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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선교의 아버지 '민노아'의 선교 마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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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지난 1900년 충북 청주 땅을 밟은 벽안의 외국인 선교사 프레더릭 S. 밀러(한국명 민노아). 청주를 사랑해 33년 동안 이 곳에 머물며 경기 남부를 포함한 우리나라 중부권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많지 않다. 충북CBS(본부장 변이철)는 청주성서신학원과 함께 이 땅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공의를 전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린 '충북선교의 아버지 민노아 선교사 바로알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민노아 선교사의 생애와 선교의 족적, 신앙 등을 소개하는 글을 연재한다.

조선인을 귀히 여기고 존중한 선교사
조선인의 개화와 문화적 근대화를 촉진한 선교사
청주의 명소 탑동 양관을 문화유산으로 남긴 선교사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학생들이 백의소년 성가대로 추정된다. 청주성서신학원 제공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학생들이 백의소년 성가대로 추정된다. 청주성서신학원 제공
1900년 12월 처음 청주 땅을 밟은 최초의 외국인이었으며, 청주를 사랑하여 33년간 청주를 중심한 경기남부와 중부권 선교의 첨병이었던 F.S. Miller(한국명 민노아: 1866~1937)에 대해 그동안 우리를 너무 죄송할 정도로 무관심했다. 예장통합 충북노회는 지난 2016년 그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여 그저 짧은 영상 하나, 추도시 한 편을 낭독하는 것으로 갈음했다.

경향 각지에서 1년에 1천 여명이 탑동 양관을 찾아 민노아 선교사의 문화유산을 탐방한다. 해외선교사도 있고, 신학생도 있고, 목회자, 항존직, 성도는 물론 청소년, 비기독교인도 있다. 선교역사와 문화해설을 들으며 감동하고, 재미있어하면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왜 이렇게 훌륭한 선교사에 대해 신학교에서 한 번도 그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을까요?"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충북지역 기독교가 그동안 민노아 선교사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라도 연중계획을 통해 <민노아 선교사 바로알기> 캠페인을 벌이게 된 것은 정말 다행이다.

충청북도와 청주시는 2025년도에 '탑동양관길' 명예도로 지정을 진행하고 있으며, 1983년 충북지방 유형문화재 133호로 지정된 탑동 양관은 2025년도에 국가 지정 문화재(사적) 승격을 준비하고 있다. 참으로 시의적절한 캠페인이라 여겨진다.
 

그의 출생과 가족 그리고 사역의 시작

민노아는 1866년 미국 펜실베니아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W. M. Miller는 남북전쟁에 육군 군의관으로 참전했으며 펜실베니아에서 58간 의사로 봉직했고, 아내 수잔 워크 사이에 4남3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아들 둘은 외과의사가 되었고, 둘은 목사와 선교사가 되었다. 민노아는 복음적인 중산층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피츠버그 공립학교와 1889년 피츠버그 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뉴욕 유니온 신학교를 입학하여 1892년 졸업했고 미국 장로교회 선교위원회의 임명을 받아 한국에 파송되었다.

당시 미국의 분위기는 세계 선교의 비전이 고조될 때였고, 그뿐 아니라 최고의 엘리트와 복음으로 무장한 사람들만이 세계 선교사로 파송 받을 수 있었다. 또한 한국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가 첫 번째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갔을 때, 자신의 교육 사역 후임자를 물색하던 중 유니온 출신의 민노아를 눈여겨 보았고, 그를 엘렌 우드 박사에게 요청하여 한국에 오게 되었다.

언더우드가 엘렌우드 박사에게 보낸 선교 편지에 보면 " 한국에 보낼 사람에 대해서는 제가 지금은 추천할 사람이 없지만, 유니온에서 온 사람을 알아보는 중입니다. 저는… 그가 연설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물론 저는 그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의 이름이 밀러인가 확실치 않습니다." 이 편지는 1892년 3월 14일에 보내졌고, 민노아는 유니온 신학교를 졸업하고 1892년 11월 14일 한국에 도착했기 때문에 언더우드가 편지에 언급한 밀러가 민노아 선교사라고 추청할 수 있다.
 

민노아 선교사의 사역 : 서울 사역과 청주사역

민노아 선교사는 청주 지역의 개척 선교사로 알려져 있지만 첫 사역지는 서울선교부였다. 서울에서도 다방면에 걸쳐 활발히 활동했다. 서울선교부 회계를 맡았고, 찬송가 작사와 번역, 신문, 기독서회 같은 문서 사역, 성경 번역, 연동교회 설립의 기초, 경기지역 전도 등이다.

그러나 그의 주사역은 언더우드가 세운 <예수학당>을 잠시 물려받은 사무엘 마펫의 뒤를 이어 제3대 학당장으로 교육사역에 주력하는 것이었다. 민노아는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복음을 전한다"는 교육관으로 교명을 <민노아학당>으로 개칭하고 자신의 교육 방침대로 보통반과 특별반(실업반)의 새로운 학제를 만들어 실용교육 발전에 이바지한다. 금강산, 원산 등 현장 지리 답사를 교육과정에 포함시켰고, 학생 수가 46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때 서병호, 손순명, 김규식 등 훗날 새문안교회의 지도자들이 공부하였고, 민족지도자 도산 안창호 선생도 이 시기 민노아선교사의 지도를 받았다.

1894년 밀러는 부인 안나 밀러와 함께 민노아학당의 학생들로 <백의소년 성가대>를 조직하는데, 이것은 장로교 최초의 성가대로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밀러 부부의 헌신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성가대는 새문안교회의 예배와 전도에 크게 활약했는데, 1894년 5월에는 <백의소년성가대>가 조선의 마지막 과거시험이 실시되는 궁궐 시험장 앞에서 찬양으로 전도하며 『권중회개』 3천권을 배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1897년 10월 선교사 월례회의에서는 선교의 문이 활짝 열려 직접 선교에 주력하기 위해 구체적인 선교행위가 없는 교육선교를 지양하라는 선교본부의 지시로 <민노아학당>을 폐쇄하기로 결정한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시급하였고, 무엇보다 학당운영을 전담할 전문인력이 부족했던 것이 이유였다. 학당이 문을 닫자 학생 일부는 새문안교회 영신학교(West Gateprimary school)로 편입하였고, 에비슨 병원의 직원으로 채용되었다.

1898년 3월 2일 첫아들이 태어났으나 6개월 뒤인 10월에 사망했다. 안나 밀러는 2년마다 자녀를 출산하면서 건강이 좋지 못했는데, 아기가 사망하자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밀러는 부인을 간호해야 했기 때문에 가을 사역을 하지 못하다가 11월이 되어서야 조사 김흥경과 함께 곡산 등 지방 전도에 나설 수 있었다.

1899년 2월에 새문안교회에서 <조사훈련반>이 시작되었는데 기포드, 무어, 웜볼트, 언더우드 등과 교수로 가르치다가 4월에 안식년 휴가를 얻어 미국 펜실베니아 피츠버그로 갔다. 첫 안식년으로 건강으로 회복한 밀러 부부에게 뉴욕에서 셋째 딸 안나가 태어나 기쁨을 주었다. 1900년 4월 서울로 돌아왔고 2년 후인 1902년 3월 둘째 아들이 태어났으나 이튿날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다. 둘째 아들마저 바로 사망하자 안나 밀러는 깊은 우울감에 빠졌다. 건강이 악화되어 1년 넘게 병상에 있다가 38살인 1903년 6월에 복막염으로 사망하여 두 아들이 묻힌 양화진에 장사되었다.
 

중부권(충청, 경기남부) 선교의 개척자

연이은 개인사의 아픔 속에서도 민노아의 사역은 계속되었다. 그는 청주에 접근하기 전까지 청주, 원주, 강원도 동해안을 포함한 서울 동부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1901년 그가 전도하던 곳은 경기도와 그 경계인 여주, 이천, 음성, 죽산, 안성 등지에 미쳤다.

이즈음 1900년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조사 김흥경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청주시장에 답사를 위해 내려왔다가 고무적인 경험을 한다. 당시 남한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남석교에서 전도지를 나눠주었는데, 청주읍성 사람들의 반응에 큰 감동을 받았다. 서로 전도지를 받겠다고 밀치는 바람에 남석교에서 떨어질 뻔하기도 하였고, 시장을 지나는데 어떤 사람이 무엇을 큰 소리로 읽고 있었고 16명이 그 이야기를 경청하는데 그것은 자기가 전해준 전도지 "탕자 이야기'였다.

 그 당시 청주는 작은 읍성에 불과했다. 조선 말기까지 조선땅의 큰 도시는 평양, 개성, 한양, 그 다음이 충주로 약 12만 명이 거주하였는데, 그에 비하면 청주는 1만 명 정도의 작은 읍성에 불과하였다. 그후 그가 청주에 선교기지를 세우고 자신의 사역지를 청주로 정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그가 1900년에서 1901년 어간 경기도 죽산 둠벙리교회(죽산교회)에서 찬송을 가르치며, 마가복음을 가지고 사경회를 했는데, 그곳에 청주읍 신대리 주민 오천보, 문성심, 오삼근 등이 참석했다가 예수를 믿고 돌아와 자생적으로 교회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고무된다. 민노아는 조사 이찬규를 보내 오천보의 집을 매입하여 세운 교회가 충북 최초의 교회 신대교회이다.
 

민노아의 선교 마인드

민노아는 건강이 좋은 편도 아니었고 조용한 성격이지만 정신과 영혼은 겸손과 사랑, 그리고 전도 열정으로 가득한 선교사였다. 그가 <민노아학당>을 맡아 새롭게 개편하여 실업교육 등 특별반을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민노아는 조선이 못살고 가난하고 미개한 이유가 조선인이 교양이 없고, 지식이 없고, 인격이 부족한 탓이 아니라, 세계 변화를 알지 못하고, 과학과 기술 등 선진 문물에 과문한 탓이라고 여겼다.

또 그가 선교지를 청주로 택한 이유도 이북지역과 강원도, 경기도 지역보다 청주 사람들이 유순하고, 새로운 지식에 목마름이 있는 것을 큰 장점으로 생각하였다. 그의 보고서를 보면 신대교회 교인들이 신문을 읽으며 사회 지도력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특별하게 보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저서 중 하나인 <조선에서의 복음>에 보면 민노아선교사는 조선인들에 대한 애정에 곳곳에 묻어난다.

그가 신대교회를 방문했을 때, 나이 많은 한 집사가 발을 걷어붙이고 긴 강을 건너와서 자신을 업고 건넌 것에 대해 얼마나 그 마음이 고마운지 두고두고 회상하고 있다. 자신보다 나이 많은 늙은 집사가 자신을 업었을 때 미안함과 따뜻함과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다. "선교사님 우리는 어려서부터 이 물에서 놀고 자라서 물이 차갑기가 않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님은 우리와 달라서 많이 차갑습니다."
그런 따뜻한 마음을 아는 것이 그의 겸손이고 사랑이며, 한국인을 대한 태도였다.

1930년대 탑동 언덕에 지어진 6동의 양관. 청주성서신학원 제공1930년대 탑동 언덕에 지어진 6동의 양관. 청주성서신학원 제공
"민노아" 그의 이름이 '노아'인 이유는 무엇일까? 노아의 의미는 "안위, 위로"라는 뜻이다.
그는 특히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찬송가를 많이 작사하였으며, 한국어의 음절, 운율, 강약의 특성까지 파악하여 한국인에 맞은 찬송가 편집에 기여했다. 현재 통합 찬송가에 그가 직접 작사한 곡이 5개이고, 번역한 곡이 20여곡에 이른다. 또 최초의 장례 찬송가 "친애한 이 죽으니 우리 눈물 흘리며 슬퍼 머리 숙일 때 주여 위로하소서"(통일 294장) 이 곳도 민노아가 지었다.

또한 노아는 120년 동안 구원의 방주를 지어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을 순종했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있던 해, 일제의 마수가 한반도를 짓누를 때 청주 읍성이 내려다 보이는 우암산 끝자락 탑동 언덕 5만 여평을 사들여 그곳에 한영절충식 붉은 벽돌로 양관을 지어 청주읍민들에게 희망을 선물했다. 그가 지은 양관은 1906년 청주 대홍수 때, 200여명의 이재민들을 몇 달 동안 먹이고 재우고, 위로하여 복음의 길을 준비했다. 그것만이 아니다. 청주지역 청년들의 근대화 욕구가 분출할 때 최초의 근대학교인 청남학교를 세워 청주 근대화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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