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지 기자#1. 7년 전 이맘때쯤이다. 뒤늦게 진로를 틀어 간호대에 진학한 친구는 졸업 후 임상 근무기한으로 '만 5년'을 잡았다고 말했다. 문·이과의 구분이 뚜렷한 한국에서 이 경계를 넘어서는 결정은 웬만해선 좀체 이뤄지지 않는다. 생애주기상 남들과 '다른 길'을 가는 데엔 개인적 동기 외 인사 담당자가 납득할 만한 설명이 따라붙어야 한다. 그 모든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뛰어든 현장 간호사의 유효기간을 왜 스스로 제한하는지 그때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
무연고 지역에서 꿋꿋이 실습과정을 버텨낸 그는 '간호사다운' 간호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수도권 소재 종합병원을 거쳐 입사한 '빅5'를 열망했던 이유다. ICU(Intensive Care Unit)라 불리는 중환자실 3교대를 하며 말수가 급격히 줄어든 그는 한동안 칩거했다. 퇴사 소식을 전해들은 건 두 계절이 지난 뒤였다. #2. 3년여 간 이어진 코로나19 비상대응이 일상회복으로 전환된 2023년은 수면 아래 가려졌던 수많은 보건복지 이슈가 분출한 해였다. 국민연금 개혁과 출생미신고 영아, 비대면 진료, 젊은층을 중심으로 대두된 정신건강 문제, 그리고 저출산·고령화 등. 어느 것 하나 심상한 사안이 없지만, 하나만 꼽는다면 단연 1년 내내 '현안'이었던 필수의료 붕괴다. 올 상반기 입법 직전까지 갔다가 대통령의 거부권으로 폐기된 간호법 사태부터 여전히 뜨거운 감자인 의대정원 확대까지, 모두 이 키워드를 빼고는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응급실 뺑뺑이', '소아과 오픈런' 등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국민이 있을까. 어떤 면에서든 이 문제의 당사자가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는 이도 드물 것이다. 올 1월 말 '필수의료 지원대책'을 시작으로 정부는 연이어 정책을 쏟아냈고, 구조적 문제를 조명한 관련 기사도 숱하게 양산됐다(연말정산을 하는 심정으로 올들어 기자가 '필수의료'를 직·간접적으로 다룬 기사를 세어보니 76개다). 그럼에도 말해야 할 것을 충분히 말하지 못했다는 자각이 한켠에 남아있었다. 이 부채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궁금했다. 창립 100주년을 맞은 대한간호협회(간협)의 초청으로 참여한 지난 18일 국회 세미나는 물음표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 되어줬다. 그간 필수의료 관련 논의는 연초부터 줄곧 매주 의(醫)-정(政) 협의를 이어온 의사단체 위주로 흘러왔다.
필수의료 현장을 지키는 '간호인력의 지속가능성'은 자연히 뒤로 밀려났다. 대한간호협회 서은영 이사(서울대 간호대 교수)는 전국 상급종합병원 및 종합병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결과를 토대로 '한국 간호 업무의 세분화 및 특정간호 분야별 전담간호사(가칭) 현황'을 발표했다. 이은지 기자한(韓)·일(日) 학술 세미나로 개최된 이날 행사의 목적은
'보건의료 패러다임 변화에 따른 전담간호사(가칭) 양성방안 모색'이었다. 국민 5명 중 1명이 노인인 초고령사회를 앞두고 '질 높은 간호' 수요가 커지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는 주제다.
고혈압·당뇨 같은 만성질환 관리부터 코로나 이후 중요성이 더 부각된 감염 예방 및 대응 등 간호사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영역도 많아지고 있다. 전담간호사는 특정 분야의 고도화된 '간호 서비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진료 보조 또는 부족한 전공의를 대체해온 PA(Physician Assistant) 업무와 근본적으로 구별된다.간협이 올 상반기 전국 상급종합병원 및 종합병원 163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도 17개 주요영역에서 전담간호사가 세분화된 특수 간호업무를 맡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규 간호사의 악명 높은 이직률을 줄여보자며 도입된
교육전담간호사 외 △감염관리전담간호사 △혈액투석전담간호사 △상처장루실금전담간호사 △에크모(ECMO·체외막산소공급장치) 전담간호사 △호흡기내과설명간호사 △응급실 전원 코디네이터 △채혈전담간호사(병동) △완화의료전담간호사 △항암교육전담간호사 △수술전후교육전담간호사 △영양집중지원팀전담간호사 △환자안전전담간호사 등 역할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교육전담간호사의 경우, 교육대상은 단순히 같은 간호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환자와 보호자에 대한 상담·교육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은 이들과 가장 가까운 의료진이 누구인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항암프로토콜, 수술전후관리교육지침 등을 만들어 환자들이 '병원 밖'에서도 건강한 삶을 이어갈 수 있게 지도하는 것 또한 이들의 몫이다.
설문에 응한 96곳의 병원이 전담간호사를 주로 배치한 분야는 교육(77곳), 감염(68곳), 신장·투석(60곳), 장기이식(55곳), 상처·장루·욕창 관리/호흡기/순환기(각각 54곳) 순이었다.
종합병원급 이상인 병원들은 평균 19.5개 유형의 전담간호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가장 많이 둔 곳은 49개에 달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간호법 재의요구에 반발해 지난 5월 19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규탄 집회에 모인 간호사들. 이은지 기자다만, 전담간호사에 대한 표준화된 교육이나 보상은 대체로 전무했다. 병원들은 전담간호사 선발시 '주로 경력을 고려'(41.6%)했고, 절반 가까이가 해당 인력에 대한 '보상이 전혀 없다'(43.6%)고 했다.
원내 전담간호사 교육도 60% 이상(전혀 없음 27.7%·소량 있으나 거의 없음 36.7%) 부재했다.
통일된 직함이 없다는 점도 이들의 취약한 위상을 보여준다.
어떤 병원에서는 이들을 'PA'라 칭했고, 또 다른 곳은 코디네이터라 불렀다. 간협 이사인 서울대 간호대 서은영 교수는 "이제는 환자들이 병원에 와서도 특별한 케어를 받길 기대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걸 우리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며
"병원별로 확보한 우수한 간호인력의 '개인기'에 맡겨진 케어라 보는 게 맞다"고 말했다.
한국보다 앞서 '인구 절벽'을 직면한 일본은 어떨까. 일본 정부(현 후생노동성)는 약 40년 전 '간호제도 검토회'를 꾸려 숙련간호사 양성에 일찌감치 착수했다.
"작금의 의료 고도화와 전문화, 건강에 대한 국민적 관심 고조" 등 변화된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전문간호부(사)를 양성할 필요가 있다는 검토회의 보고서가 나온 시점이 1987년이다.관련 논의는 1994년 전문간호사제가 출범한 후에도 계속됐다. 석사과정 수료가 요건인 전문간호사가 배출되려면 2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는데, 현장의 니즈(needs)를 채우려면 다른 패스트트랙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일본간호협회 키자와 아키요 상임이사는
"간호기술을 보유한 대상으로 수준 높은 간호를 실천할 수 있는 실무적 성격의 전문간호사(expert nurse) 육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는 6개월 이상의 교육기간·600시간 이상의 커리큘럼을 명시한 '인정간호사'의 탄생(1995)으로 이어졌다. 임상만으로 습득하기 어려운 특정행위에 대한 연수를 통해 관련 지식·기술을 익히고 그 분야의 '전담간호사'로 활동하는 것이다. △재택케어 △난임간호 △신부전간호 △치매간호 △피부·배설케어 등 20개 안팎의 영역별 교육과정은 의료현장·소비자의 요구를 반영해 지속적으로 보완되고 있다.
지난 18일 일본간호협회 키자와 아키요(Akiyo Kizawa) 상임이사 발제자료 중 일부. 간협 제공제도 운영은 일본간협으로 일원화돼 있다. 5년 이상의 실무(인정분야 3년 이상)를 거친 간호사는 협회로부터 인증받은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고, 인정 심사를 통해 인정간호사 자격을 얻는다.
지난해말 기준 2만 3천여 명의 인정간호사들은 병원, 방문간호스테이션, 클리닉·진료소 등 일본 곳곳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전문간호사와 인정간호사의 간호행위는 가산 수가를 받는다. 아직 노인전문간호사조차 요양기관 내 도뇨관 삽입, 소위 '콧줄'(L-tube)을 교체하는 행위가 불법인 한국과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다. 1명당 보는 환자 수가 10여 명에서 수십 명에 이르는 간호사들은 밥을 굶고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끼는 게 일상이다.
임상을 견디는 것도 벅찬데 '더 좋은' 간호사가 되기 위한 길 또한 오직 개인의 '노오력' 뿐이다. 서울의료원에서 일하는 김내연 당뇨교육 전담간호사는
"체계화된 교육과정이 없어 스스로의 판단으로 학회에서 분기별 연수·세미나에 참여했다. 시간을 따로 내기 위한 개인적 노력도 필요했다"고 말했다. 원내 필수교육을 제공받은 서울아산병원 감염관리센터 박민수 전담간호사도
"현재 교육만으로는 고위험 중증 감염병 환자에게 치료적 의사결정이 필요한 상황에서 심화되고 전문적인 간호를 제공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이쯤 되면 왜 국내 임상 간호사의 근속 연수는 타 직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낮은지, 입사 1년 이내 퇴사율은 왜 과반이나 되는지 짐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장롱 면허'인 유휴간호사(면허가 있지만 의료현장에서 근무하지 않는 간호사)는 12만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학 정원만 늘린다고 능사가 아닌 것은 의대나 간호대나 마찬가지다.
장기 근속과 지역 정착을 유도해야 하는 것은 비단 의사만이 아니다.
필수의료 문제는 의사와 간호사를 모두 아우르는 '팀(team)'의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 일본 당국은
인정간호사를 '팀 의료의 핵심멤버'라고 표현했다. 연수를 통해서는
"다양한 직종과 협력하여 적시에 적절하고 질 높은 간호를 제공하는 능력"을 키우겠다고 했다. 의사와 간호사를 수직적 관계로 간주해서는 나올 수 없는 인식이다. 간호사들의 업무 환경·교육체계가 '내·외·산·소(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지원율 등에 준하는 수준으로 언급됐는지를 돌아본다면 그 답은 십중팔구
'그렇지 않다'일 것이다.
전담간호사(제)는 사실 '상호 윈윈(win-win)'이다. 간호사는 전문인력으로서의 역량을 제고하고 직업 만족도를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또 병원은 의료서비스 경쟁력을 확보하고 환자 유치 우위에 설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고령화의 쓰나미와 언제 닥쳐올지 모를 '제2의 팬데믹'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임상 간호사의 전문성을 디테일하게 규정하고 관련 교육·인증을 정립한 표준 지침이 필요하지 않을까.대한간호협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