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남도영화제가 폐막한 지 이틀째, 광양의 밤공기에는 아직 영화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폐막을 하루 앞둔 지난 26일, 배우이자 감독 문혜인은 고향 광양에서 관객들과 만난 뒤 얼굴에 설렘이 스며 있었다.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피곤하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오히려 힘이 났죠."
상영 공간의 불빛이 꺼진 뒤에도, 고향의 공기 속에서 영화와 사람, 그리고 자신을 다시 마주한 그의 목소리에는 에너지가 채워져 있었다.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전남 광양의 금호동이다. 그래서 그는 광양을 "쉼이 필요할 때마다 찾게 되는 곳"이라고 말한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공간이 주는 안정감. 그곳이 바로 문혜인이 다시 숨을 고르는 장소다.
"제가 자란 금호동은 상가가 들어올 수 없는 주택단지라서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요. 그 안에 시간이 쌓이면서 동네가 하나의 작은 숲이 됐어요. 그 길을 거닐 때마다 마음이 정돈되고 위로받는 느낌이 들어요."
이번 상영에는 부모님도 함께해 더욱 뜻깊었다.
"엄마는 제 열렬한 팬이에요. 제 영화를 다 챙겨보시고 또 제일 솔직하게 평가해주시죠.그런데 아빠는 영화관에 거의 안 가세요. 이번에는 딸이 고향에서 상영하는데 안 오시면 이상하잖아요(웃음).부모님과 함께 영화를 본 게 참 오랜만이라, 그게 참 행복했어요."
광양은 그에게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언젠가 고향을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나 픽션을 구상해보고 싶다는 그는 "시간이 쌓인 사람과 장소가 가진 이야기들에 마음이 끌린다"고 했다.
"광양의 첫 지명이 '마로'라고 하더라고요. 늙을 노(老)자를 써서 '늙은 말'이라는 뜻인데, 그 말의 쓸모에 대해 생각해봤어요.나이 듦이나 잊혀진 것들의 의미 같은 것들을 영화로 풀어보고 싶어요."
그가 연출한 장편영화 <삼희> 역시 그런 시선에서 태어났다. 독립영화 배우가 사고와 번아웃을 겪은 뒤, 낯선 신도시 양주에서 회복의 과정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문혜인은 자신의 삶을 영화 속에 겹쳐놓듯 스스로 주연을 맡았다.
"저도 실제로 양주에 살고 있고, 어느 시기엔 정말 지쳐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보고 싶은 세계를 썼어요. 조금 더 안전하고, 믿을 만한 사람들 속에서 회복해 가는 이야기요."
지난 25일 남도영화제 관객과의 대화(GV)에서 관객들을 만난 문혜인 감독. 박사라 기자 첫 연출작 <트랜짓>과의 차이에 대해 묻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트랜짓>은 타인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결국 제 안의 어떤 부분을 발견하게 된 작품이었어요. 반면 <삼희>는 제 이야기를 다루는데, 관객들이 각자의 이야기로 가져가더라고요. 그게 참 신기했어요."
단편에서 장편으로, 소규모 현장에서 수십 명의 스태프가 함께하는 프로덕션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그에게 작은 산을 하나 넘는 일이었다. 그는 "연출자로서뿐 아니라 사람으로서도 많이 성장한 시간이었다"고 했다.
최근 그는 장편보다는 짧고 밀도 있는 작업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했다.
"장편은 너무 긴 호흡이에요. 오랜 시간 에너지를 써야 하죠.그래서 요즘은 뮤직비디오처럼 짧고 강렬한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음악과 영상이 만나서 만들어내는 감정의 파장을 탐구해보고 싶어요."
문혜인이 품고 있는 다음 이야기의 씨앗은 '예술가의 삶'이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예술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를 자주 생각해요. 기술이 감정을 대신하는 시대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이 할 수 있는 게 뭘까,그 질문이 제 안에 오래 머물러 있어요. 예술인의 삶과 사랑, 그리고 이 시대에 예술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표현해 보고 싶어요."
손끝에 닿는 모든 것에서 이야기를 찾아낼 것 같은 그녀. 그 영감의 원천은 어디에서 시작될까.
"거창한 데 있지 않아요. 그냥 일상이에요.살다 보면 이상하거나 낯선 순간이 있잖아요.'어, 신기하다' 싶은 그 감정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려 해요.나중에 보면 그게 작품이 되어 있더라고요. 결국 모든 건 일상에서 시작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