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대전 한화생명 볼파크에서 열린 2025 KBO 프로야구 포스트 시즌 플레이오프 1차전 삼성 라이온즈와 한화 이글스의 경기. 9회초 실점한 한화 김서현이 고개를 떨군 채 아쉬워 하는 모습. 연합뉴스프로야구 한화가 7년 만의 가을 야구 첫 판에서 짜릿한 승리를 거뒀습니다. 18년 만에 삼성과 맞붙은 포스트 시즌(PS)에서 웃었는데 역시 대전 홈에서 거둔 PS 승리도 무려 18년 만이었습니다. 당시도 삼성과 준PO 3차전 승리였습니다.
한화는 18일 대전 한화생명 볼파크에서 열린 '2025 신한 SOL 뱅크 KBO 리그' 삼성과 플레이오프(PO) 1차전에서 9 대 8, 재역전승을 거뒀습니다. 한화가 15개, 삼성이 11개 등 26개의 안타가 쏟아진 난타전 끝에 독수리 군단이 먼저 웃었습니다.
그러나 한화로서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정규 리그에서 맹활약한 에이스 코디 폰세(31)와 마무리 김서현(21)이 흔들리면서 불안감을 안겼기 때문입니다.
폰세는 이날 6이닝 동안 삼진 8개를 잡아냈지만 안타 7개와 볼넷 1개를 내주며 6실점(5자책)했습니다. 5이닝 7탈삼진 5피안타(2홈런) 3사사구 5실점한 6월 8일 KIA와 경기를 넘어선 개인 1경기 최다 실점이었습니다. 경기 후 상대팀인 삼성 박진만 감독이 "우리 타자들이 폰세를 그렇게 두들길 줄 예상을 못했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폰세는 6이닝을 버텨냈습니다. 2회 3점, 3회 2점, 4회 1점을 내줬지만 이후 5, 6회를 무실점으로 막아내 선발 투수의 역할은 해냈습니다. 결국 한화 타선이 터지면서 폰세는 역대 PS 최다 실점 승리 투수라는 진기록도 세울 수 있었습니다.
한화로서는 김서현의 부진이 더욱 큰 부담감으로 남았을 겁니다. 김서현은 9 대 6으로 앞선 9회초 등판하자마자 선두 타자 이재현에게 홈런을 맞고 대타 이성규에게 적시타를 내주며 2실점했습니다. 아웃 카운트 1개만 잡고 3피안타, 1점 차로 쫓긴 한화는 1사 1루에서 김서현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화로서는 다행히 좌완 김범수가 김지찬을 1루 땅볼, 김성윤을 중견수 뜬공으로 잡아냈지만 가슴 철렁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한화 김범수가 18일 PO 1차전 승리를 지켜낸 뒤 환호하는 모습. 한화 이글스 사실 김서현은 한화가 정규 리그 2위로 7년 만의 가을 야구에 진출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선수입니다. 당초 올해 마무리로 낙점됐던 주현상의 부진으로 팀의 클로저를 맡아 눈부신 활약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김서현은 정규 시즌 69경기 2승 4패 33세이브 2홀드 평균자책점(ERA) 3.14를 기록했고, kt 박영현에 2개 차로 세이브 2위에 올랐습니다.
다만 김서현은 후반기에 눈에 띄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전반기 42경기 1승 1패 1홀드 22세이브 ERA 1.55의 성적을 냈지만 후반기에는 27경기 1승 3패 11세이브 1홀드 ERA 5.68을 기록했습니다. 2023년 입단한 김서현으로서는 풀 타임 마무리가 첫 시즌인 만큼 몸과 마음의 부담이 있었을 터였습니다.
특히 정규 리그 막판 충격적인 끝내기 패배를 안았던 게 컸습니다. 지난 1일 SSG와 원정이었습니다. 김서현은 5 대 2로 앞선 9회말 등판해 2아웃까지 잡아내 순조롭게 경기를 끝내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김서현은 류효승에게 안타, 현원회에게 2점 홈런을 맞으면서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당시 SSG는 주전들을 빼고 대타를 기용했던 상황이었는데 순식간에 흐름이 묘해졌습니다.
흔들린 김서현은 정준재를 볼넷으로 내보내며 동점 주자를 허용했습니다. 결국 올해 신인이자 이날도 교체 투입된 이율예에게 끝내기 2점 홈런을 맞고 고개를 떨궜습니다. 한화의 정규 리그 1위 탈환 희망도 사라지게 된 경기라 충격은 더 컸습니다.
1일 인천 SSG랜더스필드에서 열린 2025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와 SSG 랜더스의 경기. 9회말 2사 1루 상황에서 SSG 이율예가 역전 끝내기 투런 홈런을 친 뒤 베이스를 도는 가운데 김서현이 타구를 바라보는 모습. 연합뉴스 이후 2주가 넘게 시간이 흘렀지만 김서현의 악몽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마음의 상처를 치유했을 시간이 됐을 법했지만 아직 그날의 아픔이 남아 있었던 걸까요? 김서현은 시속 151km 속구가 가운데 몰리며 이재현에게 홈런을 맞았고, 김태훈에게 던진 154km 속구도 안타로 연결됐습니다. 주무기인 강속구가 맞자 변화구로 패턴을 바꿨지만 슬라이더까지 이성규가 적시타로 공략하면서 김서현은 마운드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화 김경문 감독도 비록 승리했지만 근심이 남았습니다. 팀의 주전 마무리가 정규 리그 막판에 이어 가을 야구 첫 판에서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김 감독은 경기 후 "깔끔하게 끝났으면 했는데 김서현이 끝마무리를 못했다"고 입맛을 다셨습니다.
잇따라 큰 경기에서 붕괴된 김서현을 다시 세이브 상황에 올리기도 쉽지 않습니다. 김 감독은 "선수의 자신감을 살리는 것도 중요하고, 팀이 이기는 것도 중요한데 대화를 하면서 김서현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을 코치들과 논의해보겠다"고 밝혔습니다.
김 감독의 이런 상황은 18년 전을 떠올리게 합니다. 베이징올림픽 대표팀 사령탑 시절입니다. 공교롭게도 당시 김서현과 같은 나이인 21살 기대주 한기주(은퇴)와 관련한 딜레마였습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당시 김경문 감독(왼쪽)과 한기주. 노컷뉴스 당시 한기주는 KBO 리그의 떠오르는 마무리였습니다. 역대 KBO 리그 신인 최고 계약금인 10억 원을 받고 2006년 KIA에 입단한 한기주는 그해 10승(11패) 1세이브 8홀드를 올렸습니다. 이듬해부터 마무리로 변신한 한기주는 시속 160km에 육박하는 강속구를 앞세워 2승 3패 25세이브 ERA 2.43을 기록했습니다. 올림픽이 열린 2008년에는 3승 2패 26세이브 ERA 1.71을 찍었습니다.
대표팀에 승선한 한기주는 그러나 올림픽 본선에서 아찔한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미국과 경기에서 6 대 4로 앞선 9회 등판, 솔로 홈런과 연속 안타 등 6 대 7 역전의 빌미를 제공했고, 일본과 경기에도 5 대 2로 앞선 9회 1실점하며 불안감을 노출했습니다.
특히 대만과 경기에서 한기주는 8 대 5로 쫓긴 5회 1사 2, 3루에서 등판해 2⅓이닝 2실점했습니다. 6회 4번 타자 펑정민에게 동점 2루타를 맞으며 강판했습니다. 세이브 상황이 아닌 중간 계투로 등판했지만 불안감은 여전했던 겁니다. 비록 대표팀은 강민호(삼성)의 결승타와 권혁, 윤석민(이상 은퇴)의 계투로 이겼지만 웃을 수 없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당시 스코어도 9 대 8이었네요.)
당시 김 감독은 경기 후 "한기주도 팀에서 중요한 선수"라면서 "오늘도 떨어진 자신감을 찾아주기 위해 기용했다"고 등판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이어 "오늘 스트라이크존 판정 등으로 불안하긴 했지만 구위가 좋았다"면서 "향후 접전에서는 힘들겠지만 상황에 따라 (한기주를) 계속 쓰겠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마음고생이 없을 수는 없었습니다. 김 감독은 기자 회견장 밖에서 저를 비롯한 한국 취재진에게 한기주와 관련해 "나 보고 어쩌라는 말입니까"라며 하소연했습니다. 농담처럼 얘기했지만 감독의 고민이 진하게 묻어나는 대목이었습니다.
당시 대표팀은 정대현, 오승환(이상 은퇴) 더블 마무리 체제였습니다. 그러나 정대현의 허리가 좋지 않았고, 오승환마저 컨디션 난조로 박빙의 상황에 내기가 어려웠습니다. 때문에 대표팀으로서는 건강한 한기주가 마무리 역할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김 감독은 9연승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이룬 뒤 "이제야 얘기하는데 정대현, 오승환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한기주가 살아나길 바랐고 계속 투입을 했다"고 털어놨습니다.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시상식에 나선 이승엽 전 두산 감독(왼쪽)과 한기주. 노컷뉴스 18년이 지나 한화의 상황도 당시 대표팀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화는 주전 마무리 김서현을 대신할 카드가 마땅치 않습니다. PO 1차전에서 2이닝 4탈삼진 1피안타 무실점으로 경기 최우수 선수(MVP)에 오른 문동주가 대안으로 떠오를 정도입니다. 문동주는 올해 11승(5패)을 거둔 선발 자원, 그러나 PO 1차전에서 개인 최고 구속인 시속 161.6km의 광속구를 뿌리며 필승조 역할을 해냈습니다.
김 감독은 평소 선수들과 자주 얘기하는 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선수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깊게 헤아리는 지도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올림픽 당시도 김 감독은 한기주의 향후 등판에 대해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아플 텐데 '끝이다, 아니다'를 논할 단계는 아니다"며 선수의 마음을 감쌌습니다. 이번에도 김 감독은 "김서현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을 찾겠다"고 말했습니다.
한기주는 비록 올림픽에서 부진했지만 대표팀의 우승과 함께 금의환향했습니다. 이후 앞서 언급한 대로 2008년을 커리어 하이 시즌으로 마무리했습니다. 18년이 지나 역시 개인 최고 시즌을 보낸 김서현이 잇단 악몽을 극복하고 올해 가을 야구를 해피 엔딩으로 장식할 수 있을까요?
P.S-당시 베이징올림픽에서는 한기주만큼 혹은 훨씬 더 팬들의 가슴을 졸이게 만든 선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당시 4번 타자를 맡았던 이승엽 전 두산 감독입니다. 당시 이 감독은 일본 요미우리의 4번 타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는데 올림픽 본선에서는 1할대 타율로 부진했습니다.
하지만 김 감독은 확고한 신뢰를 보냈습니다. 김 감독은 당시 "이승엽의 타격 리듬이 좋지 않은데 어쩌면 감독보다 더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면서 "4강전 이후 큰 것 한 방을 터뜨려 줄 것"이라고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감독은 일본과 4강전 8회 역전 결승 2점 홈런을 날렸습니다.
베이징올림픽 일본과 4강전 승리 뒤 포옹하고 있는 김경문 감독과 이승엽 전 감독. 노컷뉴스 결승행이 확정돼 은메달을 확보한 뒤 이 감독은 취재진과 인터뷰에서 "너무 미안했어요"라며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이 감독은 쿠바와 결승에서도 선제 결승 1점 홈런을 날리며 금메달을 이끌었습니다. 한국 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올림픽에서 김경문 감독이 밀어붙인 '믿음의 야구'가 빛을 발한 장면이었습니다.
17년이 지난 올해 가을 야구에서는 어떨까요? 과연 한화에서도 김경문 감독의 믿음과 뚝심이 불꽃처럼 타오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