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마라토너. 희망의 아이콘. 마라톤 레전드. 철인. 국민 영웅. (이 같은 수식어는) 자연스레 한 사람을 향한다. 방향의 정점엔 지천명(知天命)을 훌쩍 넘긴 그가 여전히 우뚝 서 있다. 우리가 추억하는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53)다.
그의 마라톤 이력은 찬란하다. 공식 마라톤 대회 풀코스(42.195 Km) 41번 완주. 세계 최다 완주 횟수다. 반년마다 빠짐 없이 대회에 나간다 해도 20년 세월이다. 완주 총 거리 1729.995km. 두 다리로만 달린 거리라기에는 상상을 초월한다. 이 거리를 시속 17~ 20km의 속도로 달렸다. 훈련 등 비공식 완주까지 따지면 그의 다리는 인생 절반을 공중에 떠 있었다. 완주 횟수만으로도 이봉주는 '넘사벽'(비교의 대상이 되지 못함)이다.
대한민국 마라톤 기록도 이봉주를 빼놓고 논하기 어렵다. 새천년의 들뜸이 채 가라앉기 전인 2000년 2월, 전 국민은 대한해협을 건너온 낭보에 열광했다. 이봉주는 당시 도쿄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7분 20초의 한국 최고 기록을 수립했다. 2년 전 로테르담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자신이 세운 한국 최고 기록을 24초나 앞 당긴 쾌거였다. 운동 선수로 전성기를 넘긴 나이(30세)에 최고를 만들어냈다. 그가 희망의 아이콘이 된 이유다. 한국 신기록 3번에 빛나는 이봉주의 최고기록은 23년이 지난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이같은 이력은 그에게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 영예를 안겼다. 7개월 전 대한체육회 스포츠 영웅 선정위원회는 쟁쟁한 최종 후보자 4명(김수녕, 박항서, 이봉주, 고 최동원)을 심의한 끝에 이봉주를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으로 선정했다.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전한 점이 선정의 주된 이유였다.
완주의 가치, 등수보다 상위·늘 포기하지 않는 신조
2001년 열린 제 105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봉주. 이날 이봉주의 우승은 1947년 서윤복, 1951년 함기용에 이어 한국인으로서는 51년 만의 괘거였다. 이봉주 SNS 사진 캡처국민 영웅, 희망의 아이콘 이봉주. 그가 투병 중이다. 희귀병인 '근긴장이상증(Dystonia)'과 사투 중이다. '근긴장이상증'은 특정 근육이 멋대로 긴장·수축해 비정상적인 자세로 신체가 고정되는 질병이다. 강인함의 대명사였기에 투병 소식은 충격을 더했다. 국민적 안타까움이 응원의 목소리로 변한 지 오래다. 응원의 여론을 담아 경기도 수원 모처에서 이봉주를 만났다. 한눈에 봐도 허리가 심하게 굽어진 신체. 투병 흔적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의) 올곧은 정신은 병마를 이겨내고 있었다.
"몸 상태가 썩 좋은 편은 아니다"고 운을 뗀 이봉주는 "3년 전에 '근긴장이상증'이 시작돼 한동안 고생을 많이 했다. 잠도 제대로 못 잤다. 똑바로 누워 있지도 못하는 그런 상태였다. 통증은 없는데 원인 모르게 배가 자꾸 경직됐다. 지금은 걷고 잠도 잘 자고 많이 좋아졌다. 힘들지만 잘 버티고 있다. 많은 분들이 걱정을 많이 해 주시는데 곧 건강한 모습으로 찾아 뵙겠다"고 자신의 몸 상태를 전했다. 특히 "(병은) 오랫동안 운동을 해서 온 것이 아니다. 병원에서조차 원인을 모른다. 신경계 쪽에 이상이 생긴 것으로 안다"며 병의 원인이 운동 후유증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투병 질문에 표정이 굳어 있던 이봉주. 마라톤 이야기가 나오자 이내 반색했다. 달변가가 됐다.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를 강조하며 마라톤 철학을 쏟아냈다. "마라톤은 오랜 시간 꾸준한 운동이 필요하다. 정말 오랜 시간 훈련하고 그에 의한 결과가 나온다. '절대 포기하지 말자'는게 신조였다. 마라톤을 오랫동안 길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포기하지 않는 나만의 마음가짐이 있었기 때문이다. 힘이 들어도 절대 포기하거나 기권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게 이봉주의 신념이다.
그는 그러면서 "지금 경제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어렵다. 다들 힘들어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정말 힘들더라도 (마라톤 경기를 할 때처럼) 포기하지 않고 긍정적 생각을 가지고 임한다면 또 좋은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늘 포기하지 말고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밝히는 등 경제적 난관에 어려움을 겪는 국민들에게 위로의 말도 건넸다.
이봉주의 '중꺾마' 철학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그는 이 대회에서 레이스 중 다른 나라 선수와 부딪혀 넘어졌다. 다른 나라 선수는 경기를 포기했다. 하지만 이봉주는 달랐다. 등수에서 밀려 났지만 완주했다. 그에게 완주의 가치는 등수 위에 있었다. 이봉주는 당시 상황에 대해 "(나 역시) 포기할 뻔 했다. 그러나 늘 포기하지 않는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완주했다"고 설명했다.
선수들에게 전하는 노하우 "기록 수립, 메달 획득의 기준점 잡고 가라. 그래야 포기 않는 마음 다잡을 수 있다"
생활체육 마라톤 대회에 참여해 질주하고 있는 이봉주. 이봉주 제공그는 마라톤 생활 체육 전도사로도 유명하다. 투병 전부터 마라톤 저변 확대를 위해 작은 대회도 마다 않고 출전했다. 동호인들과 함께 뛰고 또 뛰었다. 몸을 사리지 않았다. 마라톤이 생활 체육으로 뿌리를 내리는 데 일조했다. 생활 체육 마라톤에 대한 이봉주의 열정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는 지난달에도 강원도 삼척에서 열린 황영조 마라톤 대회와 경기도 양평에서 개최된 이봉주 마라톤 대회 등에 참여했다. 아픈 몸을 이끌고 한 걸음에 달려온 이봉주. 그는 생활 체육 마라토너들에게 큰 울림을 줬다.
생활 체육 마라톤 이야기를 꺼내자 이봉주는 "요즘도 마라톤 행사에 많이 참여하고 있다. 마라톤이 생활 체육으로 활성화돼 있다. 마라톤만큼 좋은 운동은 없다. 생활의 활력소는 물론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다. 혼자서 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함께 하면 효과가 더 좋다. 일부에서는 관절이 안 좋아질 것으로 걱정하는데 (마라톤을 하면) 오히려 더 좋아진다. 마라톤을 무서워 하는 사람은 지금부터 서서히 걷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그 다음은 조깅, 또 그 다음은 5km, 10km를 단계적으로 도전하는 것이 좋다"며 생활 체육 마라톤 전도사다운 면모를 드러냈다.
엘리트 부문의 마라톤과 관련 해서는 "우리나라 마라톤이 많이 힘든 상황이다. 국제 대회에 나갈 선수가 열 손가락도 안될 정도다. 우리 때와는 다르다. (현 마라톤 환경이 열악한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어린 선수들이 마라톤을 꺼려하는 게 주된 이유 같다"며 안타까워 했다. 그러면서 "선수층이 얇은 게 마라톤 위기의 가장 큰 요인이다. 힘든 운동을 안하고 인기 스포츠 위주로 가다 보니 이런 상황이 됐다. 학교 체육이 활성화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마라톤 전문 선수들에게는 "늘 목표를 잡아라. 시합 때마다 기록을 세우겠다 아니면 메달을 따겠다는 기준점을 잡고 가야 한다. 그래야 포기하고 싶을 때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 맹목적으로 뛰는 것보다 목표를 잡고 그 목표를 향해 계속 노력하다 보면 힘든 순간이 와도 목표를 생각해 다시 뛸 수 있다"고 피력하는 등 훈련 '꿀팁'을 전했다.
이봉주는 현 대한육상연맹 이사(理事)다. 아시아국제마라톤연맹 이사 직함도 가지고 있다. 마라톤의 버팀목이 돼주고 있는 그는 마음 속에 간직한 계획을 조심스레 꺼내놨다. "마라톤 선배로서 마라톤 활성화를 위해 신경을 좀 더 써야겠다는 마음이다. 우리나라 마라톤 발전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 몸이 정상적으로 뛸 수 있게 되면 마라톤 활성화를 위해 예전처럼 많은 사람들과 함께 뛸 것이다. 풀 코스도 도전해 보고 싶다. 기회가 되면 후배들을 지도해 나 못지 않은 선수를 키워보고 싶다. 우리나라 마라톤이 힘든 위기이지만 젊은 선수들을 뒤에서 응원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하면 어디든 달려가 열심히 도울 것"이라는 게 이봉주의 간절한 바람이다.
충남 천안에서는 이봉주기념관 건립이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그는 "(내 이름을 딴) 기념관 건립이 추진된다니 기분은 좋다. 현실로 다가왔으면 좋겠다"고 솔직한 속내를 드러냈다. 또 깨지지 않는 한국 최고 기록 보유자라는 칭송을 건네자 "어마어마한 기록은 아니다. 지금 세계 기록은 2시간 1~ 2분대 이다. (이와 비교하면) 내 기록은 아무 것도 아니다"고 손사래를 치는 겸손함을 보였다.
이봉주는 인터뷰 말미 당대의 라이벌 황영조에 대한 애정도 드러냈다. "황영조는 영원한 친구다. 안 사람인 아내도 황영조에게 소개를 받았다. 황영조는 같이 가야 할 평생의 동지" 라는 것이 황영조에 대한 그의 '찐 마음'이다.
3초 차이 은메달, 메달 프레임 전환 계기·42.195 km 초원의 주인공 꿈 이뤄
1996년 아틀랜타 올림픽 육상 마라톤 종목에서 은메달을 딴 이봉주 선수가 태극기를 들고 트랙을 도는 세레머니를 하고있다. 이봉주 제공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은메달에 대한 아쉬움도 나타냈다. 이봉주는 "올림픽에서 은메달도 값진 것인데 시간이 지나 생각해 보면 (금메달을 못딴 것이) 너무 아깝다. 3초 차이만 아니었다면 금메달을 딸 수 있었는데 아쉬웠다. 그때 조금만 잘 뛰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당시 1~3 등 모두가 운동장까지 계속 각축전을 벌였다. 그래도 3등으로 뒤쳐져 있다가 2등으로 은메달을 딴 것이어서 '감지덕지' 라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당시 은메달은 금메달 버금가는 가치로 평가를 받고있다.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에서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에 대한 인식은 이봉주의 은메달로 바뀌었다. 그는 3초 차이로 금메달을 놓쳤으나 1위 선수와 함께 태극기를 들고 트랙을 돌았다. 아쉬움이 아닌 기뻐하는 이봉주의 모습은 신선했다. 남달랐던 은메달 세레머니는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국민들에게 값진 은메달의 가치를 심어줬다. '은메달에 그쳤다'는 부정적 표현은 사라졌다. 이 때 처음 '값진 은메달' 이란 말이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당시를 잠시 회상하던 그는 "그때를 기억한다. 올림픽에서 메달은 아무나 딸 수 있는 게 아니다. 당시에는 그 상황이 너무 좋았고 기뻤다. 그 전까지 선수들은 은메달, 동메달을 따도 기가 죽어서 고개를 숙이고 그랬다. 그런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아 태극기를 들고 트랙을 돌았다"고 회고했다.
이봉주에 대한 전 국민적 사랑은 성실한 인성이 한몫을 했다. 성실함은 그의 처음과 마지막 기록이 증명한다. 이봉주의 첫 기록은 대학생 때로 2시간 19분대다. 41세에 출전한 은퇴 경기, 전국체전에서는 2시간 16분대로 우승했다. 그는 41세에 41번 완주를 한 기록을 남겼다. 마라톤 선수로는 환갑을 넘긴 나이에 20대 때보다 좋은 기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이 역시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의 마라톤 동력은 국민과 공감대를 이룰 때다. '마라톤을 하며 가장 보람을 느낄 때가 언제였냐'는 질문에 이봉주는 "국민들의 삶이 힘들 때가 있다. 그럴 때 (내가) 좋은 기록을 내고 우승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기뻐한다. 그 때는 정말 마라톤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언급했다.
"동물을 너무 좋아해 푸른 초원의 목장 주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는 이봉주. 그는 일생을 42.195km의 초원을 수 없이 달려왔다. 드넓은 초원의 주인공이었던 이봉주의 꿈은 이미 이뤄진 셈이다.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마라톤을 한 것에 대해 한번도 후회 하지 않았다. 한 순간의 후회도 없었다"고 말하는 그. 인생의 꿈을 이룬 자의 아우라가 느껴졌다.
이봉주에게는 '인생은 마라톤' 이란 말보다 '마라톤은 인생'이란 말이 자연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