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찰, 어떤 희생자 만들더라도 정권 유지 의식
- "검사, 판사, 사건 관련자 1명이라도 잘못했다. 미안했다 말해주길"
인터뷰를 인용보도할 때는프로그램명 ''CBS라디오 <김미화의 여러분>''를 정확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저작권은 CBS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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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 : FM 98.1 (14:05~15:55) ■ 진행 : 김미화 ■ 게스트 : 강기훈
강기훈 진술서(노컷뉴스)
◇ 김미화> 1991년 이른바 유서대필사건으로 재판을 받았다가 법원의 재심 결정으로 다시 재판을 받고 있는 분이 계시죠. 현재 암투병 중이어서 빨리 재판을 진행해서 진실을 규명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황이고요. 자, 강기훈 선생 모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 강기훈> 안녕하세요.
◇ 김미화> 요새 어찌 지내십니까?
◆ 강기훈> 원래 하던 일을 잘 못하고 있고요. 주로 병원에 정기적으로 왔다갔다하면서 지내는 게 주요한 일과가 됐습니다.
◇ 김미화> 지금은 간이 안 좋으시고요?
◆ 강기훈> 수술은 그쪽을 했는데요, 아무래도 전체적으로 면역력이 떨어져있어서 이러저러한 합병증도 좀 있겠죠. 그런 거 치료하는 게 주요한 일입니다.
◇ 김미화> 항암 치료는요?
◆ 강기훈> 지금 하지 않고 있고요. 면역력 증간에 관련된 것을 주로 하고 있어요.
◇ 김미화> 원래 하시던 일은 뭐였나요?
◆ 강기훈> 원래는 회사원이었고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천일염을 해외에 수출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 김미화> 몸 상태가 좋았다 나빴다 하는 상황인가요?
◆ 강기훈> 네.
◇ 김미화> 일주일에 2번 치료받으러 다니세요?
◆ 강기훈> 정기적으로 가는 건 그렇고요, 정기 검진이 또 있고요.
◇ 김미화> 통증은 어때요?
◆ 강기훈> 그런 것보다 아무래도 몸의 전반적인 컨디션 문제가 가장 그렇고요. 먹는 거라든지 잠자는 거라든지. 거기에 제일 먼저 이상이 오니까. 먹는 건 요새 괜찮습니다.
◇ 김미화> 잠은요?
◆ 강기훈> 잠은 좀 끊어져 자네요. 요샌 그렇습니다.
◇ 김미화> 푹 주무시지 못하는 군요.
◆ 강기훈> 아무래도 좀.
◇ 김미화> 간병은 어느 분이 해주세요?
◆ 강기훈> 집에 제가 주로 있으니까 가족들이.
◇ 김미화> 아내?
◆ 강기훈> 네.
◇ 김미화> 좋은 음식도 챙겨 드셔야 하는데.
◆ 강기훈> ..
◇ 김미화>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옥살이를 하셨는데 그게 어떤 사건이었죠?
◆ 강기훈> 상당히 지난 일이라 그렇습니다만, 1991년도에 노태우 정부 제6공화국이었고요. 그때 정권에 큰 위기가 왔어요. 물론 그 이전에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일들이 있었습니다만 가장 큰 계기는 91년도 4월달에 명지대에 강경대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등록금 인상 반대를 위함이었을 거예요.
그 시위를 하다가 경찰이 개입해서 경찰이 쇠파이프를 휘둘러서 그 학생이 사망을 합니다. 이것이 총체적인 정권의 문제다. 부도덕한 정권을 몰아내야겠다는 움직임이 굉장히 거세졌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일언반구, 긍정적인 대답을 하지 않고 오히려 더 토끼몰이식으로 시위를 제압한다든지. 이렇게 나와서 그것에 항의하는 분신이 이어졌죠. 그러던 와중에 5월8일날 저와 함께 사무실에서 같이 일하던 김기설이라는 후배가 분신을 하고 서강대 옥상에서 투신하는 사건이 있었고요.
그가 갖고 있던 유서를 본인이 쓴 게 아니라 제가 대신 써주고 자살을 도와줬다. 이런 죄목을 저에게 뒤집어씌워서 결론적으로 92년도에 유죄를 최종적으로 대법원에서 고한 사건입니다.
◇ 김미화> 왜 수사당국이 강기훈 선생을 유서를 대필했다고 지목했을까요?
◆ 강기훈> 저 아니어도 그 누군가가 아마 비슷한 혐의를 쓰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아마 지금 듣고 계신 분들은 잘 이해를 하지 못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냥 결론적으로만 말씀드리면 그때 당시에 검찰은 정권의 안보를 위해서는 어떤 희생자를 만들어서라도 정권을 유지해야 한다는 임무, 소명의식 비슷한 것을 갖고 있었어요. 분신배후에 대한 수사는 비단 저한테만 일어난 건 아니었고요.
안동대에서 5월 초에 분신한 김형균 학생 같은 경우 역시 분신배후 수사가 있었습니다. 그 이외에도 굉장히 많아요. 모든 것에 다 배후가 있다는 식으로 몰아갔습니다.
◇ 김미화> 어땠어요? 분위기가? 분신이 계속 됐던 시기인가요?
◆ 강기훈> 며칠단위로 분신이... 정권에 항의하는 분신이었는데요. 제가 재야단체에서 활동을 하면서도 굉장히 당혹스럽고 정말 힘들었던 시기로 기억하고요. 그때 당시 일하던 분들이 가슴에 무거운 돌을 얹어놓은 것처럼 그때를 떠올릴 때마다 고통스러워합니다. 너무 많은 죽음이 있었기 때문에 힘들어하죠. 그만큼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조금 어려운 상황들이 이어졌던, 불행했던 한 시대였습니다.
◇ 김미화> 그렇게 해서 94년에 출소를 하셨고요. 징역3년, 자격정지 1년6개월.
◆ 강기훈> 네, 그랬습니다.
◇ 김미화> 검찰수사과정음 어땠나요? 강압이나?
◆ 강기훈> 검찰은 수사를 할 의지가 애초에 없었어요. 그냥 저를 범인으로 찍어놓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필적감정서가 있으니 너는 움직일 수 없는 범인이다.'''' 이렇게 얘길 하고서 제가 검찰에 나가서 수사를 받고 조사를 받았던 기억은... 그냥 괴롭힘을 당했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면밀하게 증거를 분석해서 이렇지 않느냐고 얘기 한다기보다는 제 말 꼬투리를 잡고 ''''아까는 이렇게 얘기했는데 왜 이렇게 얘기하느냐. 얘기가 다르지 않느냐. 이런 거짓말쟁이.'''' 이런 식의 얘기가 계속 됩니다. 아니면 ''''자백을 하지 않으면 네 가족을 족칠 수밖에 없다.'''' 정말 그렇게 할 것 같았어요.
실제로 참고인에 대해서 그렇게 했고요. 그러면서 잠을 안 재웁니다. 듣기 싫은 말을 하면서. 정신이 제대로 있을 수 없는 상황으로 20일 보냈죠. 뻥 뚫려있습니다. 그때 기억들은, 반복되는 질문과.
◇ 김미화> 그때가 몇 살이었죠?
◆ 강기훈> 제가 28이었습니다.
◇ 김미화> 인터넷으로 강기훈 씨 검색해보면 너무 잘생긴 청년이 수갑을 차고 끌려가는 사진이 나오거든요.
◆ 강기훈> 잘생긴 건 아니고요. (미소)
◇ 김미화> 아니에요. 정말 잘생기셨어요. 그런데 무죄라고 무던히 주장하셨을 텐데 어떻게 법원이 유죄판결을 내렸어요?
◆ 강기훈> 처음에는 ''''이게 재판으로 갈까?'''' 이렇게 생각했어요. ''''에이, 설마.'''' 검찰이 오해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처음에 있었고요. 얘기하면 풀리겠지. 검찰청가서 그게 하루이틀 만에 깨졌습니다. ''''아, 목적은 이게 아니구나. 진실을 찾으려는 게 아니라 범인을 하나 만들려고 하는구나.'''' 법원에서 열심히 들어주는 척을 하기에 기대를 했는데 유죄를 내리더라고요.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기소, 1심에서 유죄판결, 2심에서도 또 유죄판결, 대법원에서도 또 유죄판결. 이게 가능한 일인지.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건지 딴 세상에 있는 건지. 철이 좀 덜 들었던 것 같아요.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본 건지. 너무 법원이나 검찰 사람들의 이성을 믿었던 건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 김미화> 혐의가 자살 방조죄?
◆ 강기훈> 자살을 도와줬다는 뜻입니다.
◇ 김미화> 이렇게 해서 강기훈 선생을 유서대필로 몰면서 노태우 정부가 다시 정국의 주도권을 쥐었고, 정국을 전화하게 됐다고 볼 수 있나요?
◆ 강기훈> 결정적으로 그랬다고 볼 수 있죠. 그러니까 정권에 대한 부도덕성을 질타하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에 이 글씨가 맞느냐, 저 글씨가 맞느냐를 가지고, 모든 관심이 그쪽으로 몰려갔으니까. 아주 성공한 거죠.
◇ 김미화> 당시에 유서가 강기훈 씨 필체라면서 필적을 감정했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김형영 문서분석실장이 며칠 뒤 사기혐의로 구속됐다면서요?
◆ 강기훈> 그 다음해인가? 그 전에도 뭐 있었고요. 그 다음해에도 허위감정 혐의로 구속이 됐는데 저를 담당했던 검찰쪽에서 압력을 행사해서 수사를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냥 나왔어요. (헛웃음) 뇌물은 받았는데 허위감정은 없었다는 이런 식을 판결이 나왔습니다.
◇ 김미화> 세월이 흘러서 2005년도에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국과수 필적감정이 공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결론을 내렸나요?
◆ 강기훈> 네. 그게 사건 발생 후 15년, 16년 후인데요. 그때부터 재심까지 오는 과정이 시작이 된 겁니다. 그리고 한 7년 이상이 걸린 건데요. 경찰청 과거사위에서 이거 좀 이상하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이건 경찰에서 수사한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진실위에 넘겼죠. 그래서 과거사위원회에서 조사를 하다가 결국 2007년도로 기억합니다. 재심을 해라. 그리고 국가가 사과해라. 이런 결정을 내립니다.
◇ 김미화> 그래서 2007년도 진실화해위원회에서도 법원에 재심을 건 거네요.
◆ 강기훈> 그렇습니다.
◇ 김미화> 그동안 얼마나 억울하셨어요?
◆ 강기훈> 글쎄요, 처음에는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을 했고요. 꿈꾸고 있나 이런 생각을 했고요. 정신을 차려놓고 보니까 제가 유죄판결을 받고 대전 교도소에 있더라고요. 하루하루가 용납할 수 없는 시간, 이런 정도로 표현하면, 조금은 어떤 시간도 용납할 수 없는... 그렇게 표현하면 얘기가 되려나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요. 이상하게 제 성격이 변해가기 시작하고 이런 것도 제 스스로 자각한 것도 한참 뒤의 일입니다. 정신적으로 아팠던 거죠.
◇ 김미화> 성격이 어떻게 변해요?
◆ 강기훈> 굉장히 날카롭고 까칠하게 변하거나 냉소적으로 되거나. 약간의 기행을 한다거나.
◇ 김미화> 징역 3년 사는 동안 한 치도 용납할 수 없다는 표현하셨는데, 나가면 어떤 일을 해야겠다. 이런 결심 같은 건 하셨어요?
◆ 강기훈> 전반적인 무력감이 그때 저를 지배했던 것 같아요. 감옥생활이 안겨준 건 무력감이었습니다. 그리고 재심이라는 건, 제가 법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 절차가 굉장히 복잡하고 까다롭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어요. 우리나라 소송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재심사유가 새로운 범인이 나오거나, 제게는 해당사항이 없죠.
아니면 새로운 증거가 나오거나, 그 증거라는 게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감정인데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어떻게 한 개인이 뒤집어엎습니까? 이런 암담함 때문에 유일한 방법은 재심밖에 없는데. 실제로 길이 없었던 거죠. 제게는... 그래서 이거 너무 어렵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생각... 전반적인 무력감이 한동안 저를 괴롭혔죠.
◇ 김미화> 무죄를 끊임없이 주장하는데 우리 사회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사법부조차도 이랬을 때, 화가 많이 나셨을 것 같아요.
◆ 강기훈> 병이 날 정도로 화가 납니다. 한 번 생각을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어요. 한 두 사람이 관련된 게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이렇게 한 마음 한 뜻으로 없던 사실을 있는 것이라고 얘기하며, 그걸 또 법이라는 이름으로 판결을 내리며 그게 사실인양 이야기되는 이런 상황을 제가 맞고 있는 거잖아요. 잠이 안 오더군요.
◇ 김미화> 한 두 사람이 관여된 게 아니라면?
◆ 강기훈> 검찰, 구체적으로 제 수사를 담당한 7명의 검사, 그리고 그대로 그 사람이 얘기하는 걸 받아적은 언론이라든가. 제가 합의부였으니까 9명의 재판관들. 그 사람들이 다 똑같은 결론을 내린 거거든요.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거든요.
공개적인 석상에서 그때 자기들이 잘했다고 얘길 해요. 잘못할 수도 있었다는 얘길 아예 꺼내지 않습니다. 잘했다고 얘기합니다. 암담하고 절망적인 거죠. 그래서 제가 하는 얘기가 그런데요, 재판을 다시 시작했다는 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때 당시에 이 사건을 담당했던 어느 한 사람이라도 ''''무리가 있었다, 미안하다''''라는 얘기를 제게 해주기를 바랍니다. 그게 저한테는 제판보다 더 소중하고 의미가 있다. 이렇게 얘기하곤 합니다.
◇ 김미화> 그분들, 똑같은 결론을 내린 그분은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한 소식 듣고 계시죠?
◆ 강기훈> 언론에 보도가 되는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무얼 하는지는 때때로 기자분들하고 인터뷰 할 때 ''''지금 뭐하고 계신대요.'''' 얘기를 해주시니까 알 때가 더 많고요. 일부러 찾아보지는 않았고요.
◇ 김미화> 높은 분들이 다 되어계시던데. 제가 아까 방송 들어오기 전에 ''''아이들은 지금 몇 살인가요?'''' 하고 여쭤봤는데 아이들이 이제 중학생, 고등학생이에요. 어리네요.
◆ 강기훈> 네, 그렇습니다.
◇ 김미화> 아빠에 대해 이해를 할까요?
◆ 강기훈> 글쎄요. 이해를 한다는 게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어떤 상황에 있다는 건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것에 대해서 애써 화제 삼아서 제게 얘기를 걸고 그렇지 않을 뿐이지.
◇ 김미화> 집에서는 얘기를 안 하시는 편인가요?
◆ 강기훈> 하지 않게 되고요. 그냥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정도. 가족이니까요.
◇ 김미화> 재심이 받아들여지기까지 참 많은 일들이 있었을 것 같아요.
◆ 강기훈> 대단히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요, 지금 뻥하니 비어있습니다. 별일이 아닌 것들이 반복됐기 때문에. 어쩌면 제가 이런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은 엉터리... 그래서 잊고 싶었을 때도 있었습니다.
이, 잊어버리자. 모든 걸 다 잊고. 그렇게 안 됐죠. 왜냐면 해마다 거의 해마다 기자분들이 저를 찾아와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요새 근황이 어떠신가요?''''부터 시작해서 ''''최근에 저를 담당했던 검사 한 분이 대법관 후보로 추천이 되셨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런 질문을 한다든지.
저는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단발성 기사로 끝나지만 저는 그게 몇 달이 가는 거예요. 잊을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고요. 그렇게 벌써 20년이 넘었네요.
◇ 김미화> 저희도 죄송한데요. 자꾸 기억을 더 또렷하게 떠오르게 만들어드리는 것 같아서.
◆ 강기훈> 아닙니다. 이제 좀 또렷하게 만들어야 할 시기가 돼서요.
◇ 김미화> 그럼요. 어떻게 이겨내셨죠? 그 많은 힘든 과정을.
◆ 강기훈> 때때로 달랐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가족이 가장 큰 힘이 됐을 거고요. 분명히. 말을 하진 않았지만. 글쎄요, 그 상황마다 다 달라서요. 얘기하자면 길고요.
◇ 김미화> 좋은 소식이 있었으면 좋겠는데요. 이제 대법원에서 재심을 받아들여서 고법으로 사건이 다시 돌아갔잖아요. 재판은 현재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요? 무죄를 입증할 새로운 증거가 있는 건지요?
◆ 강기훈> 이미 증거는 다 나와 있다고 보고요. 그걸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만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재판이라는 게 굉장히 길고 사람을 힘들게 만듭니다. 특히 재심사건 같은 경우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거고요. 그래서 제가 바라건 데 검찰이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꿔서 좀 다른 입장에 서주시기를 바라고요. 그러면 재판 안 해도 되는 거거든요. 변호인 것을 받아들이겠다. 미안하다 이런 정도면 되는 거죠. 그러면 재판 안 해도 됩니다.
그리고 설령 어떻게 되더라도 이후에 상소나 이런 걸 포기하면 되니까 그런 걸로 말을 할 수도 있는 거죠. 그런데 제가 첫재판을 작년 12월에 했는데요. 그때 검찰의 태도는 옛날하고 똑같았습니다. 한 번 해보자 이런 거죠. 대법원에서도 재심 결정문을 발표하면서 뭐라고 얘기했냐면, 과거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문서분석 실장의 허위증언만 문제가 되지 나머지 감정서에 대해서는 신규로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한 것은 이유없다. 그렇지 않다. 옛날 감정서가 맞다. 이런 식의 결론을 가지고 얘길 했어요.
물론 이건 다시 재판을 할 사항이기 때문에 별 저건 없지만 사실 굉장히 실망스러웠거든요. 굳이 그런 얘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법원이 옛날하고 똑같다는 생각이 들고요. 어떻게 보면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 거죠. 자기는 잘못이 없는데 증언을 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문제가 있었다. 그러니까 자기는 책임이 없다. 이런 얘기로 들렸거든요. 왜 그럴까... 이렇게 찾아온 기회를... 기회라는 건 제게 찾아온 기회가 아니라 법원이나 검찰이 자신의 잘못을 뒤집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거든요.
자기들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변호인들과 함께 제가 20년 동안 노력을 해서 어쨌든 재심이라는 절차를 만들어낸 것 아닙니까. 알아서 하기 참 힘들었을 텐데 이왕 이렇게 얘기가 됐으니, 과거 부끄러운 판결 중 하나라고 얘길 하는 사람도 많던데 잘 된 것 아닙니까. 그럼 적극적으로 해야죠.
그런데 3년 동안 묵혀놨다가 한다는 말이 겨우 증거의 신빙성을 인정할 수 없고 옛날 게 맞다고 하는 것을 보니 책임회피를 하고 싶어 하는구나. 그리고 이것은 과거의 저에게 이런 판결을 내렸던 사람들과의 네트워크나 교감이 있기 전에는 감히 함부로 그런 식의 얘기를 할 수 있었을까. 그런 의문을 갖게 됐습니다.
◇ 김미화> 강기훈 선생께서 22년을 기다려서 그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그 사과 한 마디를 받으시면 그 세월이 보상이 되겠어요? 암에 걸린 게 보상이 되겠어요?
◆ 강기훈> 보상이 아니라 지금하고 있는 재판보다 그 한 마디가 더 멋지고 값지지 않느냐는 얘기고요. 가장 큰 용기는 자기가 잘못했을 때 잘못했다고 얘기하는 거잖아요. 자기한테 잘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왔잖습니까. 그 기회를 날려버리면 안 되죠. 옛날과 똑같은 판결을 내리면 안 되죠. 그 멍에를 누가 집니까? 사법부, 검찰이 질겁니다. 제가 지지 않아요. 그리고 두고두고 얼룩으로 남겠죠. 후대에까지. 그리고 그것만 남나요? 그런 결정을 내린 사람들의 이름도 남습니다. 그런 무게감을 갖고 이 재판에 임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 김미화> 김기설 씨 유족은 만나신 적 있으세요?
◆ 강기훈> 옛날 91년도 이후에는 만난 적이 없습니다. 왜냐면 서로 너무 관계 자체가 좋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어요. 재판 과정에서도 그랬고요. 그래서 만날 기회가 없었고요. 특별히 지금도 제가 만나보겠다, 이런 계획이나 생각은 없습니다.
◇ 김미화> 앞으로 어떤 소망이 있으세요? 만약에 재심도 받아들여지고,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됐다면.
◆ 강기훈> 글쎄요, 제가 원하는 게 뭔지 저도 잘 모르겠는데. (웃음) 농담이고요. 그냥 재판은 재판일 뿐입니다. 어떻게 보면 판결이라는 것도 절대적 진실이 아닐 수가 있다는 마음가짐을 준비하고 있는 거죠.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판결이라는 건 그때 당시 정치적, 혹은 사회적인 산물 정도로 생각하고요. 어쨌든 그냥 소망이 있다면 잘 됐으면, 좋은 결론이 나왔으면. 그리고 그걸 통해서 모든 사람이 짐을 조금 덜 수 있었으면. 저뿐만 아니라 91년도의 멍에를 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공통으로 해당되는 이야깁니다.
◇ 김미화> 강기훈 씨 어머니께서 유죄판결 이후에 변호를 위해서 사회과학 공부를 시작하셨다는 얘기도 들었고요. 아이들을 위해서도 마음이 급해지실 것 같아요.
◆ 강기훈> 급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았느냐 그리고 제 병에 대해서 생각을 얼마 안하기로 했어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데. 어머니는 2008년도에 돌아가셨고요. 부모님이 지금 다 안 계신 상태입니다.
◇ 김미화> 22년 만에 진상규명을 바라고 있는 강기훈 선생과 얘기 나눠봤습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 강기훈> 고맙습니다. 관심을 많이 가져주셨으면 좋겠네요.
◇ 김미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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