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세계유산 등재된 日사도광산, 조선인 '강제노동' 흔적을 찾아서

핵심요약

니가타현 사도섬 아이카와, 세계유산 등재로 축제 분위기
사도광산 소다유 갱도…마네킹으로 당시 열악하고 힘든 채광 현장 묘사
사도광산 도유 갱도, 조선인 관련 설명은 단 2줄 뿐
조선인 전시 '강제' 대신 열악하고 위험한 일에 종사했다고 설명
현지 관광객 "유적 설명을 전시실에 둔 것이 아니라 외딴 오두막에 둔 격"

사도광산 도유 갱도 외부 뷰 포인트에서 바라본 도유노와리토(道遊の割戸) 모습. 최원철 기자사도광산 도유 갱도 외부 뷰 포인트에서 바라본 도유노와리토(道遊の割戸) 모습. 최원철 기자
제79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때아닌 역사 논쟁이 한창이다. 1년 전 윤석열 대통령의 '공산 전체주의' 발언 이후 벌어진 홍범도 장군의 흉상 철거 논란은 끝내 역풍을 맞고 중단됐다. 이번에는 일본 제국주의 강제동원의 상징인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가 시발점이 됐다. 외교 참사 의혹은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취임과 맞물려 역사 왜곡 논쟁으로 번졌다.
일본 정부는 지난달 27일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등재 당시 조선인 노동의 강제성을 설명할 수 있는 '포괄적인 전시'를 약속했다. 그 후 일주일 만인 지난 7일 일본 니가타현 사도섬 아이카와 지역을 찾았다.

세계유산 등재로 축제분위기인 니가타와 사도섬

사도광산 세계유산에 등재 홍보 깃발. 최원철 기자사도광산 세계유산에 등재 홍보 깃발. 최원철 기자
니가타항에서 사도섬 료츠항으로 가는 배를 타기위해 대기중인 탑승객행렬. 최원철 기자니가타항에서 사도섬 료츠항으로 가는 배를 타기위해 대기중인 탑승객 행렬. 최원철 기자
도쿄에서 서북부 방향 신칸센으로 2시간 가량 달려 도착한 니가타시. 이곳에서 '사도기선' 크루즈 유람선으로 2시간 반가량(쾌속선 1시간가량)을 가면 사도섬 료츠향(兩津港)에 닿는다. 사도가네야마(佐渡金山)로 불리는 사도광산이 위치한 아이카와 지역은 이 료츠항에서 버스로 1시간을 더 가야 한다.
사도섬과 항구에서 보이는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홍보물들. 최원철 기자사도섬과 항구에서 보이는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홍보물들. 최원철 기자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홍보물들. 최원철 기자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홍보물들. 최원철 기자
도쿄에서 아이카와 지역까지 이동하는 동안 세계유산 등재를 축하하는 현수막과 포스터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관공서와 터미널은 물론 유람선까지 홍보물로 장식돼 있었다. 마치 축제 분위기 같았다.  
니가타항에서 사도섬으로 향하는 사도기선 예약현황. 토요일부터 연휴가 시작되는 이유에선지 새벽 증편에도 상당부분이 만석이다. 최원철 기자니가타항에서 사도섬으로 향하는 사도기선 예약현황. 연휴가 시작되는 토요일부터는 벌써 대부분 만석이었다. 최원철 기자
일본 최대 명절 중 하나인 '오봉(お盆)' 연휴(13~16일)를 앞둔 데다 12일이 대체휴일로 지정되면서 일본인 관광객들까지 몰려 사도행 배편은 혼잡했다. 주말을 며칠 앞두고 있었는데도 금요일 오후부터는 대부분 매진된 상태였다.

사도섬에서 '금·은'을 채굴한 곳은 총 3곳

왼쪽부터 사도광산, 츠루코 은산, 니시미카와 사금산. 최원철 기자왼쪽부터 사도광산, 츠루코 은산, 니시미카와 사금산. 최원철 기자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등재 홍보는 크게 사도광산, 아이카와 향토박물관, 아이카와 관광안내소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아이카와 시내 관광안내소에서는 세계유산 등재 기념 가이드 투어를 안내하고 있었는데 사도광산 인근에 위치한 츠루코 은산(鶴子銀山)과 니시미카와 사금산(西三川砂金山) 투어 코스를 내세우고 있었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사도광산 투어는 현장에서 자체적으로 투어를 모집하고 진행한다. 왜 사도광산이 아닌 다른 곳을 세계유산 투어로 안내하냐는 질문에 안내소 측은 "실제 사도섬의 금·은산 투어는 3가지다. 폐광된 지역을 둘러보는 츠루코 코스와 냇물에서 사금을 채취하는 니시미카와 코스, 그리고 대대적으로 금광을 채굴했던 사도광산 내부를 탐방하는 코스로 구성돼 있다. 사도광산은 현지에서 상시적으로 운영하고, 다른 두 코스는 관광안내소에서 일시적으로 8월까지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고 답했다.
츠루코 은산에 대해 가이드가 설명하는 모습. 최원철 기자츠루코 은산에 대해 가이드가 설명하는 모습. 최원철 기자
츠루코 은산은 적은 매장량에 따른 수지 문제로 채굴이 중지되고 폐광된 상태다. 니시미카와 지역과 더불어 조선인의 노동이 있지 않았냐는 기자의 질문에 가이드는 "가능성이 '0'은 아니지만 근무자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며 "츠루코와 니시미카와보단 사도금산에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사도광산이 사도금산과 동의어로 인식되는 것은 에도시대부터 최대 규모로 채광 작업이 진행된 광산이고 아이카와 지역이 거대한 금 제련 시설로 구축돼 대부분의 주민들이 사도금산 작업자로서 종사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강제동원된 조선인들도 이곳에서 채광 노역부로 배치됐을 가능성이 크다.

강제동원 조선인들의 애환이 묻어있는 사도광산

대다수의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이 노역한 곳. 사도광산은 아이카와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다. 관광안내소에서 출발하는 무료버스가 있지만 배차간격이 길어서 놓쳤을 경우 근처에 있는 버스터미널에서 유료버스를 타고 갈 수 있다. 배차 간격이 좀 있지만 무료버스와 유료버스가 번갈아 있는 편이라 체감으로는 크게 길지 않은 수준이다.
사도광산 갱도 입구. 최원철 기자사도광산 갱도 입구. 최원철 기자
시내에서 사도광산까지는 버스로 약 10분 정도 걸렸다. 버스에서 하차하면 사도광산 갱도 입구가 보이는데 35도가 넘는 더위였지만 갱도 내 한기로 입구 주변은 서늘했다. 사도광산 내 일반인에게 상시 공개된 갱도는 두 곳으로 에도시대 채광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한 소다유(宗太夫)갱도와 메이지(明治) 시대 이후 사용된 도유(道遊)갱도가 있다.
사도광산 소다유 갱도 입구. 최원철 기자사도광산 소다유 갱도 입구. 최원철 기자
안내 관계자는 "두 갱도의 성격이 다르다"며 "마네킹을 사용해 고퀄리티로 사도광산의 채굴과정을 소개하는 소다유 갱도를 먼저 관람한 후 메이지시대 철로와 기계의 도움으로 실제 채광이 이뤄진 도유 갱도를 관람할 것"을 추천했다.
안내원의 추천에 따라 먼저 소다유 갱도를 탐방했다. 우선 계단이 상당히 많은데 좁은 갱도에서 계단을 오르내리자 곳곳에 에도시대 사람들이 채광·광석 운반을 하는 모습을 마네킹으로 실감나게 재연해 놓은 걸 볼 수 있었다.
사도광산 소다유 갱도 내 에도시대 채굴 현장 모습. 최원철 기자 사도광산 소다유 갱도 내 에도시대 채굴 현장 모습. 최원철 기자 
곡괭이로 굴을 파고 손으로 흙을 퍼내며 물로 불순물을 흘려내린 끝에 금을 추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마네킹이 움직이면서 사람처럼 말을 해 순간 깜짝 놀라기도 했다. 그것도 잠시, 광산 내부의 좁은 홀에서 채광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의 노역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도광산 소다유 갱도 내부 계단(왼쪽), 에도시대 채광 현장을 마네킹으로 전시한 모습. 최원철 기자사도광산 소다유 갱도 내부 계단(왼쪽), 에도시대 채광 현장을 마네킹으로 전시한 모습. 최원철 기자
일제강점기보다 오래전인 에도시대의 모습이지만 최전선에서 금맥을 찾고 채광하는 위험한 업무에 배치됐을 가능성이 높은 만큼 마네킹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됐다. 십여 곳의 마네킹 전시 끝에 채광한 광물을 제련해 금으로 만드는 과정이 설명된 곳을 지나면 소다유 갱도 전시는 막을 내린다.
사도광산 도유 갱도 내부의 모습. 바닥에 철로가 설치돼 있다. 최원철 기자사도광산 도유 갱도 내부의 모습. 바닥에 철로가 설치돼 있다. 최원철 기자
사도광산 도유 갱도 내부의 모습. 최원철 기자사도광산 도유 갱도 내부의 모습. 최원철 기자
이윽고 기다리던 도유 갱도의 차례다. 이 루트에 주목한 이유는 메이지 시대 이후 조성된 갱도로 근대화 기술이 적용된 갱도이자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이 실제로 근무한 것으로 추정되는 환경을 엿볼 수 있고 실제 조선인에 대한 설명이 포함된 루트라고 안내를 받아서다.
사도광산 도유 갱도 내부에 당시 사용했던 광석 운반 열차가 전시돼 있다. 최원철 기자사도광산 도유 갱도 내부에 당시 사용했던 광석 운반 열차가 전시돼 있다. 최원철 기자
사도광산 도유 갱도의 출구. 최원철 기자사도광산 도유 갱도의 출구. 최원철 기자
도유 갱도는 내부에 철길이 설치돼 있고 이 길을 따라 운행한 광물 운반 열차와 더불어 노동자들이 사용한 각종 기계들이 전시돼 있다.
도유 갱도에서 외부로 나와 볼 수 있는 에도시대 수공업 채굴의 대표현장인 도유노와리토(道遊の割戸). 최원철 기자도유 갱도에서 외부로 나와 볼 수 있는 에도시대 수공업 채굴의 대표현장인 도유노와리토(道遊の割戸). 최원철 기자
화룡점정은 사도광산의 상징이자 에도시대 수공업 채굴의 대표현장인 도유노와리토(道遊の割戸)다. 'V(브이)'자형 봉우리 가운데 거대한 갱도 입구가 있어 사도광산의 마스코트로 알려져 있다. 이후에는 채광에 사용한 기계들을 전시한 공간과 함께 도유갱도를 안내하는 전시실을 관람할 수 있는데 안내원의 말에 따르면 이 곳에 조선인에 대한 정보가 있다고 한다.
근대화된 채광방법부터 실제 채광된 광물에 대한 설명까지 전시실 벽면을 빼곡히 담아낸 글자를 모두 읽었지만 '조선'이라는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다급함을 넘어 절박한 마음으로 마지막 연대 표기를 보면서 '조선(朝鮮)' 글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도광산 전시실에 명시된 조선이 관련 자료 문구. 딱 2줄만 명시돼 있었다. 최원철 기자사도광산 전시실에 명시된 조선 관련 자료 문구. 딱 2줄만 명시돼 있었다. 최원철 기자
昭和十四年 / 労務動員計画で朝鮮人労働者の日本への募集始まる 。
['쇼와 14년(1939년) 노동동원계획으로 조선인 노동자의 일본 동원을 시작']
昭和 二十年 九月 / 敗戦により朝鮮人労働者が帰朝 。
['쇼와 20년(1945년) 9월 패전에 따라 조선인 노동자가 귀조(帰朝, 조선으로 돌아갔다)']
혹시 다른 곳에도 전시됐는데 지나쳤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안내 관계자에게 재차 확인했지만 '이것이 전부'라는 말이 돌아왔다. 조선인 관련 추가 설명은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 전시돼 있다고 안내할 뿐이었다.
사도광산 도유 갱도 외부에 당시 광물을 싣고 나르던 열차가 전시돼 있다. 최원철 기자사도광산 도유 갱도 외부에 당시 광물을 싣고 나르던 열차가 전시돼 있다. 최원철 기자
도유갱도에서 조선인 관련 정보를 찾아 돌아다닌 사람은 비단 취재진만은 아니었다. 세계유산 등재 기사를 보고 호기심으로 방문한 한국인 커플도 조선인 관련 표기를 찾다가 우연히 기자와 마주쳤고 안내 관계자의 답변을 듣고선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관광객이 사도광산을 보려고 오지, 향토박물관까지 조선인 설명을 보러 갈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냐"며 "이런 상황은 유적 설명을 전시실에 둔 것이 아니라 외딴 오두막에 둔 격"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 전시물을 보러 가겠냐는 기자의 질문에 "버스가 끊겨서 아쉽지만 내일 다시 가서 볼 것"이라고 했다.
교통수단이 부족한 사도광산. 택시 승강장이 텅 비어 있다. 최원철 기자교통수단이 부족한 사도광산. 택시 승강장이 텅 비어 있다. 최원철 기자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설명이 있다는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은 접근성 논란이 있었다. 사도광산에서 약 2km 떨어진 위치에 있는 이 박물관을 가는 버스는 하루 8편이다. 오후 2시 50분에 출발하는 막차를 놓치면 택시를 타거나 걸어가야 한다. 게다가 이 지역에서 택시는 전세가 아니면 탑승 1시간 전에 콜택시를 불러야 하는데 5분 거리의 운행을 위해 1시간 동안 달려와야 하는 사정 때문에 사실상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
렌트카를 하고 여행을 하는 관광객의 경우는 예외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여행객의 경우 방문하려면 시간 계산을 잘 해야 한다. 이 모든 사항을 고려하고 박물관을 찾아갈 관광객은 한국인을 제외하면 과연 얼마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인적 드문 아이카와 향토박물관, 조선인 관련 설명은 충분했나?

아이카와 향토박물관 정문. 최원철 기자 아이카와 향토박물관 정문. 최원철 기자 
언덕길을 30여 분 걸어 도착한 아이카와 향토박물관. 시골 분교를 떠올리게 하는 아담한 단층건물과 복층건물 등 총 3개의 건물이 연결된 구조인 이곳에는 사도광산의 역사, 유물, 기록 등 여러가지 내용이 전시돼 있다.
아이카와 향토박물관 전시실 지도(왼쪽), D전시실로 가는 안내판. 최원철 기자아이카와 향토박물관 전시실 지도(왼쪽), D전시실로 가는 안내판. 최원철 기자
아이카와 향토박물관 D전시실 '조선반도 출신자를 포함한 광산노동자들의 생활(朝鮮半島出身者を含む鉱山労働者の暮らし)' 전경. 최원철 기자아이카와 향토박물관 D전시실 '조선반도 출신자를 포함한 광산노동자들의 생활(朝鮮半島出身者を含む鉱山労働者の暮らし)' 전경. 최원철 기자
A부터 E까지 크게 5가지의 주제로 나뉘어 있는데 일본 정부에서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등재 이후인 지난달 28일부터 공개한 조선인 관련 전시는 박물관 맨 끝 건물 2층에 위치한 D전시실에 조성돼 있었다. 하나의 전시실을 모두 사용하는 이 전시의 이름은 '조선반도 출신자를 포함한 광산노동자들의 생활(朝鮮半島出身者を含む鉱山労働者の暮らし)'이다.
박물관으로부터 촬영 동의를 얻어 새로 전시되고 있는 조선인 관련 내용을 사진으로 전한다.
아이카와 향토박물관 D전시실의 '조선반도 출신자를 포함한 광산노동자들의 생활(朝鮮半島出身者を含む鉱山労働者の暮らし)'(왼쪽), 사도광산에서 노역했던 조선인을 포함한 광부들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도시락 통. 최원철 기자아이카와 향토박물관 D전시실의 '조선반도 출신자를 포함한 광산노동자들의 생활(朝鮮半島出身者を含む鉱山労働者の暮らし)'(왼쪽), 사도광산에서 노역했던 조선인을 포함한 광부들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도시락 통. 최원철 기자

광산에서 사용한 도시락 통

  • 자료 설명

    쇼와 10~20년대에 사용하던 것. 다이쿠거리의 공동취사장에서 음식을 받아 광산에 출근했다.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 전시된 조선인 관련 자료. 최원철 기자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 전시된 조선인 관련 자료. 최원철 기자

한반도 출신들을 포함한 노동자들의 출신지

  • 본문

    에도시대가 끝난 1868년 이후, 국내외에서 다양한 노동자들이 와서 사도광산에서 일했다. 전시 중 사도광산의 한반도 출신 노동자 총수는 약 1500명이었다고 기록하는 문서가 있다.

    에도시대가 끝난 1868년 이후, 사도광산에는 외국인 지도자나 기술자에 의해 서양의 최첨단 기계화 기술이 도입되었다. 영국, 미국, 독일로부터 광석 처리, 공학, 개갱, .채굴 등 다양한 전문지식을 들여왔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또, 1890년 1월 현재 광부·광산 관계자는 1885명으로, 그 중 약 1천 명은 사도 섬 이외의 일본 각지에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노동자의 출신지에 대해서는 주로 다이쇼기 문헌에서 작성된 리스트를 바탕으로 상위 5위까지의 노동자 수와 출신지를 보면, 나가노(184명), 니가타(165명), 사도(96명), 이시카와(71명), 도야마(52명), 혼슈 이외의 출신자로는 조선이 21명으로 되어 있다.

    전시 중 국가총동원법이 1938년 4월 공포되었고, 이 법에 의거한 국민징용령이 이듬해 7월에 시행되었는데, 1939년 9월 '모집'이 1942년 2월 '관아 주선'이, 1944년 9월 '징용'이 한반도에 도입됐다. '모집'은 민간 고용자의 책임 하에 일본이 한반도에 설치한 행정기관인 조선총독부의 인허가를 받은 후에 노동자를 채용하는 구조다. '관아 주선'은 조선총독부가 민간 고용자의 신청을 받은 뒤, 지방정부를 통해 실시됐다. '징용'은 법령에 근거해, 노동자에게 업무를 의무화 하여, 위반에 대해서는 징역 또는 벌금이 부과됐다.

    1940년부터 1945년 종전까지, 사도광산의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 총수는 1519명이었다고 기록하는 문서가 있다. 또, 1140명분의 한반도 출신 노동자에게 미지급된 임금이 공탁되었음을 보여주는 문서도 있다. (귀국 조선인에 대한 미지급 임금채무 등에 관한 조사에 대하여'에서)

    *자료 설명
    '귀국 조선인에 대한 체불 임금 채무 등에 관한 조사에 대하여'
    1950년 10월 31일 니가타 노동기준국장에서 노동성 노동기준국장에게 보낸 문서
    국립공문서관 소장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 전시된 조선인 관련 자료. 최원철 기자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 전시된 조선인 관련 자료. 최원철 기자

아이카와(相川)의 광산 노동자들의 생활

  • 본문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들이 살던 기숙사에 대해 기록이 남아 있다.

    아이카와(相川)의 광산 노동자 생활을 설명하는 몇 가지 문서가 있다.

    전후, 아이카와의 담배점에서 발견된 담배 배급 대장에는, 제1상애과(기숙사명), 제3상애과와 제4상애과에 살던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들의 명단이 있고, 여기서 노동자에게 담배 배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45년 6월 20일의 기록에 따르면, 제3상애과에 살고 있던 7명이 도주해, 3명이 형무소에 들어간 사실을 알 수 있다.('담배 배급 대장'에서)

    또한, 광산노동자에게 음식을 제공하던 공동취사장 자리도 남아 있다.

    *자료설명
    사진 왼쪽 아래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담배 배급 대장', 공동취사장 터, 제1상애과(당시) (주식회사 골든사도 자료)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 전시된 조선인 관련 자료. 최원철 기자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 전시된 조선인 관련 자료. 최원철 기자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 전시된 '한반도 출신을 포함한 노동자들의 전쟁 중 가혹한 노동 환경' 내 자료 번역본. 최원철 기자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 전시된 '한반도 출신을 포함한 노동자들의 전쟁 중 가혹한 노동 환경' 내 자료 번역본. 최원철 기자

한반도 출신을 포함한 노동자들의 전쟁 중 가혹한 노동 환경

  • 본문

    사도광산에서 일한 한반도 출신 노동자들은 삭암, 지주, 운반 등의 위험한 갱도 내 작업에 종사한 사람의 비율이 높았음을 표시한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노동조건을 놓고 행해진 노동쟁의에 관한 기록이나 사망사고의 기록이 남아있다.

    사도광산이 당시 작성한 자료에 따르면,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는, 내지 출신자에 비해 '착암'(발차용에 사용하는 화약을 채우기 위해 착암기로 암반이나 광맥에 구멍을 뚫는 작업), '지주'(갱도내에 붕괴나 낙석 위험이 있는 장소에 안전대책으로 나무를 짜고 보강하는 작업), '운반'(채굴한 광석을 인력으로 운반하는 작업)과 같은 위험한 갱도 내작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비율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오른쪽 표 참조).

    노동조건에 대해서는, 조선반도 출신자에게 있어, 어느 한 달의 평균 가동일수는 28일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반도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보고'에서)

    이입(移入) 당시에는 1인 1일 쌀 1되 정도를 보통으로 하고 있었지만 서서히 양을 줄이고, 특히 배급미를 실시후에는 모듬밥을 하고, 배급미가 특히 부족한 경우에는 고구마, 무, 건면 등의 혼식으로 부족 분을 맞춘 것으로 여겨진다.

    1940년 2월 대우개선을 요구하는 조선반도 노동자들에 의한 노동쟁의가 일어났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특고월보(쇼와 15년 3월분)'에서

    1941년 12월 20일, 조선반도 출신 갱부 1명 외 2명이 갱도 내 사다리 가설작업소에 일하는도중 암석면에서 미끄러져 두개골 분쇄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 '특고월보(쇼와 17년 1월 분)'에서

    *자료 설명
    직종·출신별 노동자 수(1943년 5월말 현재)
    출처 : '사도광업소 반도노무관리 2부'(1943년) - 재일조선인사연구 제12호(1983년)

사도광업소 반도노무관리 2부(1943년). - 재일조선인사연구(在日朝鮮人史研究) 제12호(1983년)

사도광업소 반도노무관리 2부(1943년), 출처 : 재일조선인사연구(在日朝鮮人史研究) 제12호(1983년). 최원철 기자사도광업소 반도노무관리 2부(1943년), 출처 : 재일조선인사연구(在日朝鮮人史研究) 제12호(1983년). 최원철 기자
사도광업소 반도노무관리 2부(1943년), 출처 : 재일조선인사연구(在日朝鮮人史研究) 제12호(1983년). 최원철 기자사도광업소 반도노무관리 2부(1943년), 출처 : 재일조선인사연구(在日朝鮮人史研究) 제12호(1983년). 최원철 기자
사도광업소 반도노무관리 2부(1943년), 출처 : 재일조선인사연구(在日朝鮮人史研究) 제12호(1983년). 최원철 기자사도광업소 반도노무관리 2부(1943년), 출처 : 재일조선인사연구(在日朝鮮人史研究) 제12호(1983년). 최원철 기자
사도광업소 반도노무관리 2부(1943년), 출처 : 재일조선인사연구(在日朝鮮人史研究) 제12호(1983년). 최원철 기자사도광업소 반도노무관리 2부(1943년), 출처 : 재일조선인사연구(在日朝鮮人史研究) 제12호(1983년). 최원철 기자
사도광업소 반도노무관리 2부(1943년), 출처 : 재일조선인사연구(在日朝鮮人史研究) 제12호((1983년). 최원철 기자사도광업소 반도노무관리 2부(1943년), 출처 : 재일조선인사연구(在日朝鮮人史研究) 제12호((1983년). 최원철 기자
사도광업소 반도노무관리 2부(1943년), 출처 : 재일조선인사연구(在日朝鮮人史研究) 제12호(1983년). 최원철 기자사도광업소 반도노무관리 2부(1943년), 출처 : 재일조선인사연구(在日朝鮮人史研究) 제12호(1983년). 최원철 기자
사도광업소 반도노무관리 2부(1943년), 출처 : 재일조선인사연구(在日朝鮮人史研究) 제12호(1983년). 최원철 기자사도광업소 반도노무관리 2부(1943년), 출처 : 재일조선인사연구(在日朝鮮人史研究) 제12호(1983년). 최원철 기자
사도광업소 반도노무관리 2부(1943년), 출처 : 재일조선인사연구(在日朝鮮人史研究) 제12호(1983년). 최원철 기자사도광업소 반도노무관리 2부(1943년), 출처 : 재일조선인사연구(在日朝鮮人史研究) 제12호(1983년). 최원철 기자

반도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보고. 사단법인 일본광산협회(1940년) -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웹사이트소장

반도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보고, 사단법인 일본광산협회(1940년). 최원철 기자반도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보고, 사단법인 일본광산협회(1940년). 최원철 기자
반도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보고, 사단법인 일본광산협회(1940년). 최원철 기자반도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보고, 사단법인 일본광산협회(1940년). 최원철 기자
반도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보고, 사단법인 일본광산협회(1940년). 최원철 기자반도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보고, 사단법인 일본광산협회(1940년). 최원철 기자
반도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보고, 사단법인 일본광산협회(1940년). 최원철 기자반도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보고, 사단법인 일본광산협회(1940년). 최원철 기자

특고월보(쇼와 15년 3월) -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가고시마현립도서관 소장)

특고월보(쇼와 15년 3월) -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가고시마현립도서관 소장). 최원철 기자특고월보(쇼와 15년 3월) -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가고시마현립도서관 소장). 최원철 기자
특고월보(쇼와 15년 3월) -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가고시마현립도서관 소장). 최원철 기자특고월보(쇼와 15년 3월) -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가고시마현립도서관 소장). 최원철 기자

특고월보(쇼와 15년 3월)

  • 본문

    동상광산에는 전원을 수용하는 합숙소의 시설이 없어 40여명을 잠정적으로 광산직원이 경영하는 신보숙소에 수용하여 두었으나 장소청부제도이므로 수용상황이 불량해 항상 불만이 있어 2월 17일에 지숙자 40여명은 최재만을 대표로 개선을 요구하여 불온한 상황이었으나 광산측에서 이를 용인하여 즉시 해결하였다.

특고월보(쇼와 17년 1월),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가고시마현립도서관 소장)

특고월보(쇼와 17년 1월),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가고시마현립도서관 소장). 최원철 기자특고월보(쇼와 17년 1월),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가고시마현립도서관 소장). 최원철 기자
특고월보(쇼와 17년 1월),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가고시마현립도서관 소장). 최원철 기자특고월보(쇼와 17년 1월),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가고시마현립도서관 소장). 최원철 기자

특고월보(쇼와 17년 1월)

  • 본문

    니가타현 사도군 소재 미쓰비시 사도광업소 이주 조선인 노동자 광부 김성주환 외 2명이 갱도 내 사다리 설치 작업장에서 작업중 실수로 암석면에서 미끄러져 두개골이 분쇄돼 사망함.

한일 정상 공동 기자 회견에서의 기시다 후미오 내각총리대신의 모두발언 (2023년 5월 7일, 서울)

한일 정상 공동 기자 회견에서의 기시다 후미오 내각총리대신의 모두발언 (2023년 5월 7일, 서울). 최원철 기자한일 정상 공동 기자 회견에서의 기시다 후미오 내각총리대신의 모두발언 (2023년 5월 7일, 서울). 최원철 기자

한일 정상 공동 기자 회견에서의 기시다 후미오 내각총리대신의 모두발언

  • 본문

    "저 자신도 당시 어려운 환경 속에서 많은 분들이 매우 힘들고 슬픈 일을 겪은 것에 대해 가슴이 아픕니다. 한일 간에는 여러 가지 역사와 사연이 있지만,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온 선배들의 노력을 이어받아 미래를 향해 윤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 측과 협력해 나가는 것이 일본 총리로서 저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광산에서 노역한 조선인들이 살았던 위치를 표시한 지도

사도광산에서 노역한 조선인들이 살았던 위치를 표시한 지도. 최원철 기자 사도광산에서 노역한 조선인들이 살았던 위치를 표시한 지도. 최원철 기자 

조선인 자료 전시, 진정성 증명하려면 관광객이 많이 볼만한 곳에 설치해야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은 조선인의 강제동원 현장이었던 사도광산이나 시내 관광 안내소에서 다소 떨어져 있다. 사전에 조사를 하고 불편한 교통편 시간에 맞춰 일부러 찾지 않는다면 사실상 접근할 수 없는 곳이다.
그렇다면 방문객은 얼마나 있을까. 평일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기자가 오전, 오후 2회 방문한 동안 이곳을 찾은 관람객은 단 2명, 1팀 뿐이었다. 입장료 300엔(약 2800원)의 벽이 높았던 것일까.
아이카와 향토박물관. 최원철 기자아이카와 향토박물관. 최원철 기자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 소식에 흥미가 생겼다는 사토씨는 사도섬의 모든 전시를 보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세계유산 등재 시도를 한 끝에 결국 성공했기에 어떠한 노력이 있었는지와 얼마만큼 전시를 했는지 보기 위해서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향토박물관은 위치가 좋은 편이 아니다. (사도섬은) 교통 여건이 좋지 않기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관광객은 자료를 모두 보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이곳까지 올 것 같다"고 지적했다. 향토박물관 바로 옆에는 거대한 금 제련소가 있었다. 유적을 보기 위해 방문하는 사람들은 종종 있었지만 이들의 발걸음이 향토박물관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사토씨는 조선인 노동자가 살았던 거주지 지도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었다. "저도 조금 전 지도에 표기된 위치를 지나갔는데 집이 아닌 형무소가 된 곳도 있고 집터가 있기도 한다. 전시실을 둘러보고 나서 현장을 다시 확인하고 싶어도 아무런 표시도 없고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시간과 돈을 들여 전시 장소를 만들고 또 일반 대중이 그곳을 찾는 것은 기억해야 할 것을 새기고 잊지 않기 위해서다. 일본은 '조선인'을 특정하지 않은 채 '모든 노동자'를 위한 공간이라고 내세웠고, 우리 정부는 대외적으로 거짓말까지 하면서 이를 받아들였다. 이제 80년이 지난 일제 강제동원의 아픈 역사는 100년, 200년 뒤에도 계속 기억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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