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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의 숨결따라]일본적장 후손들, 진도를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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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④ -1]한일 평화의 상징, 진도 왜덕산
"시체가 떠오면 갯가사람들이 건져다가 여그다가 묻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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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충무공 이순신 탄신 466주년 되는 해이다. CBS는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이충무공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기획특집:충무공의 숨결따라]를 마련했다. 여수좌수영과 한산도,거제 칠천량과 진도 울돌목, 남해 관음포 등 주요 전적지를 돌며 오늘 이충무공은 우리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그리고 어떻게 기억되야 하는가를 살펴보고자 했다.[편집자 주]


1.여수 - 이충무공의 효심이 살아숨쉬는 곳
2.한산도- 학익진의 승리,조선수군들의 노고
3.칠천량- 패배의 쓰라린 기억, 역사의 교훈삼아
4-1.진도- 왜덕산, 적장후손들이 찾는 평화의 무덤
4-2. 진도- 명량해전에서 쇠사슬 사용은 사실인가?
5.남해 -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진도 왜덕산 , 적장 후손들이 찾는 곳

전남 진도의 왜덕산이 한일 평화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있다.진도군 고군면 내동리의 왜덕산(倭德山)은 정유재란 때 명량해전에서 조선수군에 의해 몰살당한 수많은 일본군의 시신이 묻힌 곳이다. 마을사람들이 일본군들의 주검을 수습해 묻어줌으로써 왜군에게 덕을 쌓았다는 의미로 이곳은 왜덕산이라 불리워졌다.400년 세월이 흘러 일본군의 후손들이 조상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왜덕산을 찾아 참배하는 발길이 2006년 이래 몇해 째 계속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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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9월 16일 진도 울돌목에서 벌어진 명량해전에서 일본인 적장 마다시(馬多時,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조선수군에 의해 죽는다. 난중일기에도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항복한 왜인 준사는 안골의 적진에서 투항해온 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적의 배를 굽어보더니, ''저기 그림무늬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자가 자로 안골의 적장 마다시(馬多時,구루시마)다''라 한다.내가 물 긷는 군� 김돌손을 시켜서 갈고리로 낚아서 배에 올리니, 준사는 기뻐서 날뛰면서,''이게 마다시''다 한다. 나는 즉시 명령하여 그놈을 토막지어 베어 죽이게 하니 적들의 의기가 크게 꺾였다."

일본 수군의 무장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연구한 적이 있던 일본 학자가 2006년 5월 우연히 진도를 방문하여 왜덕산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왜 400년 동안이나 아무도 모르게 일본인 공동묘지가 존재하고 있는지 참으로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 일본인 학자는 히구마 다케요시(히로시마 수도대학 교수)였다.2006년 5월 히구마 교수는 향토사학자 박주언씨의 안내로 내동마을을 방문했다. 30세대가 살고 있는 내동리 마을사람들에게 왜덕산에 관해 물었더니 와덕밭(瓦德田)이라 부르고 있어, 내동리 사람들도 일본인의 묘지를 연상시키는 왜덕산이라는 명칭이 귀에 익지 않은 듯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작년에 82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이 마을 주민 이기수씨의 생전 증언에 따르면, 옛날에 왜덕산 일대에는 해묵은 묘가 1백여 기 있었는데 절반쯤을 개간해서 밭이 되어버려 묘가 절반쯤은 없어진 셈이란다. 또 일제 때 마산저수지를 막아 저수지 농사용 물을 내동리 앞으로 끌어오려고 현 도로 옆 수로를 그 때 팠는데 그 때도 사람뼈가 나왔다는 것이다. 이기수씨는 "전사한 일본군들이 썰물 들물을 타고 오르락 내리락 하다보면 이 안통 바다로 들어오게 되아있어.그런 시체가 떠오면, 내동, 마산, 오산, 지수, 하율, 황조 요 갯갓사람들은 그것들을 건져서 여그다가 묻어주었어.왜 여그다 묻었냐 하면, 남향으로 양지바른 곳이고, 물가니까 물 건너 일본 고향생각을 쉽게 하라고 그란 것이여!"라고 증언했다. (향토사학자 박주언씨와 인터뷰)

진도 명량해협에서 이순신에게 목숨을 잃은 구루시마의 고향, 일본의 에히메현 이마바라시에는 구루시마를 현창하는 300명의 회원이 있다. 히구마 교수는 왜덕산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이마바리시 지역신문에 투고도 하고 구루시마현창회에 출석해 소개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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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루시마 미치후사는 풍신수길 시대에 일본 규슈 북부의 세토내해(內海)를 거점으로 한 해적,무라카미 수군의 세 집안 중 하나인 구루시마 무라카미의 삼남이다.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형인 미치유키와 같이 1592년 3월에 부산으로 출전했고, 그해 6월 율포해전에서 형은 전사한다.37세의 구루시마 미치후사와 함께 명량해협에서 싸운 무장 6명(29-39세)은 모두 고향이 현재 에이메현으로, 구루시마 외에는 모두 살아서 돌아갔다.이들은 각기 수만석을 하사받아 70세 전후까지 장수했다.

히구마 교수에게 오늘 왜덕산의 의미는 무엇인가? "400년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왜덕산에 지금도 젊음 그대로 잠들고 있는 병사들이 저에게 말하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미래를 살아가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그것은 두번 다시 과오를 되풀이하지 말라는 말일것입니다. 특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일본인은 그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으면 안됩니다.되풀이하지 않을테니까 편안히 잠들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이런 심정을 이 마음을 표현하는 장치, 시스템을,아름답고, 진심을 담아 진도의 왜덕산에 디자인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소중한 우리 후손들의 미래를 위하여." (히구마 교수가 2006년 11월 2일 진도 아리랑축제 중 진도학회 국제학술회의 때 발표한 원고 「400년의 세월을 넘어서 진도 왜덕산이 말하는 것」中에서)

2006년 8월 15일 구루시마수군의 후손인 현창회(來島保存顯彰會) 회원 4명을 비롯해 히구마교수, 일본수도대학 학생 19명 등 모두 25명이 왜덕산을 참배했다. 2007년에는 일본수군 공동묘지 옆에 사는 이기수씨 부부가 구루시마현창회의 초청으로 구루시루 여행을 다녀왔고, 구루시마 현창회에서 내동마을에 70만원을 전달했다. 이후 구루시마 현창회 회원들과 주민들이 매년 10월 명량대첩 축제때 진도를 찾고 있다.

정유재란 순절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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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덕산에서 5km 떨어진 곳에 있다.진도군 고군면 오일시와 도론리 사이의 송우산에 조성된''정유재란 순절묘역''이 보인다. 송우산에는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조선군인과 두 달 전 남원전투에서 전사한 진도출신 군인이나 의병들이 묻혀있다.250여 기에 이른다.시신이 수습된 전사자는 안장되었지만, 시신이 바다로 흘러갔거나 행방불명이 된 참전자는 초혼장(招魂葬)을 치른 봉분들이다. 묘지중에는 정유년 8월의 남원전투에서 전사한 임란공신, 김해인 김성진의 묘지가 있고, 명량해전에서 공을 세웠으나 적을 소탕하던 중 배가 전복되어 전사한 조응량 조명신 부자의 묘비석이 나란히 서있다.행적을 알 수 없는 군인신분의 오래된 비석들도 있다. 향토사학자 박주언씨는 "명량대첩이 남긴 송우산과 왜덕산 두 개의 공동묘지는 매우 중요한 진도의 향토사료임이 분명하다. 두 곳 모두 세계전사에 없는 희귀한 성격이어서, 그만큼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공동묘지라 할 수 있겠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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