ㅎㅎ
"70년대 단색화는 저항운동의 표현이었다. 대단히 힘차다." 이우환 작가는 17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의 단색화="">전의 초청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씨는 "70년대 저항하는 방법은 추상미술밖에 없었다.비판을 주먹질로만 하는 게 아니다. 간디는 주먹질 안했다. 문화는 다양할 수 있다. 단색화는 사회가 힘들면 발생한다.70년대 단색화는 저항운동의 표현이었다.70년대 초 · 중반 특히 70년대 중반의 단색화는 어느 시대보다 힘차고 설득력 있고 감동적이다.세계사적으로 떳떳하고 훌륭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단색화가 자기수련, 해방감, 명상 등으로 사회적 해석 틀이 바뀌었다. 순수미학적 면에서 작품성이 약화되어 아쉬움이 있다. 그럼에도 지속적으로 잘 지켜왔다고 본다. 힘차고 잘된 작품들이 있었으니,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 증인적인 역할을 했다고 본다.지금 <한국의 단색화=""> 전람회를 갖는 것은 기적적이다.지금이 딱 맞는지도 모른다"고 이번 전시의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렇게 힘차던 단색화가 점차 권력화하면서 점차 약화되었다는 것이 이 작가의 설명이다.그는 "70년대 후반에 단색화파가 생겨 ''리콜 드 서울'', ''앙데팡당''전을 치르고, 점점 권력화하면서 저항적 표현에서 점점 자기반복이 심해졌다"고 말했다.
ㅎㅎ
70년대 단색화에서 저항적 표현의 대표적 사례로 최병소 작가가 꼽혔다. 이우환 작가는 "최작가가 70년대에 신문을 연필로 새까맣게 지워 만든 만든 작품은 강렬하다. 왜 반복성인가.반복성은 의미에 대한 부정이다. 검정색의 사용은 색의 의미를 부정한 것이다. 색채 자체가 현실이다. 색채로서 검정색은 색이 아니다. 썩는다는 의미이다."고 해석했다.
이우환 작가가 70년대 단색화를 저항운동의 표현으로 보는 시각에 대해 다소 의문이 일었다. 70년 그 당시 단색화에 대한 인식은 어떠했을까. 그 당시 작가는, 비평가는,관객은 각기 단색화를 저항운동의 수단으로 인식하고, 담론을 형성하고, 작품을 이해했는지 궁금하다. 그 시대에는 저항 담론이 제대로 이뤄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을 전달해야 할 신문기사마저 군사정권 아래서는 언론검열을 피해 은유적으로 쓰여져, 독자들이 행간의 숨은 뜻을 애써 찾아내려 했다고 하지 않은가.70년대 ''저항적 표현''의 단색화 작품들이 그 당시 신문-독자의 관계처럼, 작품-관객 간에 추상의 숨을 뜻을 찾기 위한, 보이지 않은 긴장이 있었는지가 중요하다.
"민화, 미술사에서 정당한 평가해야"이우환 작가는 민화가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중석 질문자가 "민화에 관한 책을 쓰셨는데, 민화에 대한 관점을 듣고 싶다"는 질문에서 나온 얘기다. 이 작가는 "그 책 제목은 원래 ''구조로서의 회화''인데,출판사에서 멋대로 제목에 민화를 붙인 것이다"고 운을 뗀 뒤 격정적인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민화는 격이 떨어진다고 하여 미술사에 끼지 못하는데, 우리 미술사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이것은 수묵산수화 중심으로 회화사를 보는 일본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다. 민화는 채색생활화이자 서양의 장식화에 해당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 미술사를 수묵산수화와 채색 생활화, 두갈래로 정리해야 한다고 최순우 선생에게 수없이 건의했다. 민화는 전통회화의 한 부분이다. 민화는 도화원 화원들이 사대부의 부탁을 받고 그려준것이 있다. 그래서 낙관이 없다. 생활화이기 때문에 가장 현대적이고, 체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생명력이 있고 활기차다.호주에서 열린 민화 전람회를 보고 외국 관람객들이 깜짝 놀라는 것을 봤다."
한국의>한국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