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일 파주시장(왼쪽)이 지난달 14일 DMZ 대성동 마을을 방문해 고엽제 피해 주민을 위로했다. 파주시 제공경기 파주시가 전국 지자체 중 처음으로 민간인을 고엽제 피해자로 공식 인정하고 내년부터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폐암, 방광암 등 각종 질환으로 고통받아 온 비무장지대(DMZ) 내 고엽제 살포 지역인 대성동마을 주민들은 57년 만에 보상과 지원을 받게 돼 오랜 한을 조금이나마 풀게 됐다.
정부, 그동안 군인과 군무원만 지원…대장동 주민 외면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에 위치한 대성동 마을은 1953년 정전 협정에 따라 군사정전위원회가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조성한 대한민국의 유일한 DMZ 내 민간인 마을이다.
미국 보훈부는 DMZ 지역에 고엽제를 살포한 사실을 인정했다. 미국 보훈부의 식물통감계획에 따라 140여 명의 주민들이 농사를 지어온 영농지역인 대성동 마을에 고엽제가 살포된 시기는 1967년 10월 9일부터 1971년 12월 31일까지다.
고엽제는 초목 및 잎사귀 등을 말라 죽게 하는 제초제로 독극물 성분이 포함돼 있어 인체나 동물 등에도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게 하는 위험물질로 분류돼 있다.
우리 정부는 1993년 피해 보상을 위한 관련 법령을 제정했으나, 지원 대상을 고엽제 살포 시기에 남방한계선 인접 지역에서 복무한 군인과 군무원으로 한정했다.
이에 따라 DMZ 인근에 거주하는 대성동 주민은 고엽제 후유증으로 인한 질환이나 사망에도 피해 지원을 받지 못했다.
대성동마을에 고엽제가 살포된 지 올해로 벌써 57년이 흘렀다. 주민들 대부분이 영문도 모른 채 폐암 등 각종 질환으로 고통받아 왔지만, 그 누구도 그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 정부도 마냥 책임을 외면해 왔다.
파주시는 지난 7월 14일 김진기 부시장 주재로 '파주시 고엽제 민간인 피해자 실태조사단 발대식'을 가졌다. 파주시 제공피해실태 조사단 구성…전례 없어 어려움 뒤따랐지만
파주시는 지난 5월 대성동 마을 민간인 고엽제 피해자 지원을 결정하고, 6월 말 마을 주민들과 함께 정치, 언론, 법조계 등 전문가 토론회를 통해 각계 의견을 수렴한 조례안을 마련해 입법 예고 절차에 들어갔다.
고엽제전우회 파주시지회도 성명서를 통해 "고엽제 피해자는 군인이나 민간인이나 동일하게 보호받고,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며 강력하게 지지했다.
파주시는 7월 14일 김진기 부시장 주재로 '파주시 고엽제 민간인 피해자 실태조사단 발대식'을 가졌다.
피해실태 조사단은 김진기 부시장을 비롯해 최유각·손형배 시의원, 추원오 경기도의원 파주병원장, 김기영 고엽제전우회 파주시지회장, 김동구 대성동 이장, 관계 부서 공무원 등 총 11명으로 구성됐다.
조사단은 유엔사의 협조로 대성동 마을 지역주민을 직접 방문해 현장 조사와 피해 사례 및 질환 유형 등에 대해 전수조사를 벌였다.
조사 대상은 대성동마을에 거주하는 51가구 141명 중 고엽제 살포 당시 이 지역에 거주한 사실이 없는 6가구 12명을 제외한 46가구 129명으로, 거주 시기, 질환 유형, 증상 등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뒀다.
전국적으로 민간인 고엽제 피해자에 대한 지원이 이루어진 전례가 없었던 만큼 적잖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피해자 실태조사를 위한 기초 자료를 확보하고 분석해 구체적인 조사 항목을 설정하는 일부터가 새로운 도전이었다. 피해자들이 앓고 있는 후유 질환과의 연관성을 파악하는 일은 의학 전문가들의 의견과 협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파주시는 국가보훈부가 1차에서 6차에 걸쳐 시행해 온 방대한 고엽제 피해 역학조사·연구자료를 일일이 확인해 가며 피해자 조사를 진행했다. 그밖에 피해의 경중을 구분하고, 이에 따라 합리적인 지원 체계를 수립하는 과정도 엄밀한 법적 판단을 요하는 일인 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고엽제전우회 파주시지회는 지난 5월 11일 보훈회관에서 고엽제 피해 민간인의 정부 지원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파주시 제공주민 85% 고엽제 후유 질환…주민 "관심과 노력 감사"
파주시는 대성동마을 민간인 피해 실태조사를 통해 고엽제 살포 당시에 거주한 주민 60명 중 85%인 51명이 당뇨병, 폐암 등 고엽제 후유 질환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고엽제 질환자 51명 중 중증질환자는 절반에 가까운 22명으로 파악됐다. 이들이 앓고 있는 질환으로는 당뇨병이 14명으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당뇨병은 2016년 정부가 발표한 고엽제 피해 5차 역학조사 결과에서 고엽제 고 노출군에서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사망 원인 중 하나다.
그 밖의 질환으로는 뇌경색이 4명이었다. 파킨슨, 피부암, 방광암, 간암 등은 각각 1명이었다.
또한 경증질환자는 고혈압과 고지혈증으로 25명, 치매, 심혈관계, 피부질환 각 1명 순으로 나타났으며 2세 피해자도 1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사망자의 경우 피해지원에는 해당하지 않으나, 정확한 실태 파악을 위해 살포 시기에 함께 거주했던 부모, 조부모 등 직계가족 구성원들에 대한 조사도 진행됐다. 그 결과 사망자 가족 구성원들 모두 평균수명보다 현저히 낮은 연령대에 폐암, 당뇨병, 뇌경색 등으로 사망했으며, 그 인원수가 39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엽제 피해 주민 김모씨는 지난달 14일 대성동 마을을 직접 방문한 김경일 파주시장에게 "많은 주민이 백혈병, 심장질환, 말초신경병 등 고엽제 후유의증으로 사망하거나 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다"면서 "파주시의 관심과 노력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파주시와 더불어민주당 박정 국회의원은 지난 6월 28일 장단면 통일촌 주민대피소에서 '고엽제 민간인 피해자 지원방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를 공동 개최했다. 파주시 제공지원 조례 제정…파주시장 "정부 차원 대책 마련해야"
파주시의 이번 실태 조사로 뒤늦게나마 그 피해의 실체가 밝혀지면서 고엽제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과 지원의 길도 비로소 열리게 됐다.
'파주시 고엽제 후유증 민간인 피해자에 대한 지원 조례'가 지난 8일 제정됨에 따라 민간인 고엽제 피해자에 대한 법적 지원이 가능해졌다.
파주시는 이번 조사 결과를 토대로 다음 달부터 피해 지원 신청접수를 시작해 12월 피해자 지원위원회의 심의․의결을 거쳐 각 피해자에 대한 지원 수준을 확정할 예정이다.
피해자들은 내년 1월부터 질환 증상별로 매월 10만 원에서 30만 원씩 지원받게 된다.
파주시는 이번 조례 제정으로 민간인 고엽제 피해자 지원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파주시 외의 지역에서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민간인 고엽제 피해자 지원을 위한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단초를 열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김경일 파주시장은 "피해자들이 고령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그간의 한을 풀어드리게 돼 가슴이 벅차다"며 "파주시가 물꼬를 열었으니 이제 정부 차원에서 관련법 개정 등을 통해 다른 지역에 있는 민간인 고엽제 피해자를 위한 대책을 마련해줬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대성동 마을 주민들이 정당한 피해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조례에 따라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며 "지역 국회의원들과 함께 관련법 개정이 이뤄지는 그날까지 민간인 고엽제 피해자들이 마땅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덧붙였다.
한편, 더불어민주당 박정 국회의원(파주을)은 지난 5월 과거사법 진실규명의 범위에 고엽제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부상·질병 등 피해를 추가하고 정부 차원에서 진실규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