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공정사회는 10년 전 12세 딸의 성폭행범을 직접 추적, 범인검거를 주도한 엄마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메가폰을 잡은 이지승 감독(43)은 충무로에서는 1000만 영화 ''해운대'' 프로듀서로 유명하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의 아들이기도 한 그는 공정사회로 감독 직함을 추가했다.(①에 이어)
■ "피해자에게 확실한 카타르시스 주고싶었다"
공정사회는 길거리에서 장영남이 한 젊은 남자와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소매치기 당하는 상황처럼 보이나 나중에 알고 보면 그는 장영남이 추적 끝에 붙잡은 딸의 성폭행범이다.
그렇게 호기심을 자극하며 시작된 영화는 시간순서대로 이야기를 풀어놓지 않고 마치 양파껍질 벗기듯 조금씩 사건의 전말을 드러낸다. 특정 순간이나 상황이 반복되는 감이 있지만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드는 구성의 힘이 돋보인다.
이 감독은 "전 뒤죽박죽 방식이라고 불렀는데 예산과 무관하게 그렇게 이야기를 풀고 싶었다"며 "특히 첫 장면은 이 영화를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장면이었다"고 남다른 의미를 전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실제와 다른 점이 있다. 이 영화에서는 ''아줌마''(이 영화의 영어제목이다) 혼자 고군분투한다. 유명 치과의사인 남편과는 별거 중으로 아줌마의 남편은 딸의 피해 사실이 알려져 자신의 명예가 실추될까봐 전전긍긍한다. 담당형사는 절차상 문제를 운운하며 기다리라고만 하고 정작 범인의 은신처를 찾았다는 전화에는 "지금은 바쁘니까 내일 가겠다"고 답한다.
실제로 당시 피해자의 엄마는 담당형사에게 "토요일이니까 월요일에 가자"는 답변을 들었으나 남편이 거칠게 항의하면서 곧장 현장에 달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감독은 "한국사회에서 아줌마들이 처한 현실과 그들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연출의도를 설명했다. 또한 "영화에서도 그런 말이 나오지만 형사 한 명이 40~50건의 사건을 맡으니 모든 사건에 올인할 수가 없는 게 현실이다.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한편으로는 아무리 그렇다지만 피해자에게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해주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고 말했다.
결말은 영화적 상상을 보탰다. 현실에서는 범인을 잡지만 영화에서는 범인을 놓치고 사회의 무관심에 지친 아줌마가 직접 복수에 나선다. 마지막 복수극은 눈을 질끈 감게하지만 피해 어린이가 조두순 사건의 피해자 나영이처럼 장기가 심하게 손상돼 불임등 여자로서의 삶을 발탁당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다는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정말 제 심정이 딱 그랬다. 혹시나 이 영화를 볼지도 모르는 당시 피해자에게 확실한 카타르시스를 주고 싶었다. 더불어 돈이면 납치살인도 가능한 오늘날의 현실도 풍자하고 싶었다."
아동성폭력을 소재로 했으나 표현수위는 절제했다. 촬영과정에서도 행여 아역연기자가 상처받을까봐 주의를 기울였다. 이 감독은 "이재희 양이 올해 10년 전 피해자와 같은 12살이 됐다"며 "아이가 사건의 내용을 인지하지 못하게 작전을 세웠고, 불가피한 몇 장면 빼고는 두 사람이 최대한 같은 공간에 있지 않게 배려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최근 진행된 VIP시사회에서 이재희 양은 촬영 당시 가장 친했던 성인연기자로 가해자를 연기한 배우 황태광을 꼽기도 했다. 현장에서 재밌게 놀아줬다는 게 이유였다.
대신 가해자의 모습은 꼼꼼하게 보여준다.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바닥에 비닐을 깔고, 장갑을 끼고, 홀땃 벗고 자신의 은신처를 오가는 모습은 보기만해도 소름이 돋는다.
"가해자의 범행은 완전 허구다. 저는 그곳을 가해자의 집이 아니라 오직 범행을 위한 작업실로, 범인은 인상 좋은 옆집 아저씨로 생각했다."
■ 이태원의 아들, "난 복 받은 사람"
태흥영화사는 1984년 ''무릎과 무릎사이''로 시작해 ''기쁜우리 젊은 날'' ''젊은 날의 초상'' ''장군의 아들2, 3'' ''서편제'' ''장미빛 인생'' ''태백산맥'' ''축제'' ''춘향뎐'' ''취화선'' 등 수십편의 영화를 제작하며 20여년 간 충무로를 주름잡았다. 이 감독은 그 덕에 어린시절 영화가 친숙한 환경에서 자랐다. 한마디로 충무로 별들이 집을 수시로 들락거렸다.
이 감독은 "강수연 누나, 안성기, 신현준, 박중훈, 이장호·배창호·임권택 감독님까지 늘 보고 자랐다"고 떠올렸다. 하지만 그런 환경이 너무 일상적이어서 청소년시절에는 단 한 번도 장차 영화를 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부에만 전력하던 모범생이었다.
이 감독은 "특별한 계기 없이 대학진로를 결정하려는 순간 그냥 확, 영화가 하고 싶어졌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심하게 반대했다. 아버지는 무척 힘들 것이라고 우려한 뒤 뜻대로 하라고 하셨다.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는 대학 입학하고 알게 됐다."
1988년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이 감독은 "저에 대해 알려지면서 좀 과장해 반으로 갈리더라. 반은 쟤는 대충 해도 감독될 놈, 반은 저한테 시쳇말로 잘 보이려고 애쓰는 부류였다. 대학원을 연출이 아닌 이론으로 간 이유는 그런 편견이 싫어서였다"고 돌아봤다.
이 감독은 미국 뉴욕에서 올 로케한 이재한 감독의 입봉작인 ''컷런스딥''을 통해 프로듀서 입봉했다. 뉴욕대 대학원 재학 당시 학부학생이던 이 감독을 알게된 것.
"아버지 회사와 무관하게 제 일을 시작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프리랜서로 일했다. 아버지의 후광 없이 열심히 하는 친구란 평가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늘 곁에서 그를 도와줬다. 그는 "아버지가 저 멀리서 제가 편하게 일할 환경을 조성해주셨던 것같다"며 "저도 때로는 아버지를 마지막 카드로 써먹었다. 특히 어르신 배우들과 일할 때 전 그분이 출연한 옛날영화를 아니까 아버지 얘기를 꺼내면 다 맞춰주셨다"며 뗄 수 없는 혈연을 인정했다.
아버지가 제작자로 머물렀다면 아들은 연출로 영역을 확장했다. 아버지의 반응은 어떨까? 이 감독은 "딱히 표현은 안하시나 기특해하는 것같다"며 "특히 이 영화로 최소한 욕은 안 먹으니까 뿌듯해하신다"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