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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만 있다면 웬만한 슬픔은 견딜 수 있다 - 빵돌이 기자의 빵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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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상욱의 기자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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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고품격 뉴스, 세상을 더 크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CBS <김현정의 뉴스쇼=""> ''기자수첩 시즌2''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았다. [편집자 주]

빵집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독립형 제과점(동네 빵집) - 주인아저씨가 기술자.
준 프랜차이즈 형 - 기업형 베이커리 간판만 빌리고 주인아저씨가 기술자.
프랜차이즈 형 - 본사가 기술 교육시키거나 기술자 파견해가며 관리.
인스토어 베이커리 -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에 들어 가 있는 베이커리
양산 형 - 봉지에 담겨 팔리는 공장빵
할인점.

그런데 동네 빵집들이 속속 폐업하고 있다는 소식이 이번주 들어 신문방송에 잇따라 실리고 있다. 2003년 1만 8천개나 되던 동네 빵집이 2011년 11월 기준으로 4천개로 줄었다고 한다. 중소기업중앙회가 발표한 자료이다.

제빵제과점은 초기 투자자본이 비교적 적게 들고 기술만 좋으면 창업이 쉬운 업종이어서 실직자나 은퇴자들이 대거 진출한 사업이다. 그런데 갈수록 늘지 않고 7~8년 사이에 1/4 이하로 줄어 든 까닭이 뭘까?

◈ 프랜차이즈에 항복하거나 폐업하거나

첫째는 기업형 베이커리 브랜드가 자본의 힘과 마케팅 전략을 발휘해 엄청난 수의 대리점·직영점을 세우고 손님을 끌어갔기 때문이다.

파리바케트·뚜레쥬르를 합쳐 체인점 수가 4,400개로 전국의 남아 있는 마을 빵집보다 많다. 지역의 중소빵집들이 광고와 물량공세에 밀려 폐업하거나 견디지 못하고 체인점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국내 베이커리 시장 규모는 3조 원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기업형 프랜차이즈그룹 SPC의 파리바게트와 CJ의 뚜레쥬르가 시장을 이끄는 쌍두마차. 빵을 즐기는 소비인구가 늘고 기호도 다양해지면서 아직도 경쟁이 가장 치열하게 벌어지는 곳이 제과점 시장이다.

◈ 딸들이 빵집으로 간 이유는?

다음은 재벌가 딸들의 진출. 재벌가는 창업자 세대 및 2대에서는 딸들에게 사업보다는 내조를 맡겼다. 바깥 활동이라 해도 미술관, 박물관 등 비영리 문화 사업에 국한되었다. 그러다 최근 사업체의 지분 보유와 사업 경영으로 딸들에게 길을 열고 있는 중이다. 재벌가 딸들의 첫 번째 경쟁 품목은 명품이었고 이어 빵과 커피에서 승부를 겨루는 중이다.

이부진 신라호텔 사장. ''''아티제''''라는 고급 커피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다. 신라호텔과 강남 지역에 15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명희 신세계 회장의 딸인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이 들여 온 브랜드는 미국의 고급 식료품점 ''''딘앤델루카''''. 자신이 최대주주로 있는 조선호텔 베이커리를 통해 들여왔다. 조선호텔 베이커리는 프랑스 제과 브랜드 ''''달로와요''''와 이탈리아 브랜드 ''''베키아에누보''''를 들여와 현재 전국 호텔과 신세계백화점 매장에 들여 놓았다.

최근에는 롯데가 3세 장선윤 씨(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외손녀이자 신영자 롯데쇼핑 사장의 딸)가 프랑스 제빵업계 ''''포숑''''과 손을 잡고 베이커리에 뛰어들었다. 제과업체 고려당이 위탁 운영하던 걸 장선윤 씨가 넘겨받아 고급 카페형 베이커리로 변신 중이다.

현대차 그룹의 정성이 전무도 ''''오젠''''이라는 브랜드로 식음료 사업에 뛰어들어 있다.

백화점, 호텔의 빵집은 재벌가 딸들이 장악하고 대형마트는 유통업계 대표 기업들이 장악해 놓더니 거리로까지 나와 고급 빵집을 차리고 있다. 거리에도 이미 프랜차이즈 가맹점들이 가득 차 있고, 외제 커피숍도 도넛츠 가게도 잔뜩이고, 고급 외제 빵집마저 몰려나오니 동네 빵집들은 그야말로 죽기 일보직전인 셈이다.

조선일보 사설을 인용해 보자.

''''제과점은 재벌가 딸들에겐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사업이다. 돈벌이가 궁했다면 몰라도 자존심 섞인 빵집 경쟁을 벌이다니 무슨 큰 벌을 받으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정말 무슨 이유일까? 잠시 머리를 굴려보고 넘어가자. 재벌가의 여성들이 뒤늦게 경영에 나서 당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분야가 패션, 유통, 제빵 등이다. 그런데 문제는 큰돈을 거두는 사업은 아니어서 자신의 덩치를 키우긴 어렵다.

큰돈과 패션, 제빵을 연결시킬 수 있는 고리는 무얼까? 부동산이다. 앞으로 재벌가 딸들의 베이커리나 패션 매장들이 어디에 매장을 내고 어떻게 땅을 넓히는지 유심히 지켜 볼 일이다. 부동산 투자와 개발로 목돈이 생기면 그것은 다시 재벌가의 핵심계열사 지분을 늘려 후계경쟁에 나서는 구도로 해석되고 있다.

2

 

◈ 빵의 힘은 하나님의 힘

다시 빵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지난해 5월 세계적인 관광 안내 가이드북 ''''미쉐린 가이드'''' 한국편(그린 레드 중에서 그린)이 프랑스어로 출간됐다. 한국의 명소와 관광문화를 소개하면서 107곳의 식당과 4곳의 빵집을 실었다. 미쉐린 가이드가 고른 한국의 가볼만한 빵집 4곳은 모두 지역의 전통 빵집 - 대전, 수원, 안동, 제주의 각 1곳 씩.

부끄러웠다. 프랑스 기자들이 내 나라에 와 곳곳을 돌며 정말 맛난 우리 빵집들을 찾아 소개하다니. 하긴 빵이 인생이고 자존심인 프랑스이다. (포숑의 경우 40개국에 200여개 매장이 있다). 프랑스 기자들이 한국에 와 호텔·백화점에 있는 프랑스·이탈리아·미국 빵집을 뭐 하러 찾아 가겠나.

곳곳에서 정직하게 땀 흘리는 우리 동네 빵집들을 많이 사랑해 주시길. 특히 어려운 가운데도 수입 밀가루 가격의 2배가 넘는 우리 밀을 애써 구해 만드는 빵집들을 성원해 주시길 당부 드린다.

평화와 평등은 특별한 게 아니다. 먹는 것 고루 나눠먹는 게 평화이고, 일자리 고루 나누는 게 평등이다. 건강한 내 나라 빵을 모두가 값싸게 구할 수 있으면 그것이 최선이고, 마을마다 빵 만드는 사람이 행복하게 빵을 만들어 이웃에게 내놓을 수 있으면 그것 역시 평등세상을 위한 길이다. 거기에다 우리 밀이라면 더욱 좋은 일이다. 세상이 왜 거꾸로 가는 지 안타깝다.

프랑스빵의 국제 경쟁력은 재벌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다. 해마다 치열하게 벌어지는 제빵 경연대회와 마을 전통 빵집들의 치열한 경쟁에서 창의력이 발휘되고 기술이 개발되는 것이다.

삼성, 롯데, 현대가 빵 안 만들어도 먹고 살지 않느냐는 조선일보 지적에 공감한다. 스티브 잡스, 빌게이츠가 호빵 만들어 팔아 저리 컸겠나? 대기업들은 소유한 호텔 쯤에서 자제하고 베이커리 기업들은 영세한 대리점들을 배려해 달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빵. 옛날엔 누구나 아무 때고 빵을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중세에는 방앗간이 영주나 교회라는 권력에 의해 독점되고 서민은 밀가루 빻는 맷돌조차 가질 수 없던 시기도 있었다. 방앗간과 제분의 권리를 움켜쥐고 있으면 추수한 밀을 자연스레 장악할 수 있다. 마치 염전을 국가가 독점해 소금으로 백성을 통치하고 왕실의 금고를 채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지금이야 누구나 만들어 팔고 누구나 사 먹을 수 있는 좋은 시대이다. 왜 평화와 평등으로 나아가지 않고 퇴보하려는가.

1500년경 속담에는 ''''빵의 힘은 하나님의 힘이다''''라는 것도 있다. ''''빵만 있다면 웬만한 슬픔은 견딜 수 있다''''란 프랑스 속담도 있다. 빵을 인간의 삶속에 자리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여겼던 것이다.

당연히 빵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공동체에서 제재를 받기도 했다. 벌을 받아 땅 속으로 가라앉았다는 전설이 많다. 가난한 사람들이 빵을 구걸할 때 거절하면 빵이 돌로 변하는 전설도 많다.

빵과 빵 만드는 사람, 빵이 필요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그 인간과 시대의 도덕성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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