않은 시기에 미공개 사진을 중심으로 전시회를 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임 의원은 전문가의 도움을 얻어 미공개 사진 등 각종 자료를 먼저 분류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임 의원은 약관의 나이에 북한을 방문하고 판문점을 통해 돌아왔다는 엄청난 경력 때문에 국내의 일부 보수층에게는 존재 자체가 비난의 대상이었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에 대해 임 의원은 "근거없이 던지는 비난과 매도가 적지 않았다. 감정적 배설이라는 생각도 들었다"며 "소모적 논쟁은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24년 전의 방북을 돌아보면 "역사의 발전은 결국 금기의 장벽을 깨는 것이라고 본다"며 "북한이 더 이상 금단의 땅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1989년 임수경 방북, 무슨 일 있었나 |
1989년 6월 30일, 당시 만 20살의 앳된 여대생이었던 민주당 임수경 의원이 북한을 전격 방문했다.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 때는 평양은 물론이고 마음만 먹으면 금강산이나 개성을 관광할 수 있었지만 그 때만 해도 북한은 금단의 땅이었다. 앞서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통일운동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89년 3월에는 소설가 황석영씨와 고 문익환 목사가 방북을 감행하며 분단의 벽에 틈을 내려 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한국외국어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임 의원은 평양에서 열린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자 자격으로 북한을 찾았다. 군사분계선이 가로 막고 있었던 탓에 임 의원은 6월 21일 서울을 떠나 일본 도쿄에서 1주일을 머문 뒤 서독을 거쳐 9일 만에 평양에 도착했다. "남한은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이고 "못살고 굶주린다"던 북한의 선전과는 달리 임 의원의 밝고 당찬 모습은 북한 주민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누구도 예상 못한 방북으로 남북한은 물론 전 세계의 관심을 끌었던 임 의원의 귀환은 더욱 극적이었다. 분단 뒤 최초로 판문점을 통해 북에서 남으로 넘어온 민간인이 된 것이다. 임 의원은 7월 27일 1차 판문점 귀환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러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임 의원의 귀환을 돕기 위해 문규현 신부를 7월 27일 북한에 파견했다. 결국 임 의원은 광복절인 8월 15일 오후 2시 22분 문규현 신부의 손을 잡고 판문점 내 군사분계선을 넘어 돌아왔다. 귀환하자마자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 연행돼 조사를 받은 뒤 재판에 넘겨져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임 의원은 92년 성탄절을 앞두고 가석방됐다. 임 의원이 그로부터 다시 평양을 방문하기까지는 12년이 걸렸다. 지난 2001년 정부의 공식승인을 받아 평양에서 열린 민족통일대축전에 남측 대표 자격으로 방북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