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구글과 아마존 등 유수의 빅테크 기업들이 인공지능(AI)에 특화된 자체 칩을 앞세우면서 엔비디아 범용 GPU(그래픽 처리장치) 중심의 AI 칩 1강 체제에 균열 조짐이 보이고 있다.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AI 칩들에도 대량의 데이터를 빠르게 옮겨줄 고대역폭메모리(HBM)가 필수이기 때문에 메모리 기술 경쟁력을 갖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도 새로운 기회의 장이 열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엔비디아 GPU 1강 체제, 구글 TPU 고도화에 '균열'
엔비디아 GPU가 독주 중인 AI 반도체 시장에서 다크호스로 떠오르며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칩은 구글의 TPU(텐서처리장치)다. 구글이 지난달 내놓은 최신 AI 모델 '제미나이3'가 최강 모델로 여겨졌던 오픈AI의 GPT-5보다 뛰어나다는 평가가 잇따르면서 두뇌 역할을 담당하는 칩인 TPU의 주목도가 크게 상승했다.
TPU는 구글이 AI 모델의 학습·추론을 위한 연산 기능을 특화시켜 만든 AI 맞춤형 자체 칩이다. GPU는 다양한 AI 모델의 학습, 추론 뿐 아니라 그래픽 처리에도 강력한 기능을 발휘하는 다재다능한 범용 칩이지만, TPU는 연산 기능을 극대화 한 칩이어서 크기도 작고 전력도 상대적으로 덜 소모한다.
구글이 기획하고 브로드컴이 설계를 지원한 이 칩은 대만의 TSMC가 위탁 생산을 도맡아 하고 있다. 이처럼 특정 주체의 특정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맞춤형 반도체'를 ASIC이라고 한다. 엔비디아 GPU에 수요가 쏠리면서 가격도 비싸지고, 구하기도 힘들어진 만큼 여러 기업들이 ASIC으로 돌파구를 찾고 있는데, 구글이 2016년 공개한 뒤 고도화시킨 TPU로 성공적인 선례를 만든 모양새다. 구글이 확보하는 TPU의 가격은 수백만 원대로, 수천만 원대인 엔비디아 GPU보다 훨씬 저렴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글은 클라우드 서비스를 통해 TPU의 기능을 외부에 임대하는 식으로 비즈니스를 해왔는데, 최근 페이스북 운영사인 메타가 TPU 칩 구매를 검토 중이라는 외신 보도가 나오면서 직접 판매가 이뤄질 가능성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는 엔비디아에 특히 위협적인 소식으로 시장에서 받아들여졌다.
자체 개발 맞춤형 칩 ASIC 뜬다
구글 뿐 아니라 아마존웹서비스(AWS)도 자체 AI 칩을 발표하며 ASIC 시장의 성장 가능성에 힘을 싣고 있다. AWS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지난 2일(현지시간) 개최한 연례 클라우드컴퓨팅 콘퍼런스 '리인벤트(re:Invent) 2025'에서 자체 칩 '트레이니엄3'를 공개했다. 전작에 비해 연산 성능은 4배 이상 끌어올리고, 에너지 소비량은 40% 낮췄다는 게 AWS측의 설명이다.
AWS의 맷 가먼 최고경영자(CEO)는 트레이니엄3에 대해 "대규모 AI 훈련과 추론 측면에서 업계 최고의 가성비를 제공한다"고 가격 경쟁력도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AWS는 자사 칩이 GPU 사용 시스템에 비해 AI 모델 훈련과 운영 비용을 최대 50%까지 절감할 수 있다고 부연했다. 사실상 엔비디아를 겨냥한 설명이다. AWS의 칩은 자체 AI 모델인 노바의 학습에 사용된다.
이런 흐름과 맞물려 전 세계 ASIC 시장 규모는 빠르게 커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모건스탠리 리서치에 따르면 해당 규모는 2024년 120억 달러에서 2027년 300억 달러로 연평균 30% 넘게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메모리반도체 선두주자 삼성·SK에는 '호재'
연합뉴스
AI 칩 시장의 다변화 조짐은 메모리 반도체 선두 기업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는 호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AI 칩의 필수 부품이 이들이 기술 주도권을 쥔 HBM(고대역폭메모리) 등 메모리반도체이기 때문이다. 구글의 TPU 1개에도 6~8개의 HBM이 탑재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대부분을 공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반도체 전문연구원도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AI 시스템을 구축하는 흐름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우리 기업들 입장에서는 메모리 반도체에 대한 새로운 수요가 창출되는 것"이라며 "메모리 반도체의 시장 규모가 커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삼성전자는 지난 10월 3분기 실적 발표 후 이뤄진 콘퍼런스콜에서 "내년 HBM 생산 계획분에 대한 고객 수요를 이미 확보했다"고 밝혔다. 당시 SK하이닉스 역시 "주요 고객들과 내년 HBM 공급 협의를 모두 완료했다"며 '메모리 반도체 초호황기'에 진입했다고 판단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AI 기업들의 투자 확대로, HBM 시장은 보수적으로 보더라도 향후 5년 평균 30% 이상의 높은 성장률을 지속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여전히 AI 칩 시장의 패권을 쥐고 있는 엔비디아와 이들 기업 간 공조 관계도 더욱 깊어질 것으로 관측된다.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최근 6세대 고대역폭메모리 HBM4에 대한 자체 성능 테스트(PRA)를 거쳐 사실상 양산 준비를 마쳤다. SK하이닉스도 마찬가지다. 내년 출시 예정인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가속기 '루빈'에 HBM4가 탑재되는데, 엔비디아의 승인과 주문이 이뤄지면 양사의 경쟁도 한층 더 치열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