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경, "평양에서 태극기 직접 만들어 몸에 둘렀다"

임수경의원, 방북 미공개 사진 24년 만에 CBS 노컷뉴스에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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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임수경 의원이 1989년 6월 북한을 방문할 당시 촬영됐던 미공개 사진을 24년 만에 CBS노컷뉴스에 공개했다. 안전행정부 산하 국가기록원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서로 눈독드릴 만큼 자료적 가치가 높은 사진이어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10일 국회 의원회관 638호 임수경 의원 사무실. 임 의원의 북한 방문 미공개 사진과 각종 관련 자료가 사무실 한 쪽에 빽빽이 쌓여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북한 문예출판사가 제작해 1990년 9월 남북고위급회담 참석차 방문한 연형묵 당시 정무원 총리를 통해 전달한 임 의원의 사진앨범 두 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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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형묵 총리는 이 앨범을 통일부에 줬고, 통일부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감 중이었던 임 의원의 가족에게 이 앨범을 즉시 전달했다. 앨범에는 임 의원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할 때부터 귀환을 위해 판문점에 설 때까지의 미공개 사진이 차례대로 실려 있다.

숙소인 평양 고려호텔에서 수많은 인파의 환영을 받는 모습, 당시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외국인들과 함께 평양거리와 백두산 등을 행진하는 사진이 눈길을 끈다.

대동강에서 배를 타는 임 의원의 모습을 호기심 있게 지켜보는 평양시민들이나 평양 창광유치원에서 지금쯤 30대 초반이 됐을 어린이들과 찍은 사진도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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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하나다"라는 어깨띠를 두른 북한 학생들과는 달리 "조국은 하나다"라고 쓰인 어깨띠를 착용한 임 의원의 모습도 보인다.

임 의원은 "북한쪽 관계자에게 ''조국은 하나다''라는 어깨띠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해 나만 그 어깨띠를 두르고 다녔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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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한 귀환을 시도하면서 태극기를 온몸에 두른 임 의원의 사진도 있다. ''통일의 꽃''이라지만 북한에서 태극기를 들고 나오는 것이 허용됐을까.

"평양 제1백화점에서 천과 물감을 내가 사서 직접 만들었다. 당시 북한에서 태극기를 공개적으로 두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 임 의원의 회고다.


비유하자면 북한에서 태극기를 앞세운다는 것은 서울 거리에서 인공기를 게양하는 것과 같다. 물론 북한은 임 의원이 천과 물감으로 태극기를 그릴 줄은 몰랐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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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의원이 현재 사무실에 보관 중인 사진자료는 일부에 불과하다. 자택에는 더 많은 사진이 있다. 미공개 사진만 수백장 정도 될 것 같은데 임 의원도 정확히는 모른다.

최근에는 국가기록원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서로 사진을 보관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국내 일부의 이념적 시비와는 관계없이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임 의원은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는 입장이다. 다만 "많은 분들이 공유하면 좋겠다"며 머지 않은 시기에 미공개 사진을 중심으로 전시회를 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임 의원은 전문가의 도움을 얻어 미공개 사진 등 각종 자료를 먼저 분류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임 의원은 약관의 나이에 북한을 방문하고 판문점을 통해 돌아왔다는 엄청난 경력 때문에 국내의 일부 보수층에게는 존재 자체가 비난의 대상이었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에 대해 임 의원은 "근거없이 던지는 비난과 매도가 적지 않았다. 감정적 배설이라는 생각도 들었다"며 "소모적 논쟁은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24년 전의 방북을 돌아보면 "역사의 발전은 결국 금기의 장벽을 깨는 것이라고 본다"며 "북한이 더 이상 금단의 땅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1989년 임수경 방북, 무슨 일 있었나
1989년 6월 30일, 당시 만 20살의 앳된 여대생이었던 민주당 임수경 의원이 북한을 전격 방문했다.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 때는 평양은 물론이고 마음만 먹으면 금강산이나 개성을 관광할 수 있었지만 그 때만 해도 북한은 금단의 땅이었다.

앞서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통일운동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89년 3월에는 소설가 황석영씨와 고 문익환 목사가 방북을 감행하며 분단의 벽에 틈을 내려 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한국외국어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임 의원은 평양에서 열린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자 자격으로 북한을 찾았다. 군사분계선이 가로 막고 있었던 탓에 임 의원은 6월 21일 서울을 떠나 일본 도쿄에서 1주일을 머문 뒤 서독을 거쳐 9일 만에 평양에 도착했다.

"남한은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이고 "못살고 굶주린다"던 북한의 선전과는 달리 임 의원의 밝고 당찬 모습은 북한 주민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누구도 예상 못한 방북으로 남북한은 물론 전 세계의 관심을 끌었던 임 의원의 귀환은 더욱 극적이었다. 분단 뒤 최초로 판문점을 통해 북에서 남으로 넘어온 민간인이 된 것이다.

임 의원은 7월 27일 1차 판문점 귀환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러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임 의원의 귀환을 돕기 위해 문규현 신부를 7월 27일 북한에 파견했다.

결국 임 의원은 광복절인 8월 15일 오후 2시 22분 문규현 신부의 손을 잡고 판문점 내 군사분계선을 넘어 돌아왔다.

귀환하자마자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 연행돼 조사를 받은 뒤 재판에 넘겨져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임 의원은 92년 성탄절을 앞두고 가석방됐다.

임 의원이 그로부터 다시 평양을 방문하기까지는 12년이 걸렸다. 지난 2001년 정부의 공식승인을 받아 평양에서 열린 민족통일대축전에 남측 대표 자격으로 방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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