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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숨결따라]"명량해전 쇠사슬 설치는 설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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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④-2]''쇠사슬 설화는 기적같은 승리의 의문을 풀기 위해 나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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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충무공 이순신 탄신 466주년 되는 해이다. CBS는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이충무공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기획특집:충무공의 숨결따라]를 마련했다. 여수좌수영과 한산도,거제 칠천량과 진도 울돌목, 남해 관음포 등 주요 전적지를 돌며 오늘 이충무공은 우리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그리고 어떻게 기억되야 하는가를 살펴보고자 했다.[편집자 주]


1.여수 - 이충무공의 효심이 살아숨쉬는 곳
2.한산도- 학익진의 승리,조선수군들의 노고
3.칠천량- 패배의 쓰라린 기억, 역사의 교훈삼아
4-1.진도- 왜덕산, 적장후손들이 찾는 평화의 무덤
4-2. 진도- 명량해전에서 쇠사슬 사용은 사실인가?

5.남해 -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울돌목에서 쇠사슬 설치는 사실인가 설화인가? 바다 물결이 소용돌이 치며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울돌목. 거센 물살 때문에 배들이 밀물과 썰물 때에 맞춰 이동해야 통과가 가능할 정도이다. 전남 해남 우수영과 진도 사이의 좁은 해협 울돌목은 명량대첩으로 유명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로 일본전선 133척에 맞서싸워, 31척을 깨뜨리고 적을 물리친 곳이다.10배가 넘는 적선을 어떻게 이길 수 있었는가에 대해 일반적으로 쇠사슬(철쇄, 鐵鎖)의 사용을 많이 떠올린다.양쪽에 쇠사슬을 걸어서 적선이 밀려올 때 이를 들어올려 곤두박칠치게 하여 침몰시켰다는 것이다.지금의 중장년층은 학창시절 책을 통해 그렇게 접해왔고,은 철쇄를 사용한 명량해전을 재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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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돌목에서 쇠사슬 설치는 구한말의 회정 김기정(1876-1968)이 쓴 <이순신 세가="">(1910년)에서도 등장한다. ''쇠사슬을 몰래 걸어 이 통제사가 오십척을 전복시키고...''라는 소제목을 단 이 책의 제 46회 내용을 보자. "이 때에 명량해협의 양편에 매복되어 있던 군사는 순신의 암호를 받고 물 속에 걸어놓은 쇠사슬을 탱탱하게 감아올렸다.쫓겨 달아나는 적선은 급한 조수에 떠밀렸다가 물 속에 검은 쇠사슬이 걸리어 나막신 엎어지듯 낱낱이 전복된다. 앞의 배가 엎어짐을 보고 뒤에 배는 물러나려 하나 해협은 좁고 조수는 급하여 어찌할 수도 없이 되어 삼백 여척의 남은 병선이 조수가 그치기 전에 명량의 안팎 두 목에 두 장의 쇠사슬에 전부 침몰되고 말았다."

철쇄 사용는 명량해전 참여했다 전사한 수군의 묘비에서도 발견된다. 전남 진도군 ''정유재란 순절묘역''에 1948년에 세워진 조응량의 비문에는 그가 명량해전에서 이충무공과 함께 철쇄(鐵鎖)작전으로 대승하는 공을 세웠으나 적을 소탕중 배가 전복되어 전사했다고 기록되었다. 400년 세월이 흘러 새긴 묘비이지만,이 비문은 철쇄 사용이 민간대중들 사이에서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울돌목에서 쇠사슬 설치에 대해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과 학계의 연구가 나와 대중적 통념을 뒤집고 있다. 1997년 이종학 (당시 독도박물관장)씨는 쇠사슬 설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지난 1904년 일본해군의 소이번 오가사와라 중좌가 쓴 ''일본제국 해군권력사 강의''라는 책에는 이순신장군이 명량해전에서 쇠사슬을 늘어뜨려 일본배를 침몰시켰다고 전하는 등 일본학자들 상당수가 쇠사슬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나 난중일기나 명량대첩 장계에는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없다"면서 "이에 대한 철저한 연구도 시급하다"고 강조했다.(연합뉴스와 인터뷰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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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웅(현 해군사관학교 전사전략학과 교수)씨는 <임진왜란 해전사="" 연구="">(2002년 박사학위논문)에서 ''울돌목에서 쇠사슬 설치는 사실로 보기 어렵고 설화로 볼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이씨는 만약 쇠사슬 설치, 즉 철쇄 가설이 승리의 원인이라면 당시 사료나 공식기록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관련기록이 전무하다는 점을 들고 있다.난중일기에도 울돌목 철쇄 설치에 대한언급은 전혀 없다. 18세기 사료인 이중환의 <택리지>에 임란 때 해남에서 철쇄 설치가 언급되지만,임란 해전에 관한 기록이 극히 간략할 뿐 아니라 부정확하고, 그가 여러 지방을 돌아보며 현지에서들은 설화를 채록했을 가능성이 높아 신빙성이 부족하다는것이다. 한편, 철쇄 가설을 긍정하는 근거로 제시하는 다른 기록으로 전라우수가 김억추가 뛰어난 용력으로 철쇄를 가설하고 이를 통해 많은 일본 군선을 격침시켰다는 <호남절의록>과, 김억추의 후손들이 20세기 초에 펴낸 <현무공 실기="">가 있다. 그러나 이들 자료 역시 후대에 꾸며진 설화를 채택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고,후자는 최근에 만들어진 전기로써, 철쇄 가설을 증명할만한 사료는 아니라고 판단된다는 것이다.

쇠사슬 설치 주장은 10배가 넘는 적선을 어떻게 이길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한 장치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명량대첩을 이룰 수 있는 객관적인 승리 요인은 어떤 것일까? 평균 수로 폭이 250미터에 불과한 협수로의 지형적 여건과 조류의 흐름을 최대한 활용했다. 임원빈(해군사관학교 명예교수)씨는 <이순신 병법을="" 논하다="">에서 이순신의 작전구상을 이렇게 정리했다."먼저 조선수군함선들로 하여금 협수로 바깥쪽에서 입구를 차단하여 횡렬로 벌려 서서 13척 모두가 화력을 운용할 수 있도록 포진시킨다. 또 왜함선은 명량의 좁은 물목을 이용하여 선두의 5-10여척만 전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상황을 조성한다."" 왜 수군은300여 척의 함선 가운데, 협수로에서 기동이 원활하지 않은 대선인 아다케를 제외시키고, 판옥선보다 작은 세키부네 130여 척을 명량해전에 투입하였다. 명량해전은 한산해전때와는 정반대의 전술을 펼쳤다.한산해전은 수로가 좁은 견내량에서 넓은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적을 격파했다면, 명량해전은 적을 협수로로 끌어들여 그 입구를 막아서서 전투를 벌인 것이다. 조선수군의 전투역량이 한산때는 우세했고,명량때는 절대적 열세인 점을 감안한 것이다. 임교수는 명량해전 승리요인을 크게 세가지로 요약했다.첫째, 명량의 지형적 조건을 이용해 절대열세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순신의 전략전술이요,둘째,각종 총통으로 무장한 강력한 판옥선의 전투력이요,셋째는 모든 조선 수군병사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수 있는 이순신의 지휘통솔 역량을 꼽았다.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서 "이번 싸움은 참으로 천행이었다."고 적고 있듯이,명량해전은 기적같은 승리였기에 쇠사슬 이야기가 그 의문을 푸는 열쇠로 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명량해전의 흔적을 찾아서- 벽파진전첩비,독굴산과 백토마을, 그리고 진도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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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15일.아침에 흐리다가 낮에 맑게 개임.오후 2시쯤 울돌목이 흐르는 진도대교에서 동쪽으로 5km 떨어진 벽파진 언덕에 이르자 벽파진 전첩비가 위용을 드러냈다. 언덕 위에 솟은 자연 그대로의 바위산 꼭대기를 거북모양으로 깎아 좌대를 삼았으며, 화강석으로 비를 세워 높이가 11.8미터에 이른다.1956년 진도군민의 성금으로 세웠으며, 명량대첩 그날의 전적을 이은상의 글과 손재형의 글씨로 새겼다." 삼백척 적의 배들 산같이 깔렸더니 울돌목 센 물결에 거품같이 다 꺼지고 북소리 울리는 속에 저 님 우뚝 서 계시다. 거룩한 님의 은공 어디다 비기오리. 피흘린 의사혼백 어느 적에 사라지리.이 바다 지나는 이들 이마 숙이옵소서." 나를 안내한 관광해설사 허상무씨는 이곳에서 진혼곡을 구성진 육성으로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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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파진은 이순신이 1597년 8월 30일 진영을 어란포에서 이곳으로 옮긴 이후 명량해전 직전까지 16일동안 머물면서 작전을 구상했던 곳이다.달밤에 바다가 바라보이는 풍경이 좋아 유배당한 선비들이 시를 읊었다는 벽파정은 일제 때 주재소로 사용해 지금은 축대 흔적만 남아 있었다. 벽파정 자리에 서서 보니 출렁이는 물소리와 간간이 지나는 배에서 뱃고동 소리만 들려왔다. 서쪽으로부터 뻗어오는 울돌목의 좁은 수로는 벽파진에 이르면서 펑퍼짐하게 넓어졌고, 정면 바로 앞에는 감포도가 옅은 운무에 싸여있고 그 뒤로 해남 어란포 마을이보였다.

명량해전 직전까지 이순신이 확보한 세력은 전선 13척과 초탐선 32척이 전부였다. 우리 함대가 벽파진에 머물고 있던 9월 14일, 임준영이 일본 함대 200여 척 중에 55척이 어란포에 도착한 사실을 알려왔다. 또,일본군에 붙잡혔다가 도망쳐온 김중걸은 "일본 수군이 우리 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접근중"이라느 소식을 전해왔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이순신은 9월 15일 진영을 벽파진에서 전라우수영으로 옮겼다. 적은 수의 전선으로 명량 협수로를 등지고 싸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라는 훈시를 통해 장병들의 각오를 다지게 한다.9월 16일 이른 아침에 별망군이 셀 수 없이 많은 일본 군선이 명량해협을 통과해 우리 진영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보고가 전해지면서 명량해전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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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파진을 떠나 울돌목까지 가는 5km에 이르는 해안도로는''명량대첩로''라는 명칭이 붙여졌다.오후 5시40분쯤 바라본 그곳 바다는 썰물때였는지 갯벌이 속살을 드러냈고, 바로 건너편 해안 산기슭이 지척에 있어 기다란 협수로임을 실감케 했다.진도대교 가까운 쪽에 이르자 피섬이라 불리는 조그만 섬이 보였다. 바위가 왜구들의 피로 물둘어 붉게 물들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진도대교 아래를 흐르는 울돌목에 이르자 과연 물의 소용돌이가 보였고, 그 세차게 흐르는 소리가 솨솨 귓전에 울렸다. 그곳에는 4천가구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조력발전소가 가동되고 있다. 2007년 4월 이 발전소에 설치할 7백톤짜리 발전용 터빈을 싣고가던 바지선이 평소 유속의 두배인 시속 14km의 밀물 조류에 휩쓸려 진도대교에 부딪히는 사건도 있었다.

진도대교 아래에는 이순신 장군이 손을 들어 지휘를 하는 모습의 커다란 동상이 서 있다. 높이 30미터로,좌대 15미터, 동상 15미터 규모이다. 또, 해상상설무대가 설치되어 매월 2,4째주 일요일 오후 4시에 남도소리여행 공연이 펼쳐진다. 상설무대 나무벽면에는 이순신의 생애를 담은 그림과 글귀가 10편으로 구성되어 배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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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대교 위에 솟은 산에 올라가면 ''강강술래터''와 전망대가 있다. 그곳에서 서쪽으로는 신안,목포가 보이고, 동쪽으로는 벽파진이 보인다.맞은편으로 해남 우수영과 그 앞의 장도가 보인다. 강강술래터에서 뒷쪽으로 보이는 독굴산과 왼편으로 보이는 백토마을은 왜란과 관련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독굴산은 이엉을 엮어 노적봉처럼 보이게 했다는 설화가 있으며, 백토마을은 우리쪽에서 하얀 진흙을 풀어서 바다로 흘려보내자 일본군들이 쌀뜨물로 여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진도읍 읍성 뒤편에 진도향교가 자리잡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진도향교에 왜병이 쳐들어왔을때 유림 김희남이 피난하면서 명륜당 기둥에 "천하에 어찌 공자의 도가 없겠는가 (天下豈無夫子道)"라는 글귀를 남기고 떠나자 그 뒤 왜병들이 향교에 침입하여 불태우려다 이 글귀를 보고 경탄하여 그 글귀 옆에 "이 곳에도 충렬의 선비가 있구나(此地亦有忠烈士)"라는 글로 화답하고 후퇴했다는 옛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대성전 옆 뜰에는 330년 된 동백나무 고목이 그 유서깊은 역사를 드러냈으며, 연초록 풀밭 위에 붉은 동백꽃 한송이만 모가지째 떨어져 빛나고 있었다. 그 선연한 동백꽃의 자태는 진도 정유재란 순절묘역에 잠들어 있는 진도 민초들의 영혼인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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