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응급실 진료 지연'. 13일 서울 시내 한 병원 응급실 앞에 진료 지연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연합뉴스지난 2월 23일 보건의료 재난경보 단계가 최상위인 '심각'으로 격상된 지 어느덧 8개월째다. 코로나19와 같은 신종감염병이 아닌 의료공백 사태로 재난경보가 심각으로 발령된 것은 사상 처음이다.
정부의 의대정원 증원에 따른 의정갈등과 의료공백, 이로 인한 국민적 불안감은 악화일로이지만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는 해법을 찾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의료계 안팎에선
여·야·의·정 협의체든 의료개혁특별위원회든 의료계 참여를 촉구하는 정부의 일방적 호소만으로는 돌파구를 찾을 수 없을 거란 기류가 지배적이다. 수개월째 막대한 건강보험 재정을 투입해 비상진료체계를 간신히 유지할 뿐인 정부가 장·차관의 사퇴를 일언지하에 거부한 것 또한 무책임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된다.
반 년째 의료계 보이콧 중인 의개특위서 '진정성 있는' 대화?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7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열린 보건복지부·질병관리청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을 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
14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복지부는 지난 7~8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감에서 2025학년도 의대정원 증원을 원점으로 돌릴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 한 달 정도밖에 남지 않은
대입 일정도 근거로 댔지만, 근본적으로는 정부가 지난 2월 6일 발표한 '의대 2천 명 증원' 정책의 정당성을 부정할 생각이 없다는 게 핵심이다.
복지부는 국감 첫날 조규홍 장관이 보고한 '주요 업무 추진현황'에 주요현안사항으로 담긴 '비상진료체계 운영 및 전공의 복귀' 파트에서
"국민과 의료계, 전문가, 정부가 참여하는 사회적 협의기구인 의료개혁특위 등을 통해 의료계와의 진정성 있는 대화 및 문제해결을 추진하겠다"고 향후 계획을 밝혔다.
하지만 지난 4월 말 출범한 대통령 직속 의개특위는 반년이 돼가도록 '반쪽짜리'란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현재 공급자단체 추천 위원으로 참여 중인 곳은 대한병원협회·대한중소병원협회 등으로, 현장 의사들을 대변할 수 있는 대한의사협회(의협)·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등은 참여를 쭉 거부해 왔다.
이는 '2025년도 포함' 의대 증원을 재논의해야 한다는 의료계의 입장과 '이미 활시위를 떠났다'는 정부 방침이 첨예하게 대립해온 탓이다. 집권여당이 띄운 여야의정 협의체도 같은 이유로 표류 중이다.
의정 대화가 시급한 상황에서 의료계 참여를 유인할 변수가 없는데 이들이 자발적으로 마음을 돌리기만 바라는 것은 비현실적 기대일 뿐 아니라 무책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앞서 정부 편에 서서 의사들의 집단행동을 질책했던 환자단체들마저 최근 "정부는 과연 현 사태를 해결할 의지가 있는 건가"라며 돌아서기도 했다.
실제로 올 2월 전공의 대거 이탈로 전문의 수급에 적신호가 켜진 데 이어 의대생 집단유급 현실화 등
파장은 커지고 있는 데 반해 정부 대응은 사태 초기 원론적 입장과 거의 대동소이하다.
보건복지부가 올해 상임위 국정감사에서 국회에 보고한 '주요 업무 추진현황' 중 '비상진료체계 운영 및 전공의 복귀' 파트 발췌. 복지부 제공조 장관은 지난 7일 "(업무보고에 명시된) '진정성 있는 대화'에서 진정성은 어떤 걸 말하는 건가"란 더불어민주당 이개호 의원 질의에
"말로만 하지 않고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대화를 말씀드리는 것"이라고 답변했다.
그 신뢰성은 무엇을 이르는지 재차 묻자 "전공의들이 단순히 의대정원(증원)만을 갖고 집단행동을 한 것이 아니고, 공정한 수가나 의료사고에 대한 부담 완화 등을 (주장해 왔는데), 이런 것들에 대한 불만이 많으신 걸로 안다"며 "저희가 하나하나 추진해 나가고 있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의정사태의 직접적 원인은 '의대 증원'이었다는 점을 들어 문제의 본질을 피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자, 조 장관은 "의대정원에 대해서도
합리적 대안을 (의료계가) 갖고 오면 제로베이스(원점)에서 검토하겠다고 몇 번 말씀드렸다. 다만 2025년도는 입시 절차가 상당 부분 진행돼 사실상 감축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과반=의료계' 내세운 의사추계委…"증원 발표 前엔 왜 못했나"
그러자, 곧바로 지난달 말 정부가 연내 구성계획을 밝힌 '의료인력수급추계위원회'가 도마에 올랐다.
위원 과반수(13명 중 7명)를 의사단체 추천인사로 채우겠다며 '의료계 의견 적극 수렴'을 강조하고 있으나,
정부가 대규모 증원 전에는 왜 진즉 이러한 시스템을 도입하지 않았느냐는 문제의식이다.
조 장관은 이에 대해 "2천 명(증원)을 결정할 때도 (앞으로) 추계위에서 하려는 것처럼 전문가 의견을 듣고 보정심(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을 통해 확정했다. 당시 한 것(절차)을 보완해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것"이라며 "다만 의료계에선 정부 결정이 비과학적이라고 하니 2026년에는 (증원 여부 등) 검토가 가능하다는 취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당초의 결정이 성급했다는 인상만 높인 꼴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의대 증원에 찬성해온 임상 의사이자 시민단체 정책위원장으로 활동 중인 정형준 원진녹색병원 부원장은 지난 8일 국감 참고인으로 출석해
"지금 와서 추계위를 만든다는 뜻은 정부의 증원안 자체가 문제가 많았다는 점을 스스로 얘기(인정)하는 것"이라며 "이를 '원점 재검토' 수준에서, 전공의들을 설득해 복귀시키고 다시 (의대 정원을) 논의한다는 전제가 없다면 이들이 과연 돌아올까"라고 반문했다.
그는 "더 끔찍한 일은 전공의가 돌아오더라도 '필수진료과'의 전공의까지 돌아올 것인가(인데), 저는 이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될 거라 본다"고 부연했다.
"전공의참여 없인 전환점 없다"는데…빛바랜 사과에 사퇴 '일축'
개혁신당 이주영 의원이 7일 오후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의 보건복지부, 질병관리청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전공의·의대생들이 보건복지부에 하고 싶은 말이 적힌 메모지를 공개하고 있다. 황진환 기자결국 정부의 '근본적 태도 변화' 없이는 내년 3월이 돼도 전공의·의대생이 돌아올 거란 보장이 없다는 게 의료계의 중론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학병원 교수는 여야의정 협의체 등을 두고 "독배(毒杯)"라고 정의하며, 전공의 등이 참여의사를 밝히지 않는 이상 변화의 전기(轉機)는 없을 거라고 내다봤다.
아무런 물밑 접촉 없이 "전공의 복귀를 위해 (의료계와) 협상한다는 생각 자체가 논리적으로 어불성설"이란 의견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최근 '의대 5년제' 논란으로 곤욕까지 치른 정부가 정책 추진과정에서 무리수가 있었음을 시인하고 장·차관이 책임지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책 추진 의도와 달리 국민 피해를 야기한 점에 더해 의·정 간 신뢰가 바닥임을 감안하면 정부가 자세를 더 낮춰야 한다는 주문이다. 조 장관과, 앞선 강경발언들로 의료계의 타깃이 된 박민수 제2차관을 경질해야 한다는 주장은 의료계에서 지속적으로 내건 대화의 선결조건이기도 했다. 조 장관은 지난달 30일 "전공의를 생각하면 매우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라고 사태 이후 처음으로 공개석상에서 사과했지만,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이 직후 언론인터뷰에서 "저희가 (증원)정책을 잘못했다거나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게 아니라 현 상황이 굉장히 안타깝다는 하나의 심정을 표현한 것"일 뿐이라고 의미를 축소했다.
박 차관도 국감 당시 '용퇴가 의료대란 해결의 출발점'이란 야당의 잇따른 공격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면서도 "직분을 맡은 이상 직무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사직 전공의 출신인 의협 기획이사는 역시 국감장에서 "그냥 너희들 (병원) 밖에 나와있어서 안타깝고 미안하다고 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하는 얘길 듣고 이젠 많이 체념했다"고 토로했다.
이처럼 속수무책의 체념만 더 깊어지는 가운데, 해법을 못 찾는 복지부 수장의 거취 결단이 사실상 유일한 돌파구일 수 있다는 주장에 갈수록 힘이 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