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동 벚꽃길. 서울역사박물관 제공"서울의 첫 벚꽃은 여의도가 아닌 수유리에서 피었다."
서울 강북구 수유동, 흔히 '수유리'로 불리는 이곳은 서울 최초의 벚꽃 명소였다. 최근 서울역사박물관이 발간한 보고서 '수유동: 느린 도시, 살아있는 공동체'에 따르면, 수유리는 1700년대 조선통신사를 통해 들여온 벚나무 묘목으로 조성된, 서울의 원조 벚꽃단지다.
기원은 조선 후기 문신 홍양호(1724~1802)의 별장에서 비롯됐다. 그는 일본에 다녀온 조선통신사로부터 들은 벚꽃 이야기에 감명을 받아 수백 그루의 벚나무를 우이동·수유동 일대에 심었다. 훗날 일제강점기에도 '경성 근교의 대표 벚꽃 명소'로 불렸다.
지명 '수유리'는 1865년 고종 2년부터 기록에 등장하며, 1949년 서울에 편입된 뒤 행정구역명은 '수유동'으로 바뀌었지만, '수유리'라는 명칭은 75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4·19민주묘지', '아카데미하우스' 등은 수유리라는 지명을 고유명사로 만든 대표적 상징들이다.
4·19민주묘지도 원래는 남산에 조성될 뻔했지만, 시민공원 환원으로 계획이 무산되고 수유동이 대안지로 채택됐다. 1995년에는 김영삼 대통령 지시로 국립묘지로 승격, 현재는 서울의 대표적인 민주주의 성지로 남았다.
또한 수유동은 아카데미하우스를 중심으로 1970~80년대 민주화운동 담론이 꽃피운 공간이기도 했다.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세 야당 지도자가 한자리에 모였던 1988년 회의는 한국 정치사의 한 페이지로 남아있다.
최근에는 개발 중심이 아닌 주민 자치 중심의 도시재생 모델로 재조명받고 있다. '빨래골'로 불리는 수유1동은 철거민의 정착지에서 출발해 주민이 만든 공공공간과 커뮤니티 프로그램으로 다시 태어났다. 마을 노인과 청소년이 함께하는 '월요노인밥상'은 지금까지 260회 이상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