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의 창업주인 김범석 의장. 연합뉴스미국 정계 인사들이 느닷없이 외국 기업에 대한 차별적 규제를 언급하며 쿠팡을 비호하고 나섰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로버트 오브라이언은 23일(현지시간) 쿠팡의 고객정보 유출 책임을 언급하지 않은 채 "한국 국회가 공격적으로 쿠팡을 겨냥하는 것은 공정거래위원회의 추가적인 차별적 조치와 미국 기업들에 대한 더 넓은 규제장벽 무대를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가까운 공화당 중진 하원의원도 보수 매체 기고문에서 "한국 정부가 미국 기업을 상대로 공격적인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이 중국, 쿠바, 북한 등과 같은 정책을 가진 불량국가 대열에 가담했다"는 억지 주장을 펼치면서 쿠팡을 피해기업으로 거론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미국 정계 인사들의 '차별' 주장은 얼토당토않다. 오히려 3370만개의 계정이 유출되고 5개월간 탐지가 지연된 쿠팡급 사고가 미국에서 터진다면 연방거래위원회(FTC) 제재와 대규모 집단소송에 직면할 것이다. 유럽연합에서 발생했다면 전세계 매출 기준 4%에 가까운 과징금과 함께 강력한 시정조치를 각오해야 한다.
지난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 열린 쿠팡 침해사고 관련 청문회에서 해롤드 로저스 쿠팡 대표이사가 의원 질의에 답변을 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오는 30~31일 국회에서 열리는 청문회에 쿠팡의 창업주인 김범석 의장은 불출석한단다. 전 국민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고객 정보가 무단으로 털렸는데도 쿠팡은 미국 뒤에 숨고 있다. 매출의 90% 이상이 한국에서 발생한다는 건 천하가 아는 사실이다. 돈은 한국에서 벌고 사고가 터지면 미국의 뒷배에 기대는 쿠팡의 행태에 소비자들이 심한 배신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쿠팡이 25일 공개한 자체 조사결과도 석연치 않다. 쿠팡은 "3300만개 계정 중 고객 정보를 유출한 전직 직원이 3천개 계정을 저장해뒀고 이 중 외부로 유출된 정보는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유출자가 갖고 있던 정보는 "탈취 사실이 알려지자 모두 삭제했다"고 주장했다. 물리적으로 파손한 뒤 하천에 버린 노트북은 회수했다고도 했다.
장비와 개인정보를 모두 회수했고 제3자에게 전송된 고객 정보도 없으니 안심하라는 것인데, 발표 시점과 방식, 내용 모두 허점투성이다. 발표는 질의응답도 없이 일방적이었으며, 민관합동조사단의 조사가 끝나기도 전에 조사 대상이기도 한 쿠팡이 기습적으로 결과를 내놓는 것 자체도 상식에 어긋난다. 수사기관이 아닌데도 전직 직원으로부터 범행 일체를 자백받았다고 표현했고, 범행 후 5달이 지나도록 정보 유출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서도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외부 유출이 없다는 점을 확인하려면 유출자의 통화내역이나 이동 경로, 접촉자에 대한 확인이 필요한데 어떤 과정으로 밝혀냈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정부는 쿠팡의 일방적 발표에 대해 "쿠팡이 주장하는 사항은 민관합동조사단에 의해 확인되지 않았음을 알려드린다"고 반박했다.
박종민 기자영업 과정에서 취득한 고객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은 고객의 신뢰를 저버리는 것 뿐 아니라 전자상거래 전체의 안전성을 허무는 중대한 위협에 해당한다. 쿠팡사태가 국민감정에 불을 지른데에는 오만한 대응도 한몫한다. 실질적 오너는 숨고 로비에 기대는 것으로는 소비자의 분노와 불안을 잠재울 수 없다.
정부가 쿠팡 정보유출사태TF를 범부처 대책회의로 확대한 것은 국민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조치일 것이다. 대통령실은 25일 관계부처 장관급 회의를 열어 대규모 과징금 등 징벌적 제재 방안을 논의했다.
윤리를 내팽개친 오만한 경영은 결국 소비자들이 외면할 것이다. 반사회적 기업활동을 하고도 미국 기업이라는 허울을 방패삼으려 한다면 더더욱 강력한 대응이 필요하다. 쿠팡의 사훈은 "How did we ever live without Coupang?(쿠팡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라고 한다. '탈팡' 행렬이 펀치를 날리고 있는 지금도 유효할까? 윤리 없는 혁신의 편리함은 점차 불안과 분노로 바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