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한 토마토 농장에서 폭염으로 말라 비틀어진 열매를 만지는 농장 주인의 모습. 구본호 기자끝없는 폭염과 단 시간에 쏟아지는 막대한 양의 비, 메마른 땅을 더 깊게 갈라 놓은 가뭄, 그리고 산사태와 낙석까지 올해 강원지역 여름은 '기후 재난'의 현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주민들의 생활을 위협하기 시작한 자연 재난은 생존의 문제가 됐고 더 나아가 지역경기와 일상까지 변화시키고 있다.
주렁주렁 열린 바나나, 폭염이 만든 이상기후의 위협
강원 춘천의 한 교회 뒷편 마당에 바나나가 열려있는 모습. 구본호 기자
최근 찾은 춘천의 한 교회 뒷 마당에 심어진 바나나 나무에서 세 송이의 푸른 바나나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성인 키 만한 나무에 열린 바나나들은 손바닥 크기 보다 크고 묵직했다.
겨울이면 '춘베리아'로 불릴 만큼 추위가 긴 춘천에서 열대과일인 바나나가 자랐다는 소식에 구경꾼들이 몰린 탓인지 나무 주변으로는 '눈으로만 사랑해 주세요!', '바나나가 아파요!' 라며 주의해달라는 안내문도 걸려져 있었다.
건물 아래 하천 변을 따라 산책을 하던 한 주민은 "가끔 비닐하우스 같은 곳에서 키운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이렇게 매달려 있는 바나나는 처음"이라며 "올해 여름이 유독 더워서 그럴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끝없는 폭염이 낯선 풍경을 만들어내는 동안 그 피해는 사람과 동물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지난 5월 15일부터 지난 27일까지 도내에서 발생한 온열질환자는 162명으로 집계됐다. 지역별로는 춘천이 31명으로 가장 많았고 강릉 25명, 속초 19명을 각각 기록했다.
대부분의 온열질환자들은 열사병과 열탈진 증세를 보였으며 농사일이나 야외에서 활동을 하다 증세를 호소했다.
지난달 춘천의 한 양계 농장에서는 무려 5천 마리의 닭이 폭염으로 인해 집단 폐사하는 등 농·축산 가축 누적 피해는 5만2105마리로 파악됐다.
현재까지 기록된 강원지역 폭염 일수는 19.6일로 1973년 기상 관측 이래 두 번째로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폭우까지 덮친 영서, 영동은 극한 가뭄
강릉 오봉저수지. 전영래 기자영서지역에는 시간당 70㎜가 넘는 장대비가 쏟아지면서 낙석 피해가 이어졌던 반면 영동지역은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면서 '기후 양극화'가 현실화하고 있다.
지난 26일 시간당 74㎜에 달하는 장대비가 영서지역에 쏟아졌다. 누적 강수량은 사내(화천) 144㎜, 철원 113㎜, 춘천 신북 57.3㎜, 양구 34㎜ 등이다.
많은 비가 내린 탓에 이튿날인 27일 오전 춘천시 북산면 추전리 추곡약수터~수인리 구간 도로에 100톤 가량의 낙석이 발생했다. 해당 구간은 배후령 터널 개통 전 옛길로 낙석 당시 통행 차량은 없어 인명, 재산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강원도에 따르면 최근 3년간(2022~2024년) 발생한 도내 낙석은 42건으로 지난해 30건, 2023년 15건, 2022년 2건이 각각 발생했다. 지난해의 경우 2022년과 비교하면 무려 15배나 늘어난 수치다.
반면 같은날 영동지역의 경우 속초 19㎜, 양양 7㎜로 기록됐다. 비 소식이 간절한 강릉 오봉의 경우 단 1㎜에 그쳤다.
극심한 가뭄을 겪고 있는 강릉지역은 주 상수원인 강릉 오봉저수지 저수율이 15%대까지 떨어지면서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 이는 1977년 저수지 조성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강릉시는 지난 20일부터 수도 계량기를 50% 잠금하는 제한급수를 시행 중이며 저수지 하류 물을 저수지로 끌어 올리는 작업에 나섰다.
당분간 비 예보가 없는 가운데 저수율이 15% 미만으로 떨어질 경우 세대별 계량기를 75%까지 잠그고 농업용수도 추가 제한하겠다는 입장이다.
박수진 한국기후변화연구원 기후정책실장은 "태백산맥의 지형적 특성과 푄 현상, 양간지풍 등으로 영동지역 가뭄과 폭염이 심화하고 있고 강릉은 특히 댐 용량이 작고 유역 면적이 협소해 물 부족이 심각한 곳"이라고 진단했다.
박 실장은 "근본적으로 저수지와 댐 확충이 필요하지만 환경 파괴와 수몰지 발생 등 단점도 존재하는 게 사실"이라며 "물을 행정구역별로 나누지 않고 공유 자산으로 인식을 전환해 정선과 평창 등 인근 지역 물을 공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축제 연기하고 똘똘 뭉친 지역사회, 물가 폭등에 경기 우려도
강원 강릉시 강릉아레나 주차장 생수 배부 현장. 연합뉴스폭염과 폭우로 인한 피해는 지역 축제와 상경기에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오는 9월 5일부터 14일까지 예정된 '2025 평창 효석문화제'는 극심한 가뭄 영향으로 메밀꽃이 절반 가량 밖에 개화하지 않아 매년 받던 5천 원의 입장료를 받지 않기로 했다.
이효석문학선양회 관계자는 "7월 말에 파종 후 일주일 동안 비가 내린 뒤 현재까지 가뭄인 상태나 마찬가지"라며 "축제가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아 관광객분들께 메밀꽃 포토존 입장을 무료로 제공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강릉시는 다음달 1일 개최 예정이었던 '시 승격 70주년 강릉시민의 날 기념행사'를 잠정 연기하기로 했다.
개강을 앞둔 강릉지역 대학들도 물 절약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학내 TF팀을 구성한 강릉원주대는 수영장 및 샤워시설 운영을 중단했다.
물을 사용한 축제를 계획했던 가톨릭관동대는 학교 축제 구성을 레이저 등 장비로 대체하고 교내 3곳 분수대 물도 전부 뺐다.
다음달 12일 예정된 '춘천ONE도심 페스타'는 폭염을 대비해 얼음물을 현장에 상시 구비하고 대형 에어컨과 그늘막 등을 설치할 계획이다.
연합뉴스지자체들이 행사를 대폭 축소하거나 연기하면서 지역 상인들도 적극 동참하고 있다.
강릉에서 뷔페식당을 운영하는 한 시민은 최근 지역 커뮤니티에 물 절약 동참을 위해 9월 6일까지 점심 영업만 진행한다고 공지했다. 그는 "코로나 때도 제대로 운영 못 했는데 많은 분의 응원과 격려를 받으며 잘 버텼다"며 "일주일 내내 고민하다 결정하고 나니 오히려 후련하다"고 밝혔다.
강릉 임당동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고성민 강릉청년소상공인협회장은 물 절약 동참을 위해 일찌감치 정수기 사용을 중단하고 500㎖ 생수를 제공하고 있다.
고 회장은 "조금이라도 지역사회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며 "지역주민들과 상인, 관광객분들이 함께 동참해주신다면 가뭄 사태를 빨리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반복되는 폭염과 폭우로 과일과 채소값이 폭등하면서 어려움을 호소하는 상인들도 적지 않다. 원주에서 김밥집을 운영 중인 안모(35)씨는 "시금치 가격이 두 달 전과 비교하면 두 배 넘게 늘어났다"며 "작은 가게를 운영하면서 가뜩이나 먹고 살기 힘든데 날씨마저 도와주지 않으니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실정"이라고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