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3월 15일 '이천문화보'에 실린 독수리 소년단 이야기. 노컷 유튜브 채널 캡처▶ 글 싣는 순서 |
① 독서도 '죄'였지만…총 대신 책 들고 일어선 항일 10대들 ② 시외버스에 항일벽보…'어린이'들의 기발했던 독립운동 (계속) |
미국의 태평양함대가 주둔하던 진주만을 습격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는 등 일제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1942년 초,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이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날이 밝자 읍내 곳곳에 '조선독립군이 온다', '조선 독립 만세', '일제는 곧 패망하니 일제에 협력하지 말라' 등의 내용이 담긴 항일 벽보가 붙어있던 것.
일본 경찰이 대대적으로 검거에 나서 14명의 범인들을 붙잡고 보니 11살에서 16살까지 상당히 어린 조선인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조사를 받으면서 본인들은 '독수리 소년단'의 단원이며 배후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일본 경찰은 몇 개월간 어린 학생들을 붙잡아 놓고 모진 고문을 가하기도 하며 배후를 캐려 했지만, 결국엔 독수리 소년단이 자체적으로 벌인 일로 결론을 내렸다.
일제에 저항한 많은 독립운동가, 항일단체들이 있었고, 그 중엔 학생들이 주축이 된 독립운동 사례도 많았다. 그러나 어린이들 중심의 항일운동은 거의 알려진 바 없다. 1942년 이천 장호원 벽보 사건을 일으킨 독수리 소년단의 주축은 초등학교(일제강점기 당시 명칭은 심상소학교) 학생들이었다. CBS노컷뉴스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사실상 최연소 독립운동 단체라고 볼 수 있는 독수리 소년단의 흔적을 쫓았다.
조직부·선전부 등 나눠 체계적으로 조직 운영
독수리소년단이 처음 결성된 건 일제의 지배가 공고화되고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만연했던 1939년이었다. 기록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최초 창단 당시 중학생 나이였던 단장 박영순 외 단원들은 모두 장호원제일심상소학교(현 장호원 초등학교) 학생들로 가장 어린 단원은 8~9살이었을 걸로 추정된다. 당시 조선인에 대한 각종 차별을 접하던 어린 학생들이 평소 독립운동에 대한 생각이 강했던 박영순 지사의 집에 자주 모여 얘기를 듣고 나누면서 뜻을 공유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로 병합된 경술국치일(8월29일)에 맞춰 박영순 지사의 집에서 창단식도 가졌다. 창단식을 가지면서는 태극기 대신 독일국기를 달았다고 한다. 또 소년단의 공식 명칭은 '사나운 독수리'라는 뜻이 담긴 '황취(荒鷲)소년단'으로 일본식의 명칭인데 이 또한 일본 경찰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한 의도였다. 어린이들의 기발한 '위장술'이었던 셈이다.
창단 당시 10명 안팎이었던 어린이 단원들은 상당히 체계적으로 조직을 운영했다. 조직부, 선전부, 동원부, 재무부, 체육부 등으로 역할을 세분화하고, 철길 옆 빈 땅에 논, 밭을 일궈 운영비를 조달했다. 수확한 농작물을 팔아 닭을 사 길렀고, 그렇게 얻은 계란을 팔아 훈련 식비 등을 충당하기도 했다. 각자가 같은 뜻을 공유하는 주변의 학생들을 물색하고 포섭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렇게 결국 박영순, 김순철, 이상진, 조태옥, 박기하, 박성연, 백운호, 오기환, 곽태현, 박기순, 박정순, 이범상, 이상한 등 14명의 독수리 소년단이 모두 모이게 됐다.
독수리 소년단이 다녔던 이천 장호원초등학교(과거 장호원제일심상소학교) 모습.이들의 먼 훗날의 최종 목표는 성인이 되면 만주로 가서 독립군이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걸 위해 주로 육체적, 정신적인 단련을 매주 1~2회씩 함께 하는 게 소년단의 주된 활동이었다. 훈련 방식은 다양했다. 낮에는 일상적으로 산을 타며 체력을 길렀고, 끼니를 일부러 굶는 연습도 했다. 밤에는 한밤중 공동묘지에 가서 담력훈련을 가졌다. 담력훈련 때는 너무 어린 학생들은 2인 1조로 편성하는 등 각각의 수준도 고려했다.
한정혜 독수리소년단기념사업회장은 "어린이들이니까 할 수 있는 훈련법이란 생각도 들지만, 그게 어린이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면서 그들에게 상당히 진심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면서 "한편으론 어린이답지 않게 상당히 체계적으로 조직을 운영하거나 했던 증언들은 지금 보면 놀라울 정도"라고 말했다.
독수리 소년단원 고(故) 백운호 애국지사가 직접 쓴 자필 공적조서. 백운호 지사 후손 제공"동지들의 비명 소리…하루빨리 죽고만 싶었다"
독수리 소년단의 활동은 훈련에서 그치지 않았다. 종종 반일항쟁의 필요성을 담은 격문을 작성해 우편으로 전국 각지의 군수 등에게 보냈다. 물론 이러한 일들을 매우 비밀스럽게 진행했다. 커서 독립군이 되는 걸 더욱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참 신문에서 일제의 승전보를 떠들고 일본이 유독 선전에 애를 쓰는 모습에 분노를 느낀 단원들은 1942년 3월 회의 끝에 벽보를 붙이는 일로 표현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정의는 이길 것이며 일제는 망하게 될 것이라는 취지의 벽보 50여 매를 작성해 3월15일 심야에 장호원 읍내 곳곳, 공중변소와 전봇대 등에 부착했다.
또 단원들은 터미널에 주차돼 있던 시외버스의 뒷면 등에도 몰래 벽보를 붙였는데,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벽보를 보게 하기 위함이었다. 다음 날 이천 장호원은 술렁였다. 특히 '버스 벽보'로 인해 파장은 장호원의 경계를 넘어 각지에 달했을 것으로 보인다. 단원들의 진술에 따르면 당시 시외버스가 벽보를 붙인 채 행선지인 광주, 서울, 충주, 목계, 음성 등지를 다녀왔는데도 그냥 붙어 있었다고 한다.
한정혜 독수리소년단기념사업회장이 CBS노컷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노컷 유튜브 채널 캡처경찰이 며칠 안 돼 단원 14명을 모두 붙잡았다는 건 얼마나 당시 일본이 당황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온 동네 사람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14명의 어린 소년을 줄줄이 이천 경찰서로 이송한 일본 경찰은 가혹한 고문을 가하며 매일 같이 불러 배후가 누군지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고 한다. 독수리 소년단 창립 때부터 핵심 구성원이었던 백운호 지사의 자필 공적조서에는 당시의 끔직한 상황이 그대로 담겼다.
'취조실로 끌려 나간 나를 왜놈 경무 주임이 구두 발과 죽도로 무차별 때리고 걷어찼다. 사형당할 것을 이미 결심한 나는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며 내가 조선 사람이기에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일 뿐이니 당신들 마음대로 처단해도 더 할 말이 없다고 대답했다. 무수히 얻어맞다 까무러쳐 유치장에 돌아와서야 정신을 차리니 고문에 못 이겨 지르는 동지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하루빨리 죽고만 싶었다.'
이천 장호원 진암공원에 세워진 독수리 소년단 기념비. 노컷 유튜브 채널 캡처잊혀진 어린이들의 '독립운동'
소년단의 단장이자 나이가 가장 많았던 박영순 지사만 징역형을 선고받고 2년 넘게 정식 복역했고, 다른 단원들은 대부분 형사 미성년자였기에 7~8개월 뒤 약식재판을 받고 풀려났다. 장호원으로 돌아온 소년들이 마주한 건 어린 나이 감당하기 어려운 불행과 불이익들이었다.
우선 박성연 지사 등 일부 단원들은 고문 후유증으로 몇 년 만에 사망했다. 또 충격을 받은 가족들이 병을 얻어 얼마 안 돼 죽거나, 시력을 잃는 일도 있었다. 공무원이었던 가족들이 파면되기도 했다. 단원이자 조장 중 한 명인 박기하 지사의 경우 졸업 후 명문중학교 입학을 압두고 있었으나 검거돼 잡혀가는 바람에 중학교 입학이 취소되기도 했다.
더욱 안타까운 건 이후 오랫동안 독수리 소년단이 잊혀졌다는 점이다. 지역 주민들은 쉬쉬했고, 광복 이후로도 어린 아이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크게 조명되지 못했다. 기록도 거의 남아있는 게 없다.
독수리 소년단의 조장이었던 고(故) 박기하 애국지사의 아들 박기하씨가 CBS노컷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노컷 유튜브 채널 캡처
2019년 동화를 쓰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다가 독수리 소년단을 기리고 알리는 기념사업회를 만드는 데까지 참여하게 된 한정혜 회장은 "특히 여성과 어린이들의 이야기들이 제대로 기록되지 못했던 시기가 오래도록 있었다. 이제라도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들이 이어지고 있다는 건 다행"이라면서도 "여전히 많이 부족하고 앞으로도 대중의 많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 2021년 이천 장호원의 진암공원에 처음으로 독수리 소년단 기념비를 세운 이천독립운동기념사업회의 최의광 전 회장은 "세계적으로도 초등학교 학생들이 이렇게 조국을 위해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해 활동했다는 건 흔치 않은 사례임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 안타까웠다"며 "이들의 정신을 발굴해 후대에 가르쳐야 하는데 사실상 방치돼 왔다는 점은 가슴 아파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수동적인 공훈 발굴 안타까워"
큰 과제도 남아 있다. 독수리 소년단 14명 중 독립유공자 서훈이 이뤄진 건 박영순(애족장), 박기하(대통령표창), 백운호(대통령표창), 곽태현(대통령표창) 단 4명뿐이다. 그마저도 박영순 지사가 2001년도에서야 단원 중 처음으로 서훈을 받았다.
그런데 박영순 지사가 처음 서훈을 신청할 때 14명 모두의 이름으로 인우보증을 첨부해 신청서를 냈지만, 당시는 공식적인 수형 기록이 남아 있는 박영순 지사만 홀로 서훈을 받았다. 다른 3명은 경찰청의 오랜 자료 속에 남아 있었던 검거 당시 지문장 등을 뒤늦게 찾아 개별적으로 서훈을 신청해 받을 수 있었다. 나머지 단원들은 기록을 찾지 못하고 있고 또 일찍 세상을 떠나 후손이 없는 단원들은 사실상 개별적인 노력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국가적 노력과 대중의 관심이 절실한 이유다.
독수리 소년단원 고(故) 백운호 애국지사의 아들 백인권씨가 CBS노컷뉴스와 화상으로 인터뷰를 갖고 있다. 줌 화상 인터뷰 장면 캡처
2019년 서훈을 받은 백운호 지사의 아들 백인권(67)씨는 남은 10명의 독수리 소년단원들도 서훈을 받도록 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현재 뉴질랜드에 거주하고 있는 백씨는 "독수리 소년단은 함께 마음을 합해 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애를 썼던 형제 같은 이들이었다. 개인이 아닌 독수리 소년단이 모두 하나였다"면서 "지금은 모두 돌아가셨지만, 보훈의 혜택 이런 건 없다고 할지라도 14명 모든 분들의 명예는 회복시켜서 이름을 남겨줘야 하지 않겠냐는 게 제 생각"이라고 했다.
백씨는 "안타까운 건 독립유공 서훈 등의 과정에서 보훈부 등이 상당히 수동적이라는 점"이라며 "이미 과거에 제출된 자료 등을 토대로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다시 검토하고 발굴할 수 있을 텐데 그런 노력이 없다는 게 안타깝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