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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vs선동열 ''1987년 5월 16일의 퍼펙트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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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5월 16일. 부산 사직구장은 용광로였다.

최고의 투수 두 명이 뿜어내는 치열한 혈투 때문이었다. 그저 다른날과 다름없는 페넌트레이스의 한 경기였지만 이날 마운드에 오른 최동원(당시 롯데), 선동열(당시 해태)의 각오는 남달랐다. 이날 경기 전까지 2번 맞대결을 벌여 1승1패를 똑같이 나눠갖은 두 투수는 이날 승부를 가리고자 했다.

그러나 4시간 56분. 15회까지 간 연장승부. 결과는 2-2 무승부로 최동원도, 선동열도 웃지 못했다. 롯데의 선발투수 최동원은 209개의 공을, 해태의 선발 투수 선동열은 232개(역대 한경기 최다 투구수)의 공을 뿌리며 끝장을 보려했지만 경기는 무승부로 끝이 났다. 최동원은 이날 11피안타 8탈삼진을 기록했고 선동열은 10피안타 10탈삼진의 기록을 냈다.

먼저 실점을 한 것은 선동열. 선동열은 2회에 무사만루의 위기를 거치며 2점을 내줘 초반 위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 이후 선동열은 8회까지 6이닝 연속 삼자범퇴로 깔끔히 해태의 타선을 틀어막는 등, 물샐틈 없는 투구를 보였다.

최동원도 마찬가지. 최동원은 3회 2사 2루에서 서정환에 적시타를 내주며 1실점해 경기를 가져가는 듯했으나 9회 초 한대화에 중전안타, 김일환에 적시타를 허용하며 1점을 더 내줘 승부는 연장전으로 흘렀다.

최고의 투수가 맞대결을 벌이는 보기 힘든 이 경기는 두 선수 뿐만 아니라 팀원들에게도 의미가 컸다. 양팀은 가용자원을 모두 가동해봤지만 두 투수는 공 하나 하나에 온 힘을 쏟았고 결국 두 선수 모두 더 이상의 실점은 없었다.

현재로서는 상식을 뛰어 넘는 이 경기에 대해 당시 최동원 감독의 공을 받은 한문연 현 SK 와이번스 코치는 이렇게 회고한다. "둘이 아주 팽팽했다. 매스컴에서 하도 난리라 모두가 열심히 안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나는데, 이후 선동열은 선발 로테이션에서 빠진 것 같았다. 그런데 최동원 선배는 또 선발로 나갔다. 그 정도로 강철이었다"

이날 승부를 가리지 못해서였을까. 아직도 야구팬들 사이에는 "선동열이 더 세냐, 최동원이 더 세냐"는 말이 오간다. 그 답은 여전히 미지수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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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투수'' 선동열의 등장 이전에 ''무쇠팔'' 최동원이 있었다. 경남고 시절 17이닝 노히트노런을 달성하며 미국 메이저리그와 일본프로야구의 러브콜을 받던 최동원은 결국 1983년 프로에 데뷔,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강렬한 기억을 남겼다. 롯데의 유니폼을 입은 그는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1,3,5,6,7차전에 등판해 홀로 4승을 따내며 말 그대로 팀에 우승을 안겨줬다.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던 최동원의 자리는 후배 선동열의 등장으로 조금씩 잠식됐다. 1982년 27회 세계야구선수권은 최동원, 선동열 감독이 나란히 태극마크를 달고 뛴 대회. ''선배'' 최동원이 있었지만 일본과의 결승전에 선발로 나선것은 선동열이었고 그는 대회 우승을 이끌며 MVP에 선정됐다.

어쩌면 최동원 감독은 입술을 깨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동열 감독의 말은 다르다. 선동열 감독에게 있어 최동원 감독은 ''우상''이었다.

자신의 유일한 라이벌로 꼽힌 ''선배'' 최동원 감독의 죽음앞에 선동열 감독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선동열 감독은 "모두들 라이벌이라 했지만 나에게 최동원 선배는 존경했던 우상이었다. 선배의 야구를 보면서 투수를 꿈꿨다. 그는 나의 우상이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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