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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드의 반항아 최동원, 그는 분노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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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야구 100년사 불세출의 투수인 최동원이 마운드에서 영원히 내려갔다.

그의 이름 뒤에 붙는 마지막 직책은 전 한화이글스 2군 감독이다.

그러나, 그에게 한화라는 타이틀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영원한 롯데맨이기 때문이다.

그가 잠시 롯데를 떠나있은 적은 있지만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103승74패 26세이브, 평균자책점 2.46. 최동원이 프로야구 생활 8년 동안 남긴 기록이다.

다이나믹한 투구폼에서 쏟아지는 150km를 넘나드는 직구와 폭포수 같은 커브만으로 거인의 위용을 드러내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경남고 시절 라이벌인 군산상고를 상대로 탈삼진 20개를 빼앗고 경북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1984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는 나홀로 4승이라는 한국 프로야구 불멸의 기록을 세웠다.

7전4선승제로 열리는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올린 투수는 한국 프로야구 30년사에 최동원이 유일하다. 구원승 한 번을 제외한 3승이 선발 완투승이다. 앞으로 그런 투수는 없을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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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후진국으로만 알았던 한국의 젊은 투수가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기라성 같은 외국선수들을 잇따라 삼진으로 잇따라 돌려세운 1982년의 주인공도 최동원이다. 당연히 미국과 일본의 러브콜도 받았다.

메이저리그 토론토블루제이스와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61만 달러의 거액을 받고 계약까지 마쳤지만 군대 문제 때문에 태평양을 건너지 못했다.

이런 대기록을 세운 최동원이었지만, 그는 항상 외로웠다.

왜냐하면 한번도 고향팀의 러브콜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쇠팔로 불리며 고향팀을 위해 헌신했고 영광의 기록들이 대부분 롯데 유니폼을 입고 나온 것이지만 은퇴한 뒤 롯데 유니폼을 다시는 입을 수 없었다.

최동원은 당시 최고연봉을 받는 최고선수였지만 자기보다 못한 처지의 선후배 동료 선수들의 문제에 눈을 감지 않았다.

최동원이 활약하던 당시만 해도 프로야구 선수들의 처우는 스타급 선수들을 제외하고는 열악한 수준이었다.

노동조합은 아니더라도 프로야구선수에게도 권익을 보장할 수 있는 기구나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88년 프로야구선수회 결성을 주도했다. 그러나 끝내 실패했다. 결국 구단에 괘씸죄로 낙인찍혔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트레이드였다. 그는 트레이드에서도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대 충격적인 트레이드의 주인공이 됐다.

최동원은 그렇게 고향팀 구단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을 뿐 아니라 KBO로부터도 외면당했다. 삼성 유니폼을 입은 그는, 이후 그저그런 평범한 선수로 생활하다 1990년 시즌이 끝난 뒤 폭풍처럼 은퇴하고 만다.

그의 위대함에 비쳐볼 때 프로야구 선수생활 8년은 너무나 짧았다.

최동원의 자존심이 트레이드의 수모를 도저히 견디기 어렵게 했을 것이다.

최동원에게 삼성 유니폼은 어울리지 않았으며 롯데만이 자기 야구를 할 수 있는 보금자리였던 것이다.

야구장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최동원은 은퇴 1년 뒤 정치에 뛰어든다. 논리정연한 말솜씨와 좌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정치적 욕구로 연결된 것이다.

그러나, 최동원의 새로운 도전은 말 그대로 무모한 도전으로 끝났다.

최동원은 1991년 지방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당시 여당인 민자당 간판을 외면하고 민주당 간판을 선택했다.

고향에서 또 한번 벽에 부딪혔다. 여당 텃밭에서 보기좋게 떨어진 것이다.

당시 정치적 상황을 아는 한 정치인은 최동원에게 민자당 입당을 권유했지만 단번에 거절했다고 전했다.

이듬해에 부산 서구에 총선출마까지 권유했지만 자신은 ''''민자당과 정치적 이상이 다르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또 다른 여권 출신 정치인은 최동원에게 ''''왜 하필이면 민주당이냐?''''고 물었지만 최동원은 ''''고향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무엇이 최동원으로 하여금 당시 민주당을 택하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후, 방송해설가, 연예계에서도 잠시 활동하기도 했지만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사는 법. 그도 결국 야구계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최동원은 대장암과 투병하면서 자주 ''''내가 롯데 감독은 꼭 한번 해보고 싶다''''라고 되뇌었다고 한다.

그러나, 롯데는 한번도 최동원을 부르지 않았다. 보복과 배신의 기억만 있을 뿐이다.

최동원은 연고가 없는 한화이글스에서 2군 감독을 한게 전부다.

한국프로야구사의 최고의 투수에게 고향팀이 이런 대접을 하는 동안 최동원의 가슴에 응어리가 지지 않았을리 없다.

그동안, 그의 라이벌로 회자되는 선동열은 야구후배임에도 삼성 라이온즈 감독을 지냈다.

최동원과 선동열을 놓고 한국프로야구 최고투수 논쟁이 벌어진다.

이는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는 말싸움에 불과하다.

둘다 전설로 불리기에 충분한 한국프로야구 투수 쌍벽이기 때문이다.

다만, 두 사람의 인생이 그들의 투구 폼만큼이나 달랐다는 점은 분명하다.

유연한 투구폼을 가진 선동열은 야구 엘리트 코스를 거쳐 고향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최고 재벌기업의 구단에서 감독을 지냈다.

그러나, 최동원은 은퇴 이후 고향팀의 애정을 받아보지 못했다.

그의 역동적인 투구 폼만큼이나 파란만장하고 다이나믹한 인생을 살고 간 것이다.

이제는, 한국프로야구사의 전설이 되버린 최동원의 별세 소식에 롯데자이언츠에서 명예감독직을 주겠다는 얘기가 나온다.

고향팀에 대한 애정과 함께 분노를 삭히며 살다간 최동원.

파란만장한 53년 인생 앞에 명예감독직은 지금은 모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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