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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B컷]동거녀 업체에 軍 정비 부품 몰아준 중령…충성심이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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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수사보다는 재판을, 법률가들의 자극적인 한 마디 보다 법정 안의 공기를 읽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드립니다. '법정B컷'은 매일 쏟아지는 'A컷' 기사에 다 담지 못한 법정의 장면을 생생히 전달하는 공간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중요한 재판, 모두가 주목하지만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재판의 하이라이트들을 충실히 보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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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함에서 날아오르는 헬기, 뉴스에서 한번쯤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바로 '링스 헬기'인데요, 우리 해군이 바다에서 잠수함을 잡을 때 동원되는 주력 무기입니다. 영국제이지만 창정비(항공기를 완전히 분해 후 복구하는 최상위 단계 정비)는 대한항공에서 하고요. 2016년 링스 헬기가 추락해 조종사 등 3명이 숨진 안타까운 사고도 있었던 만큼 창정비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투명한 절차에 따라 이뤄져야겠죠.

동거인으로 하여금 헬기 부품을 납품하는 업체를 만들게 하고 그 부품을 대한항공에 납품한 해군 중령 이모씨가 있습니다. 대한항공으로서는 군수 특기 장교인 이씨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고요. 자신의 지위를 앞세운 전형적인 범죄로 보입니다만, 이씨는 수사 단계에서부터 "군에 충성한다는 마음과 세금을 절약할 수 있다는 소명감에서 비롯한 일"이었다며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정말 신속한 전력화를 위한 충성심의 발로였을까요, 아니면 제3자를 내세운 교묘한 뇌물수수였을까요?


동거인이 軍정비 납품업체 차린 건 맞지만…"충성심이었다"


이씨는 항공병과 군수 특기 장교인 해군 중령으로, 2016년 12월부터 정비관리를 총괄하는 업무를 맡았습니다. 그런 그가 같은해 9월 카드론으로 2천만 원을 대출받습니다. 이 돈은 사실혼 관계인 동거인이 군용기 부품업체를 세우는 데 종잣돈으로 쓰였고, 이 업체는 영국의 링스 헬기 제조사로부터 독점 에이전트 지위를 부여받아 대한항공의 협력업체가 됐습니다. 중령의 동거인이 세운 부품업체는 2018년 2월부터 2019년 3월까지 10번에 걸쳐 대한항공에 65억 원 상당의 재생 부품을 납품합니다.

현역 중령의 동거인이 군용기 부품업체를 세웠다는 것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기 어렵습니다. 적어도 투철한 업무상 윤리의식이 있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군복 차림으로 법정에 선 피고인은 충성심과 소명의식에서 한 일이라며 시종일관 떳떳한 모습이었습니다.

2023. 11. 22 서울고법 1-1형사부 결심공판 中
검찰: 재산을 은닉한 범행 등에 비춰 피고인의 태도는 비난 가능성이 매우 크고 선처 요소를 찾을 수 없습니다. 피고인은 63억원대 국가 재정에 손해를 야기하는 부패범죄를 저질렀고, 1심 재판 종결부터 2심까지 반성 없이 실체적 진실을 은닉해 왔습니다. 공범인 동거인은 7억원을 호주로 도피시키고 (수사 당국에서) 호주 주택에 추징보전을 요청하자 즉시 매각해 은닉했습니다. 이같은 사정을 고려하셔서 법의 한도 내 중한 형을 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중령 측 변호인: 링스 헬기는 제작 업체 규모가 작고 그 부품을 제공하는 회사도 생산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링스 헬기를 운용하는 국가 입장에선 부품 수급이 너무 어렵습니다. 전력화된 항공기를 대체하는 데에만 수천억원이 넘는 비용이 들고 (해군은) 성능 개량 사업을 통해서 최대한 오래 사용하려고 합니다. 운용기간을 늘리기 위해서는 창정비를 통해서 부품을 제때 수급하고 수리해서 사용하는 수밖에 없고, 그 방법은 재생 정비품을 도입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해군과 방사청 모두 이 사업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국가에서 링스 헬기 대체품을 도입한다면 수천억원의 세금이 들어가기 때문에 피고인은 본인 업무이기도 하지만 군에 충성한다는 마음, 세금을 절약할 수 있다는 소명감에서 링스헬기 창정비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피고인(중령): 군 숙원사업에 저와 사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이 개입돼 오해가 쌓인 점을 반성하고 있으며, 이런 오해의 빌미가 될 일조차 생기지 않게 했어야 함에도 그러지 못한 탓에 형사 법정까지 서게 돼 누를 끼친 점에 대해 참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해군 장교로서 30년 간 근무하면서 국익과 해군의 발전을 위해, 맡은 소임을 완수하기 위해 누구보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고 자부합니다. 이 사건 공소사실 어느 항목에 관하여도 위법하다는 인식 하에 공모하거나 사심을 갖고 관여한 적은 단 한순간도 없습니다. 사적 이익을 목적으로 대한항공에 협력을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원심 판결의 오류를 바로잡아 억울함을 풀어주실 것을 간곡히 청합니다.

군용기를 사려면 천문학적인 비용이 드니, 최대한 오래 사용하기 위해 창정비 등 여러 과정을 거쳐 수명을 연장시킵니다. 이씨는 이런 관례를 활용해 재생정비품을 독점적으로 납품하는 계약을 영국 제조사와 맺고 대한항공에 협력업체로 등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추가 발주 안하면 계약 승인 안해준다…2심도 뇌물 대가성 인정


찝찝하긴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이씨가 뇌물을 받았다고 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한항공이 특정 계약을 따내기 위한 대가를 직접 지불한 건 아니니까요. 그런데도 1·2심 재판부는 왜 뇌물수수죄를 인정했을까요?

2023. 6. 13 중앙지역군사법원 판결 中
재판부: 피고인은 대한항공 군용기공장에 P-3C 해상초계기 창정비 비계획작업의 사후승인, 창정비 관급자재 지원 등 군용항공기 창정비 관련 업무처리 과정에서의 편의 제공에 대한 대가로 동거인이 설립한 회사로부터 직접 링스 헬기 재생부품을 구입해줄 것을 요구… 아무 방산업 영업 실적이 없는 동거인의 회사를 대한항공의 협력업체로 신규 등록하도록 하고… 총10회에 걸쳐 65억9천여만원 상당의 링스 헬기 재생부품을 구입하도록 하여… (중략)

이씨는 동거인의 업체가 협력업체로 선정되게끔 대한항공과 해군 사이 다른 계약을 놓고 승인해주지 않을 것처럼 압력을 가했습니다. 1차 발주가 나간 뒤에는 2·3차 발주 시기를 문의하면서 추가 발주가 이뤄지면 해상초계기 등에 대한 비계획작업 승인이 자동으로 된다는 식의 의사를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자신이 승인해주지 않으면 대한항공은 막대한 지연손해금을 물어야 한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고요. 전형적인 '갑질'이자 모종의 대가 관계가 성립한 겁니다.

2023. 12. 15 서울고법 1-1형사부 판결 中
이 사건과 같이 공무원이 관(官)으로부터 수주받는 민간정비업체를 압박하여 뇌물을 요구하는 구조에서는, 관과의 계약관계 유지, 계약상 편의제공 등 소극적이거나 현상유지적이고 추상적인 이익도 대가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대한항공 측이 해군으로부터 기존 정비계약의 관계를 현상 유지하는 자체로서 이미 대가성을 충족한다.

피고인은 재생정비품의 도입과 동거인 회사의 사급 자재 구매를 동일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했다. …(중략) 아랫사람을 통해 노골적으로 대한항공이 재생정비품을 구입하는 대가로 다른 비계획작업의 승인과 창정비 관련 자재 지원을 해주겠다는 취지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우리 대법원은 '직무'에 관한 것만으로도 뇌물죄는 성립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해상초계기 창정비 계약을 노리고 뇌물을 주고받은 것은 아니지만, 링스 헬기 부품 구매를 강요해 다른 계약을 유지하는 방식 역시 뇌물에 해당하는 거죠.

그런 데다 이씨의 범죄는 그저 비슷한 부품을 대한항공에 강매만 한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대한항공 입장에서는 창정비에 꼭 필요한 부품도 아니었고 더 싼 가격에 다른 회사에서 부품을 살 수도 있었거든요. 이에 대한항공에서는 훨씬 더 저렴한 가격으로 견적서를 준 업체도 있으니 명분 확보를 위해 회의록 작성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씨는 '표준단가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격이다. 신뢰하기 어렵다'며 회의록 작성을 거부했습니다. 기록을 남기면 향후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으니까요. 스스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증거를 남기지 않는 치밀함을 보였던 이씨. 항소심 법원은 이런 이씨의 치밀함을 질타하면서 징역 5년형을 유지했습니다.

2023. 12. 15 서울고법 1-1형사부 판결 中
뇌물죄는 직무수행의 공정성 및 불가매수성과 이에 대한 사회의 신뢰를 훼손한 범죄로서 엄하게 처벌할 필요성이 있다. 피고인은 계획적으로 해군의 중요 전력인 링스 헬기의 신속한 전력화라는 명분을 앞세워 자신의 지위를 이용, 해군과 거래하는 대한항공으로 하여금 자신의 내연녀가 대표로 있는 회사의 물품을 구매하게 하였고… (중략) 범행의 단서를 남기지 않기 위해 문서 작성을 최대한 회피했다. 또 피고인은 링스헬기의 정비는 사고발생시 조종사의 생명과 직결되는 아주 중요한 문제임에도 이 사건 범행을 저질렀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고인은 수사 단계에서부터 이 법정에 이르기까지 이 사건 범행이 국가를 위한 헌신이었다는 설득력 없는 변명으로 일관하며 자신의 범행을 전혀 반성하지 않고 있다.

예산은 한정돼 있는데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부품을 그것도 높은 가격에 샀다면 그 피해는 어디로 갔을까요? 다행히 이번 거래 이후 보고된 링스 헬기 사고는 없지만 언제 어떤 형태로 그 피해가 드러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다만 "국익과 해군의 발전을 위해 30년 간 근무했다"는 이씨지만 조종사의 목숨을 담보로 동거인이 챙긴 돈은 국가 발전을 위해 쓰이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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