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 탈출의 달인들, 그러나 바깥도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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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상욱의 기자수첩] 대구 유치장 탈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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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고품격 뉴스, 세상을 더 크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CBS <김현정의 뉴스쇼=""> ''기자수첩 시즌2''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았다. [편집자 주]

대구에서 전과 25범 최모 씨가 가로 45cm, 세로 16cm의 직사각형 배식구로 유치장을 탈출해 경찰이 쫓고 있다. ''고무인간'' ''미꾸라지 탈출''이라고 다들 놀라고 있다.

◇구멍 통한 감옥탈출, 한국 신기록

대한민국 탈옥 사건 중 비슷한 사건은 조세형 탈출 사건. 전과 11범인 대도 조세형은 서울 서소문동 법원에서 구치감 벽의 환기통을 뜯고 탈주했다. 이 때 환풍기는 가로 세로 40센티미터. 수갑을 풀 수 있었던 것은 수갑이 너무 조여 손목이 아프다고 꾀를 내 수갑을 느슨하게 풀어줬기 때문이다.

1997년 1월 재소자 신창원도 부산교도소 화장실 환기구 철창을 잘라내고 탈출했다. 창살 절단 작업은 소음을 숨기기 위해 음악 방송이 나오는 오후 6∼8시에 이뤄졌고 작업이 끝나면 껌으로 절단 부위를 붙여놓아 감시를 피했다. 그는 가로 33cm, 세로 30cm 크기의 환풍구를 빠져나가기 위해 80kg이던 체중을 60kg으로 줄였다. 탈출도 탈출이지만 탈주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2년6개월간 도피행각을 벌였다.

1990년 10월, 전주 교도소 무기수 살인범 등 3명의 탈주 사건. 이들은 아예 감옥 쇠창살을 자르고 교도소 담벼락을 넘었다. 사물함으로 쓰이는 선반으로 2.7m짜리 사다리를 만들어 4.5m 높이의 교도소 담을 넘었다. 검문하던 경관으로부터 권총을 빼앗아 탈주극을 벌인 끝에 충북 대청호 야산기슭에서 경찰과 대치하다 2명은 자살했고 1명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해 경찰에게 보내진 탓에 목숨을 건졌다.

◇지구촌 탈출의 달인들

지난 9월 멕시코 북부 국경지대 피에드라스 네그라스의 감옥에서 지하 땅굴 탈출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길이 7m, 직경이 1.2m 크기의 굴을 팠다. 도망친 죄수는 131명.

지난 1월엔 인도네시아 자바섬 북동부 수라바야에 있는 밀입국자 수용소에서 파키스탄인과 아프가니스탄인 30명이 정문 밑으로 굴을 파고 탈출했다. 수저와 못, 나무막대를 이용해 수용소 내 교회 화장실에서 정문 아래로 2m정도 굴을 팠으며 굴을 파는 동안 다른 동료들은 간수들과 보드게임하며 시선을 돌려놨다고.

1962년 6월12일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미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만(灣) 앨커트래즈 섬 감옥에서 은행 강도 3명이 탈출했다. 침대에 머리모형만 남겨 놓고 감쪽같이 사라졌다. 경찰은 바다로 뛰어들었다가 상어떼에 먹히거나 익사했을 것으로 보고 수사 중단.

탈옥의 진짜 달인은 19세기 프랑스의 흉악범 프랑수아 비도크. 절도, 강도, 인신매매, 도박, 지폐위조 등으로 수십 번 투옥됐으나 탈출에 성공한 것이 무려 50회 이상. 변장술도 뛰어나 밖에 나가서는 마음 껏 거리를 누볐다 한다. 결국 경찰은 그를 스카우트해 수사에 활용했다. 비도크는 특별수사과장까지 올라가며 혁혁한 검거성과를 올렸다. 은퇴한 다음엔 세계 최초로 사설탐정 사무소를 열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도 권좌에서 내쫓겨 엘바 섬에 갇힌 적이 있다. 그러다 엘바섬을 탈출해 권력을 되찾기 위해 파리로 진격했는데 이때 점점 바뀌어가는 프랑스 언론의 보도는 언론사에 길이 남아 있다. "폭도 나폴레옹, 리옹을 지나다", "도둑 나폴레옹, 수도권에서 목격되다", "나폴레옹, 파리에 도착하시다", "황제폐하께서 백성들과 함께 하루 밤을 주무셨다".

나폴레옹이 권력을 되찾고 나서 감옥을 찾아갔다. 죄 없이 억울하게 갇힌 사람은 손들라하니 모두 손을 번쩍 들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런데 단 한 사람만 흉악한 죄를 지었으니 여기 갇혀 있어야지 어쩌겠냐고 시큰둥했다. 나폴레옹 왈, "모두 결백한 데 저 친구만 흉악하니 다른 사람들이 물들지 않게 저 친구는 내보내!"

조선 조 세종 때도 죄를 지은 관리가 사형에 처해지기 전날 밤, 하인이 여자 옷을 입고 감옥에 마지막 부부면회를 간 뒤 옷을 바꿔 입고 주인을 탈출 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세종은 ''하인은 충직하고 의로우니 풀어주고 도망친 주인은 당장 잡아다 처형하라'' 명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감옥 안도 힘들고 밖도 힘들어

일제 강점기에 YMCA에서 기독교신앙으로 민족주의를 이끌었던 월남 이상재 선생. 1902년 수구파들이 조작한 개혁당 사건으로 감옥에 갇힌 이상재 선생은 우연히 감방 벽 틈에 누군가가 끼워 둔 종이쪽지를 발견하는데 마태복음 5장과 산상수훈이었다. 이때 기독교도 가 된 선생은 감옥에서 나와 환갑이 가까운 나이로 YMCA에 투신해 민족운동을 시작했고 신간회를 결성했다. 1927년 3월 선생의 장례행렬에는 10만의 인파가 뒤를 따랐다.

선생이 감옥에서 나오신 뒤 문안 인사를 하러 간 사람이 물었다. "선생님, 감옥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 "그럼 자네는 감옥 밖에서 호강하며 지냈는가?" 세상이 이 모양이고 민족이 이꼴인데 감옥 안과 밖 무엇이 다르겠냐는 가슴 아픈 탄식이다.

감옥 생활 힘들다. 혹은 억울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감옥 밖으로 나오면 평안할까? 억울한 일도 없고? 감옥 밖도 만만치는 않다. 결코 만만치 않다.

<속리산에서>

나희덕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영글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에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 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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