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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파소에서 샌디에이고까지… 국경기행 2600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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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로 미국 누비기 26] 리오그란데강은 지척에 있고 그 너머 멕시코 후아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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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 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 없이 건넜을까?/...(중략)... 파! 하고 붓는 어유 등잔만 바라본다/ 북국의 겨울밤은 차차 깊어가는데/...(중략)... 아아, 밤이 점점 어두워 간다/ 국경의 밤이 저 혼자 시름없이 어두워간다." (국경의 밤 - 김동환/ 1925)

여진족 ''순이''는 소금을 밀수하는 남편이 행여 다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하는데, 갑자기 나타난 옛 애인이 평온한 마음을 속절없이 흔들어 놓고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남편은 악몽이 돼 그녀를 가위 누른다.

어린시절 이따금씩 악몽을 꾸고는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떨어지는 한 줄기 흐름이 부드러운 파문을 그려낸다. 하지만 일순간 어지러운 낙서 처럼 혼돈스러워져 파문이 형태를 잃으면 난 꿈속에서 깨어나지도 무서워하지도 못할 정도로 두려움에 떨었다. 오늘까지 뇌리 속에 새겨진 그 기억은 나의 생각과 가치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질서 속에서 안정감을 찾고 무질서한 상황을 정리하고 벗어나고 싶은 속성을 갖고 있다. 개인도 가족도 국가도 인류의 역사도 질서와 무질서의 연속이다.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중국 대륙에 수 많은 왕조가 명멸한 것도 따지고 보면 끝없이 질서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고대부터 이어져 온 정복전쟁 역시 질서와 질서의 충돌이었다.

''국경의 밤''이 민족의 심금을 울린 이유는 한 여인의 비애와 갈등을 통해 무질서 속에 빠진 민족의 현실을 반영했고 그 반작용으로 질서를 찾고자 하는 집단욕구가 발동됐기 때문일 것이다.

텍사스주의 국경도시 엘파소에서 투산과 유마를 거쳐 샌디에이고까지 장장 2천 6백리 국경기행에 오르며 ''국경의 밤''을 떠올렸다. 사실 나는 지금껏 국경이란 환경을 한 번도 체험해 보지 못했다. 10여년 기자생활을 하는 동안 비행기를 타고 혹은 자동차로 국경을 넘나든 경험은 있지만 국경지방 근처에 머물며 그곳의 분위기에 빠져 본 적은 없다.

소외된 변방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국경과는 달랐다. 미국 남부 국경기행은 심리적으로 푸근함과 평온함을 가져다 준 여행이었다. 일체의 굴레를 벗어버린 채 발길 닫는대로 갔던 여유가 있었고 척박하지만 이국적 아름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멕시코와 미국 국경 사이의 평온함은 9.11에 놀란 미국 행정부의 봉쇄정책도 한 몫 했을 것 같다. 2001년 9월 11일 뉴욕 중심을 강타한 테러가 발생한 지 8년이 지났지만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지대는 경비가 삼엄하기 이를데 없었다.

나이아가라 폭포로 가기 위해 캐나다 최남단 도시 윈저를 통해 국경을 넘을 때 입국수속에 단 3분 걸린 것과 달리 멕시코 접경지대에서는 주요 길목마다 초소를 만들어 놓고 차량들을 철저히 검문했다. 멕시코 국경을 통한 밀입국 시도가 잦을 뿐아니라 국제테러조직의 잠입루트가 된다고 판단해 9.11이 발생한 지 10년 세월이 흘렀건만 여전히 단속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과달루페에서 국경도시 엘파소에 닿았을 무렵 사방에는 칠흑같은 어둠이 깔렸다. 어둠 속으로 하나 둘씩 불빛이 켜지고 빛이 어둠을 잠식해 갈 때 서울보다 넓은 방대한 엘파소의 야경이 조금씩 시야 속으로 들어온다.

이 곳의 야경은 은하수가 지상으로 내려온 듯 칠흙 같이 어두운 땅위로 별들이 촘촘히 박힌 것 같고 평야에 별들을 흩뿌려 놓은 것 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위압적이지 않은 편안함이 있었다. 그래서 일까? 차를 몰아 엘파소 시내로 접어드는 순간 이 도시 어딘가에 누군가 나를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고 가슴엔 설레임으로 잔잔한 전율이 느껴졌다. 낯 설고 물 선 이국땅을 여행하다 고향이 그립고 따뜻한 정이 그리워진 탓도 있겠다. 또 이제 스쳐 지나가면 다시는 오지 못할 것 같은 조금은 슬픈 감정도 작용한 것 같다. 새로운 곳으로 찾아 들면 감정은 참 묘하게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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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을 붉게 물들인 노을이 옅어지고 어둠이 대지 위로 깔리는 국경의 밤! 국경도시 엘파소, 수 십 만개 불빛들이 무심히 빛나는 국경의 밤! 머나먼 이역 만리서 맞는 국경의 밤! 점 처럼 퍼진 불빛 하나 둘 셋, 야경꾼 처럼 도시를 훑어간다. 나트륨등 노란 불빛이 뿜어낸 온기, 좋은 사람 그리운 마음 가만히 문 열고 불쑥 뛰어들고 싶지만 머~나먼 타국. 리오그란데강은 지척에 있고 그 너머 멕시코 후아레즈, 아리조나 가는 길은 더욱 먼데 국경의 밤은 깊어만 간다◇

엘파소 시내를 동에서 서북쪽으로 가로질러 프랭클린산에 오르면 야경은 절정에 이른다. 프랭클린 산은 서울의 남산 처럼 시내 한 복판에 서 있어 사방으로 시야가 탁 트인 야경 관람의 포인트다.

반겨줄 이 없는 절해고도 엘파소에서 찾아갈 곳이라고는 식당 밖에 없었다. 시내의 멕도날드에 들러 피로도 풀고 저녁도 간단히 해결했다. 그런데 엘파소는 여느 도시와는 달랐다. 스페인어를 쓰는 사람이 태반이었고 보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히스패닉(Hispanic)이었다. 백인은 거의 찾아 보기 힘들고 대부분이 멕시코 등 중남미 지역 출신자들 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엘파소 인구에서 히스패닉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76.6%, 백인은 오히려 소수자였다(18.3%)

엘파소는 리오그란데강이 지척으로 흐르는 그야말로 멕시코와의 국경 선상에 위치한 국경도시이다. 멕시코 치세 때부터 히스패닉이 숫적으로 우세했고 이후에도 국경이란 지리적 특성 때문에 히스패닉들이 꾸준히 유입됐다고 한다. 멕시코의 국경도시 큐다드 후아레즈(Ciudad Juarez), 그리고 뉴멕시코주의 라스 크루세스(Las Cruces)와는 하나의 메트로폴리스를 이루고 있다.

국경기행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 낭만 같은 사치스러운 감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 경계를 넘을 때마다 국경수비대가 이방인들을 괴롭혔다. 4번의 검문검색을 거친 뒤에 샌디에이고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첫 번째 검문을 받은 곳은 엘파소 외곽 검문소. 대부분 차량들은 한 두가지 질문을 받은 뒤 곧바로 출발했지만 나는 자동차를 도로가로 빼야 했다. "Are you a citizen?"이라는 무장 군인들의 질문에 ''''No, I am not"이라고 답했기 때문이다.

가만 있기가 뭣해서 어디서 왜 왔는 지 주절주절 설명했지만 그다지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내국인이 아닌 걸 안 이상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여권이었다. 트렁크 속 여행가방 속에 든 여권을 꺼내는데 트렁크 거득 실린 짐꾸러미들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이것 저것 뒤집어 보곤했다. 트렁크에는 큰 옷 가방과 짐가방이 몇 개 들어 있었고 여행중 라운딩을 할 목적으로 실어둔 골프채, 롤러블레이드 등 온갖 잡동사니들이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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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과 입국허가서를 확인하고 일단 신원이 확실해지자 군인들의 표정도 상당히 누그러졌다. 또, 미주리 주립대에서 미국 저널리즘을 연구하는 한국 기자란 말에 그들의 의심은 완전히 풀린 것 같았다. 워낙 이것 저것 꼬치꼬치 캐묻는 통에 대략 20분이 걸린 것 같았다.

주 경계를 넘을 때마다 어김없이 검문소가 나타났다. 미국 국내여행이었지만 여권과 입국허가서(DS서류)를 챙긴 덕분에 경찰서로 연행되거나 난감한 일을 당하지 않고 무사히 국경지대를 벗어날 수 있었다는 생각에 여행을 마친 뒤에도 다시 한 번 안도했다. 만약 운전면허증만 믿고 나머지 서류를 챙기지 않았더라면 이리 저리 물려 다니는 몹시 피곤한 상황이 벌어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타국과의 접경이 없는 한국인에겐 국경지대를 지나친다는 것이 생소한 체험일지도 모른다. 북한과의 국경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38선은 국경이라기보다는 냉전의 마지막 잔해이자 체제의 벽으로 버티고 서 있어 일반적인 국경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미국 남부로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이 더 설레였던 것 같다.

둘째날(11월 23일), 늘도 갈 길이 멀다. 투산에서 소노란 사막을 보고 캘리포니아 국경도시 유마를 거쳐 임페리얼듄 이란 거대한 래언덕을 관광한 뒤 샌디에이고로 들어갈 작정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 아래 펼쳐진 투산 시내는 아름다웠다. 위도가 샌디에이고보다 낮아 늦 가을에도 날씨는 약간 더웠고 야자수 가로수가 시원스럽게 하늘로 뻗어 올라간 거리들은 활기가 넘쳤다. 무엇보다 도시 주변은 황량한 사막인데 야자수며 잔디밭이 잘 가꿔진 투산시내는 황색 바탕에 뿌려진 녹색의 점 같았다.

투산 시가지를 중심으로 동 서쪽에 각각 하나씩 있는 새구아로 국립공원은 투산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포인트이다. 새구아로 국립공원 사이로 난 시닉 드라이브를 따라 사막을 달려보는 것은 독특한 체험이다. 투산에서 매라나(Marana)시를 거쳐 20여 마일 지점에 있는 피카초(Picacho) 주립공원과 레드락(Red Rock)이 눈길을 끈다. 피카쵸 픽으로 가는 길에는 집과 학교, 공원, 운동시설 등 편의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진 전원도시가 조성되고 있었다. 멀리 피카쵸 픽과 산타로사(Santa rosa)산맥을 배경으로 사막 위에 서 있는 마을은 한 폭의 풍경화 처럼 아름답다. 여유가 있는 풍경, 따갑지만 습하지 않은 햇볕, 색다른 경치에 이끌려 한 동안 발길을 뗄 수 없었다.

투산시 주변의 소노란 대저트는 산맥에 막히고 가려 조금은 답답한 느낌이었다면 마리코파 산맥과 샌드탱크 산맥 사이에 끝도 없이 펼쳐진 고 곳은 너무나 아득해 망망대해 같은 곳이다. 사막 사이로 US-8과 238 두 개 도로가 관통하는데 238번 도로 양쪽으로는 눈에 보이는 것, 발에 걸리는 것은 모두 선인장이다. 워낙 넓고 광대해 카메라 앵글에 담기엔 역부족인 곳, 지금도 아쉬움을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은 곧 공원관리사무소가 나올 것 같은 생각에 차를 계속 몰아가다 결국 공원 속으로 한 발짝도 들여놓지 못했다는 점이다. 관리사무소 같은 곳은 아예 었다. 그냥 사막이 있을 뿐이었다. 주마간산 격으로 스쳐 지나다 보니 멋진 장면을 한 컷도 사진에 담지 못한 것도 못내 아쉽다.

소노란을 지나 질라(Gila)와 콜로라도 강이 합류하는 곳, 아리조나와 캘리포니아주의 경계지점에 유마란 도시가 있다. 엘 파소와 마찬가지로 멕시코 바하 캘리포니아(Baja California)주와 접경지역이다. 여기서 샌디에이고 방향으로 수 킬로미터 달리면 ''''임페리얼 센 듄''''이 나온다. 거대한 모래 언덕이다.

콜로라도주에 있는 그레이트 센 듄과 비슷하다. 풍광이 콜로라도의 그레이트 센 듄에 못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고 사구의 길이도 40마일이나 된다. 앨거던즈 듄(The Algodones Dunes, 면화) 또는 Glamis Dunes으로도 불리는데, Glamis와 Gordon''s Well, Buttercup, Midway, Patton''s Valley 등 여러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임페리얼 듄은 호수였던 케이휠라(Lake Cahuilla)에서 바람에 실려 날아온 모래가 언덕을 만들었다.

석양 무렵인데다 갈 길이 멀어 도롯가에 차를 세워두고 바로 사구 등반에 나섰다. 도롯가의 사구는 그렇게 높지가 않아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지만 부드러운 모래를 밟는 감촉이 좋았고 노을 빛으로 붉게 채색된 사구의 황홀경은 이틀에 걸친 국경여행의 피로를 씻어냈다. 늦은 밤 샌디에이고 시내에 도착했을 때 이틀에 걸친 국경기행은 힘겹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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