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실 제공제20대 대선에서 승리한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 가장 앞세운 정책 과제는 '용산시대 선언'이었다. 구중궁궐 청와대와 차별화하고 국민과의 거리감을 줄이겠다는 의도였다. 제왕적 대통령의 권위를 내려놓고 소통과 개방성을 추구하려는 취지로도 해석됐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초심은 흔들렸다. 출근길 약식 회견인 도어스테핑은 취임 6개월 만에 중단됐고 신년기자회견도 KBS 녹화대담으로 대체되더니 올해는 국회 본회의 시정연설에도 불참했다.
최근 불거진 윤석열 대통령의 골프 논란은 국민과의 담을 더 높이 쌓는 계기가 되고 있다. 대통령 경호처는 윤석열 대통령의 골프를 현장 취재중이던 CBS 취재기자에게 접근해 휴대전화를 빼앗고 제보자를 캐물었다. 경호처의 신고를 받은 경찰은 기자를 임의동행해 조사를 벌였다.
"365일 24시간 국민의 삶을 챙기는…" 발언 이틀 뒤 골프장行
서울 노원구 태릉체력단련장(태릉CC) 2번 코스. 김세준 크리에이터
언론이 대통령 골프를 문제삼는 건 주말골프를 트집잡기 위함이 전혀 아니다. 부적절한 시기에 골프장에 나선 무감각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무인기 침투와 관련한 북한의 중대 성명이 발표된 다음날에도, 명태균씨와의 육성통화가 공개된 이후에도, 대국민기자회견에서 국민들께 허리숙여 사과한 이틀 뒤에도 윤 대통령은 골프장 잔디를 밟았다. 7일 대국민담화에서 "저 역시 365일 24시간 국민의 삶을 챙기는 것이 대통령의 어깨에 놓인 책무라는 생각이 든다.(중략)…정말 쉬지 않고 달려왔다"는 말을 무색케하는 부적절한 골프였다.
거짓해명 논란은 이제 고질병에 가깝다. 대통령 골프가 언론에 노출되자 대통령실은 트럼프 당선인과의 골프 외교를 위한 연습이라고 해명했는데, 수 개월 전부터 골프장에 출입한 사실이 잇따라 드러나면서 거짓해명은 신뢰의 위기를 증폭시켰다. 지난 9월 국방위 전체회의에서 야당 의원이 윤 대통령의 골프 의혹을 제기했을 때만해도 여당에선 "대통령이 골프를 전혀 안친다, 김건희 여사도 골프를 칠 줄 모른다"고 하고 김용현 국방부장관은 "(대통령의 군 골프장 출입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다", "과거 10년 전에 치신 걸로 알고 있다"고 답변한 걸로 미루어 취재에 의한 현장 노출이 원망스러웠을지 모를 일이다.
대통령의 골프는 국민에게 민폐가 되는 경우가 많다. 앞뒤 시간 부킹 취소로 인한 민원 발생과 함께 경호와 교통통제가 야기할 국민 불편도 감수해야 한다. 문민정부 이래 역대 대통령이 재임 중 골프를 꺼린 것은 국민정서와 국민불편을 두루 감안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업가 출신 이명박 전 대통령도 재임중에는 골프 대신 테니스를 즐겼다.
사안의 본질 흐리는 대응
언론의 취재를 대하는 대통령실의 태도에도 몇 가지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휴대폰을 빼앗고 취재기자를 조사하는 것은 사안의 본질을 흐리려는 시도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부적절한 시기에 골프를 친 점과 부적절하게 해명한 점을 따져묻고 있는데, 문제를 지적(指摘)하는 손가락이 잘못됐다고 탓하는 격이다.
과거 3.1절 골프 파문을 일으킨 이해찬 전 총리를 상대로 국민의힘 전신 한나라당은 사퇴를 요구해 실제로 총리 사퇴를 이끌어냈다. 지난해 7월엔 국민의힘 윤리위가 수해 기간 골프를 친 홍준표 대구시장에게 당원권 10개월 정지라는 중징계를 내린 바 있다. 정치인의 부적절한 골프에 대한 감수성이 사안의 본질이었다.
둘째, 국민의 알권리를 바라보는 대통령실의 시각이 드러났다는 점이다. 대통령의 떠들썩한 행차로 빚어진 일임에도 불구하고 취재를 고압적인 자세로 막은 것은 부적절하다. 단풍객이 오가는 골프장에서 단순히 취재활동을 했을 뿐 위치를 노출시킨 것이 아닌 만큼 안전문제와도 거리가 있다. 그런데도 대통령 골프의 현장이 노출되자 '트럼프 외교'를 내세워 석연치 않은 해명을 한 것 역시 알권리를 방해하는 일이다.
대통령경호처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 김세준 크리에이터청와대를 뒤로하고 용산시대를 열어젖혔던 윤석열 정부는 과연 열린 광장으로 나왔을까? 구중궁궐의 담장을 걷어냈을까? 애석하게도 언론을 대하는 태도에도, 대통령 주변의 의혹 해소에도 높은 담벼락이 존재한다. 국경없는기자회(RSF)가 올해 발표한 2024년 '세계언론자유지수'에서 우리나라가 세계 62위로 스무 계단 가량이나 추락한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받아들이기에 따라 언론의 비판 기능은 정권에도 이롭다. 구체적인 사안에서 제기되는 언론의 쓴소리를 적절히 취사선택해 국정운영 방향에 녹여낸다면 국민의 불만이 누적되기 전에 선제적으로 해소하는 순기능을 기대할 수 있으니 말이다. 반대로 민심과 멀어지면 심리적 담장은 더욱 높아지게 마련이다.
윤석열 대통령 스스로가 높이 평가하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한 명으로 꼽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일찌기 그의 저서에서 국민과 정치인에게 각각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을 남겼다. 대통령을 포함한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새겨볼 대목이다.
"민주주의는 시시비비를 먹고 자랍니다. 국민이 시비를 끝까지 가려야 국민에 의한 민주주의는 뿌리박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국민을 하늘로 알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칸트에게는 철학이 님이고… 정치인에게는 국민이 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