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복지부 박민수 제2차관이 20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소아암 진료체계 구축방안 설명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은지 기자 #1. 생후 24개월 A양은 돌이 되기 전부터 급성혈소판 감소증으로 집 근처 충남대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낯빛이 창백하고 팔·다리가 아프다 했더니, 혈액검사 결과 신경모세포종 4기로 나왔다. A양의 부모는 가정 상황상 충남대병원에서 계속 치료받기를 원했지만 병원은 서울로의 전원을 권했다. 조혈모세포이식 환자를 전문의 한 명에게 전담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2. 초등학생 B(8)군은 지난 5월 양산부산대병원 응급실을 찾은 직후 급성 림프모구 백혈병을 진단받았다. B군의 부모는 며칠 만에 수도권 병원으로 옮기겠다고 했다. 응급실 초진 이후 병동 입원 시 회진, 진단에 이르기까지 단 한 명의 소아과 교수만을 볼 수 있었다는 이유다. 야간 당직의사가 어린이병원 전체를 맡느라 바쁘단 얘기를 듣고 보니, 아이를 계속 여기 둘 순 없겠구나 싶었다. 소아암은 만 18세 이하 소아청소년이 걸리는 중증질환이란 점에서 중첩된 필수의료의 특성을 띤다. 백혈병 등 혈액암 비중(전체 41%)이 높은 데다 진단 이후 완치까지 1~2년간 집중치료가 요구된다. 난이도가 높은 골수이식 등을 위해서는
전문의 중심의 진료체계가 필수인데, 인프라가 이미 붕괴 직전이라는 게 현장의 평가다.
전국적으로 70명이 채 안 되는 전문인력도 수도권에 쏠려있다 보니 지방 소아암 환자의 진료 공백은 더 심화되고 있다. 환자와 가족이 서울·경기 등 수도권 원정에 나서는 일이 비일비재한 이유다.
보건복지부는 이같은 진료공백을 해소하기 위해
소아암 지방 거점병원 5곳을 육성하겠다고 20일 밝혔다. 소아암 환자 및 가족이 거주지 인근에서 안정적으로 치료·회복 관리를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다.
복지부 제공소아암 발생률과 전문진료 자원 분포를 고려해 권역별로 선정된 의료기관들은
△충남대병원(대전·세종·충남·충북) △화순전남대병원(광주·전남·전북·제주) △칠곡경북대병원(대구·경북) △양산부산대병원(부산·울산·경남) △국립암센터(강원 등 취약지역) 등이다.
앞서 정부가 올 초 발표한 필수의료 대책 및 소아의료체계 개선대책의 일환으로 이뤄진 후속조치다. 당국은 지역별 맞춤형 진료체계 마련을 위해 관련 학회, 전문의 등과 지난달까지 5번에 걸쳐 의견수렴 절차를 진행했다.
복지부에 따르면,
국내 소아암 환자는 연간 1300명 정도 발생하고 있다(2020년 기준 1365명). 인구 10만 명당 발생률은 16.6명으로 전체 암(482.9명)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저출산과 학령기 인구 감소에 따라, 지속적인 하락세다. 다만,
진료 강도는 성인암 대비 3배에 이른다.
소아과 전공의가 최근 몇 년 새 30% 아래로 급감한 가운데 소아암 전문의도 전국적으로 69명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 중 절반에 가까운 30명이 50세 이상으로,
과반(43명)은 수도권에서 근무 중이다.
보건복지부 제공
화순전남대병원 소아혈액종양분과 백희조 교수는 "그 전에는 전공의 선생님들이 (야간·휴일 당직 등) 일을 많이 해주셨는데 이제 그때만큼은 아니고 또 지원이 없다는 게 큰 문제가 된다"며 "남아있는 의사들도 당직이 증가하고 시술 등 여러 일이 증가하며 인력 이탈의 위험이 굉장히 높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소아암 환자 진료체계는 거의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다. 진료체계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게 현 시점에선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거주 지역에서 환자들이
진단부터 치료, 사후 생존자 추적관리 및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체계가 만들어지고 적절한 인력 보강과 보상이 가능한 제도가 마련됐으면 좋겠다"고 부연했다.
이에 복지부는 권역 내 의료기관 중 정부가 지원하는 공공의료를 수행하며(지역암센터·어린이 공공전문진료센터 등) 소아암 진료 핵심기능을 아직 유지하고 있는 병원들을 추렸다.
세부내역만 확정되면 바로 시행할 수 있도록 기획단계부터 '톱다운(Top-Down)' 방식으로 대상 의료기관을 특정한 것이다.
정부는 각 거점병원에 적합한 시스템을 적용하기 위해 △병원 내 전담팀 진료체계 △지역 개방형 진료체계(협력 의료기관과 업무협약 체결) △취약지 지원체계 등 3가지 세부모형을 제시했다.
병원 내 전담팀을 두는 진료체계는 원내 소아혈액종양 전문의와 촉탁의, 타분과 소아과 전문의 협력 기반으로 구성된다. 화순전남대병원, 양산부산대병원, 충남대병원이 해당된다. 화순전남대병원에는 소아혈액종양 전문의 3명·촉탁의 1명 등 총 4명의 의사가 있는데, 촉탁의 2명을 더 뽑고 타분과 전문의 4명 등 총 10명으로 늘리겠다는 구상이다.
소아혈액종양 분과 전문의가 2명뿐인 양산부산대병원은 전문의 1명과 촉탁의 3명을 신규 채용하고 타분과 전문의 5명까지 11명이 팀을 꾸릴 계획이다. 충남대병원(현 전문의 1명·입원전담의 1명 등 총 2명)은 전문의 1명과 촉탁의 2명 등 3명을 추가로 채용하고 타분과 전문의 7명과 협력할 예정이다.
'병원 내 전담팀 진료체계' 모형. 복지부 제공'지역 개방형'은 해당 지역의 의료진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방식이다. 다른 병원 소속 소아혈액종양 전문의가 거점병원에서 소아암 진료에 참여하는 것이다. 소아혈액종양 전문의 1명·촉탁의 1명 등 2명이 소아암 진료를 맡고 있는 칠곡경북대병원이 대상이다.
칠곡경북대병원은 영남대병원·계명대병원·대구가톨릭대병원에서 근무 중인 전문의 3명과 소아혈액종양 수련 경험이 있는 전문의 4명 등을 지원받는 형식으로 진료 인프라를 개선하기로 했다.
관내 대학병원이 많은 지역적 특성을 살린 모델이다.
칠곡경북대병원 소아혈액종양과 김지윤 교수는 "소아혈액종양은 너무 중증도가 특수하고 응급실에 준하는 정도로 '24시간, 365일'을 상시 대기해야 하는 근무 조건"이라며 "위험도가 높아서
민원이나 여러 법률적인 문제, 심지어 구상권에 대한 위험에도 노출된다"고 말했다.
또 "그러다 보면 의료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도 되는 안타까운 현실"이라며 "기본적으로 경영적 측면에서는 상당히 적자가 예상되는 치료 부분인 만큼 국공립병원에서 이를 감당하는 것이 공공의료 차원에서 적절하다고 협의했다"고 설명했다.
'취약지 지원체계'는 경기권 거점인 국립암센터에 적용된다.
강원처럼 소아암 세부전문의가 없는 취약지 대학병원에 암센터 소속 전문의를 파견해 주 1~2회 외래진료를 맡기는 방식이다.
취약지병원 지원형(국립암센터-강원도내 대학병원) 모델. 복지부 제공
정부는 만약 환자가 1세 이하거나 장기이식 등 고난이도 중증 외과수술을 받아야 할 경우, 수도권 병원에서 수술 후 지역 거점병원과 연계해 항암 등 후속치료를 이어갈 방침이다.
현장 의료진은 언제라도 사직할지 모를 인력을 붙잡고
"심폐소생술(CPR)이 필요한(이준아 소아혈액종양학회 이사)" 소아암 진료체계를 살리려면 확실한 관련예산 확보가 절실하다고도 호소했다.
이준아 이사는 "수가 등의 문제 이전에 눈앞의 환자를 치료해야 하는데 혼자서 모든 걸 다 해야 하니,
당장 누구라도 치료를 도와줄 인력이 필요하고 '나마저 없어지면 이 환자는 어떻게 될까'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것"이라며
"당장 급한 건 인건비"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이번 대책으로 그간 장거리 치료에 뒤따랐던 부모의 경제활동 저해, 자녀(환아 형제) 양육의 어려움 등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예산 등을 확정짓는 대로 내년부터 시행한다는 계획이다.
복지부 김한숙 질병정책과장은 "전체 예산은
부처안으로 (기획재정부에) 93억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필요한 예산 확보를 위해 재정당국과 긴밀히 협의하겠다고 전했다.
박민수 복지부 제2차관은 "8~9월쯤 소아진료체계에 대한 추가대책을 발표할 텐데 보상체계 관련 내용이 될 것"이라며 "행위별 수가 외
사전보상이라든지 지역필수의료 가산제 등을 활용해 이런 분야 업무를 하시는 경우 추가적 보상을 해드리려 한다. 그렇게 되면 병원 입장에서도 (진료)기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 대비 수익 등이 많이 개선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