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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제석사지 인동당초문암막새 새롭게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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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여 년 전 백제 말기에 사용된 기와인 익산 제석사지 인동당초문 암막새가 세계 최초의 것으로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유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익산 제석사지 인동당초문암막새는 지난 93년 처음으로시굴조사에서 확인된데 이어 지난 2008년 본격적인 조사에서 다량 출토됐다.

서동요의 주인공 백제 제30대 무왕(A.D. 600~641)때 왕실사찰인 왕릉제석사지에서 출토된 인동당초문 암막새는 우리나라 최초의 암막새이다.

암막새는 지붕을 덟는 기와중에 하나인 암기와 끝을 마감하는 기와로 당시에는암막새는 없이 수막새만 발견되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 암막새는 중국이나 고구려에서 만든 적이 없고 신라에서도 없었던 것으로 백제인이 창조한 세계 최초라고 할 수 있다.

인동당초문 암막새는 중앙의 정형화된 용문이 있고, 좌우 양측으로 우아하고 세련된 인동당초문은 고구려 벽화고분에서 보여 지는 당초문과 닮아 있다.

초기 기와의 끝부분을 손가락으로 누른 지두문암막새를 제외하면 가장 이른 시기, 7세기 중엽 당시 새롭게 선보인 건축부재로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신효 익산시 유적전시관 학예연구담당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제작시기를 놓고 논란 끝에 백제시대의 것으로 결론지음에 따라 인동당초문암막새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처음 사용된 것으로 기와학계는 보고 있다"고 말했다.

제석사지에서 출토된 암막새가 갖는 의미는 당시 중국에서나 고구려에앞서 백제에서 처음으로 암막새를 만들어 냈다는데서 찾을 수 있다.

또, 처음 만들어진 암막새치고는 문양이나 형태가 매우 세련되고 놀랄만한 기술 수준이라는 점이다.

이신효 학예연구담당은 후에 만들어진 일본의 건축에서도 암막새가 보이기 때문에백제와 교류 과정에서 그러한 것이 일본으로 전파되지 않았는가 그렇게추정되고 있다고 말했다.

제석사의 암막새의 조형은 그대로 일본으로 건너가 법륭사를 비롯한 초기 여러 사찰에 영향을 줬다.

암막새가 발굴된 제석사지는 지금도 발굴조사중이어서 일본에 영향을 미친백제시대의 유물이 얼마나 더 발굴되고 규명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익산 제석사지(사적 제405호) 출토 인동당초문암막새는 . 화려하고 우아한 인동당초문암막새는 제석사지에 대한 1993년 시굴조사에서 확인되었으며 2008년 본격적인 조사에서 금당지의 기단 외부에서 기와파편과 함께 다량 출토되었다.

1993년도 시굴조사(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와 제1차 발굴조사(2007,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출토된 인동당초문암막새는 그 제작시기를 두고 백제냐 통일신라냐 라는 논란을 야기 시킨 바 있다.

삼국시대에는 수막새만이 제작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였으나 간혹 확인되는 암키와의 끝을 구부리거나,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드림새처럼 처리한 암키와편들을 암막새의 기원으로 보고 있던 차에 발견된 제석사지 출토 인동당초문암막새는 기와학계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기와의 질이나 소성정도, 포목흔, 정면․접합수법 등은 백제의 기와임에 분명하나 장선의 평행집선문이 살펴지는 등문양과 내면에서 관찰되는 통쪽와통 흔적의 부재는 백제기와임을 단정하기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이와 같은 암막새는 제석사지 금당지 주변에서 상당수 확인되었으며 제석사폐기장(639년 화재로 불탄 잔재들을 매립한 유적, 익산시 향토유적 제2호)에서는 한점도 확인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제석사 초기가람(639년 이전)에는 사용되지 않고 그 이후 중건가람에 사용되었으며 제작 시기는 백제 말기(7세기 중반)로 판단된다.

한편,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의하면 제석사지는 백제 제30대 무왕(A.D. 600~641)이 익산으로 천도하여 세웠으나, 정관(貞觀) 13년(639년) 뇌우(雷雨)로 인하여 불당(佛堂)과 회랑(回廊) 등이 불탔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백제 왕실사찰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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