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의 황제의 슬라이스' 로저 페더러가 13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유니클로의 미래 세대 육성 캠페인 '로저 페더러와 함께하는 세계 여행' 행사에서 국내 유소년 선수들을 대상으로 특별 코칭을 진행하고 있다. 연합뉴스무려 18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은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44·스위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한국의 꿈나무들을 지도하며 세계 정상으로 군림했던 전설의 노하우로 깊은 울림을 안겼다.
페더러는 13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에 마련된 특설 코트에서 '로저 페더러와 함께하는 세계 여행(Around the World with Roger Federer)' 행사에 참여했다.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열리는 패션 브랜드 유니클로의 미래 세대 육성 프로그램으로 서울에서는 'READY, SET, SEOUL'이라는 주제로 펼쳐졌다.
지난 2007년 이후 페더러는 18년 만에 방한했다. 그해 11월 페더러는 26살 전성기로 36살 베테랑 피트 샘프라스(미국)와 서울 잠실실내체육관 특설 코트에서 '현대카드 슈퍼매치 Ⅵ'를 펼쳤다. 2006년에도 페더러는 라이벌 라파엘 나달(39·스페인)과 슈퍼매치를 벌였다.
이날 페더러는 유니클로가 선정한 20명의 유소년 선수들을 대상으로 스트로크와 슬라이스 등 기술을 직접 지도했다. 2022년 은퇴했지만 특유의 유려한 백핸드 드라이브 동작을 여전히 매끄럽게 펼쳐 탄성을 자아냈다. 페더러는 또 유망주들의 스트로크를 발리로 받아내며 독려했다.
페더러는 이후 어린 선수들의 진지한 고민을 풀어주기도 했다. 페더러는 "물론 경기 중 때로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플 때도 있을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그것 또한 인생이자, 테니스의 일부기 때문에 내가 전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조언은 '스포츠를 사랑하고 즐기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로저 페더러가 13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유니클로의 미래 세대 육성 캠페인 '로저 페더러와 함께하는 세계 여행' 행사에서 국내 유소년 선수들을 대상으로 특별 코칭을 진행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기 전 숨이 막힐 정도로 긴장될 때 어떻게 극복했느냐"는 질문에 페더러는 황제답게 여유 있는 답변을 내놨다. 페더러는 "테니스가 물론 중요하지만 인생 전체로 보면 테니스는 '즐거운 도전'이자 '삶을 풍요롭게 하는 취미'"라고 전제한 뒤 "긴장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만큼 진심으로 임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좋은 신호"라고 생각의 전환을 이끌어냈다. 이어 "상대도 똑같이 긴장하고 있으니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훨씬 편해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홍정우(11·최주연아카데미) 군은 유창한 영어로 "슬라이스와 발리를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질문하기도 했다. 이에 페더러는 "요즘은 예전보다 슬라이스나 발리 같은 기본기를 훈련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면서 "기본기 훈련은 코치님과 함께 꾸준히 훈련할 때 진정한 실력이 쌓이고, 코치님에게도 이 부분을 단련하고 싶다고 얘기하면 반길 것"이라고 답했다.
메이저 대회 20회 우승에 빛나는 페더러의 답변에 홍 군은 "전설적인 선수를 만나 너무 설렜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 "그 말대로 더 열심히 훈련해서 좋은 선수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특히 '한국 테니스의 전설' 이형택 오리온 감독(49)의 딸 이미나(14·씽크론아카데미) 양도 벅찬 표정을 지었다. 이 양은 강력한 스트로크로 페더러의 실수를 이끌어내자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기도 했다. 이 양은 "아버지와 페더러 중 누가 더 좋으냐"는 다소 짓궂은 질문에 "아빠는 한국 테니스의 전설이라면 페더러는 세계 테니스의 레전드라 더 대단하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이 감독도 페더러를 비롯해 특설 코트를 디자인한 세계적인 아티스트 카우스(KAWS), 한국의 그래픽 디자이너 용세라와 이벤트 복식 경기를 펼쳤다. 이 감독은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 페더러를 처음 보는데 그래도 나를 기억하더라"면서 "오랜만에 봤는데 선수 때보다 몸 관리도 잘 하고 남자인 내가 봐도 가슴이 설렜는데 미나의 친구인 (박)지연이는 울더라"며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행사 뒤 페더러(왼쪽부터)가 이미나, 이형택 감독과 기념 촬영한 모습. 이형택 감독 페더러와 이 감독은 지난 2003년 메이저 대회인 윔블던에서 대결한 적이 있다. 당시 1회전에서 이 감독이 졌지만 3세트 타이 브레이크까지 가는 접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 감독은 "페더러가 샘프라스를 꺾고 처음 윔블던에서 우승할 때 내가 발판을 마련해줬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아빠보다 더 대단하다는 딸의 평가가 섭섭하지는 않았을까. 이 감독은 역대 한국인 최초로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우승과 메이저 대회인 US오픈 16강 2회를 이뤘다. 테니스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주원홍 현 대한테니스협회장 등이 주도한 유망주 육성 프로젝트의 최대 수확으로 이 감독이 한국 테니스의 전설로 불리는 이유다.
하지만 이 감독은 "딸이 페더러와 같은 코트에서 서 있던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다"고 아빠 미소를 지었다. 이어 "오늘 기술이나 멘털과 관련한 페더러의 조언은 나도 했던 얘기지만 아빠의 잔소리로 들렸을 수 있다"면서 "그러나 세계 최고를 찍은 선수가 하는 말은 타이밍에 따라 딸은 물론 오늘 행사에 참가한 어린 선수들에게 크게 와닿는 게 있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특히 숱한 고비를 넘고 세계 최정상을 달렸던 페더러이기에 단순히 넘길 부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감독은 "2019년 윔블던 결승에서 노박 조코비치(세르비아)에 다 이긴 경기를 내줬을 때를 비롯해 그랜드 슬램에서 엄청난 충격을 많이 겪었을 것"이라면서 "그런데도 여유 있게 경기하는 걸 보면 정신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고, 산전수전을 얼마나 겪었을지 나이는 나보다 어리지만 경험은 더 많을 것"이라고 경의를 표했다.
행사 뒤 단체 촬영 모습. 유니클로 페더러도 "5세트 경기인 윔블던에서 '이제 너무 힘들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20분쯤 지나면 다시 에너지가 되살아난다"면서 "기분이 계속 나빠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회복의 순간이 오기에 힘든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테니스는 실수와 성공이 반복되는 경기"라면서 "오늘처럼 과녁 맞히기 게임을 할 때 대부분은 정확히 맞히지 못했지만 '거의 맞췄잖아!'라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태도, 결국 모든 것은 '관점'과 '마음가짐'의 문제"라고 당부했다.
이 감독은 최근 정현(머큐리), 권순우(국군체육부대)를 이을 재목들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유망주들이 이번 기회를 통해 부쩍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감독은 "페더러가 오늘 슬라이스와 발리 시범도 보여줬는데 우리 선수들이 더 다양한 기술을 익히고 멘털을 강화해 세계 무대에 나설 수 있는 인재로 크면 좋겠다"고 말했다.
페더러 역시 "한국은 스포츠를 사랑하는 나라"라면서 "어린 선수들에게 영감과 동기를 전달해 이 중에서 좋은 프로 선수가 나오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과연 세계 테니스 역사에 남을 전설이 18년 만에 방한해 안긴 영감을 토대로 한국의 유망주들이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