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을 지탱하던 신라는 서기 889년, 진성여왕(眞聖女王) 3년에 상주(尙州)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을 진압하지 못함으로써 몰락의 결정적인 조종을 고했으며 그런 혼란을 고려 왕조 개국 주체들이 수습함에 따라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이해다.
이기동 동국대 사학과 교수는 "바로 이같은 시대 파악 방식 때문에 농민반란 이후 50년간의 신라사는 고려왕조사에 흡수ㆍ매몰되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면서 "그러나 신라 말기사(末期史)는 고려 성립의 전사(前史)로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신라사의 마지막 장(章)으로 독자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이 교수는 나아가 "비록 그것이 한 때 그토록 위대성을 발휘했던 신라왕국의 고영(孤影)을 확인하는 서글프면서도 잔인한 작업이 될지라도" 몰락과 새 시대(고려)를 위한 전야(前夜)로만 취급되곤 하는 신라 하대를 당당히 신라사의 주체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을 주문한다.
신라 하대에 대한 종래 지배적인 역사학적 관점이 지닌 가장 큰 문제점으로는 이 시기를 하나의 층위로만 보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즉, 삼국사기 신라 경순왕 9년(935) 조에 기록된 신라사 3시기 구분법(상대<上代>ㆍ중대<中代>ㆍ하대<下代>)을 따라 제36대 선덕왕(宣德王) 김양상(金良相) 즉위(780) 이후 56대 경순왕 말년(935)에 이르는 20대 155년을 단층으로만 간주한다.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소장 최효식)가 11일 이 대학 서울캠퍼스 문화관에서 ''신라 하대의 사회 변동''을 주제로 개최한 제25회 신라문화학술회의는 ''농민봉기 이전까지''라는 부제가 명시하듯 하대를 분절하려 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자리에서는 이기동 교수가 ''9세기 신라사 이해의 기본 과제''라는 기조강연을 통해 889년 상주 농민반란이 신라 하대사의 중대한 고비였음을 강조했다.
이에 의해 이날 학술대회는 농민반란 이전의 신라 하대의 전기(前期), 즉, 선덕왕 즉위 이후 진성여왕 즉위에 이르는 약 110년간(780~889년)의 신라사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했다.
김창겸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편수원은 ''신라 헌안왕의 즉위와 그 치적''을 발표했고, 김창석 강원대 교수는 ''청주(菁州)의 녹읍(祿邑)과 향도(香徒)''를 고찰했다. 권덕영 부산외대 교수는 ''신라 하대 ''서학''사(西學史) 시론''을 전개했고, 조범환 서강대 연구교수는 ''신라 하대 선승(禪僧)과 왕실'' 관계를 분석했다.
이 중에서 신라 제47대 헌안왕(憲安王) 김의정(金誼靖. 재위 857-860)을 신라 하대의 증흥군주로 자리매김하려 한 김창겸 박사의 논문은 주목된다.
그는 비록 재위 기간은 3년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의 즉위를 통해 그 이전에 원성왕계 내부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왕위계승전을 봉합한 것은 물론 ▲즉위의례와 안정된 왕권 확보 ▲왕실화합 도모와 후계자 선정 ▲불교계와의 제휴 ▲민생안정 추구와 관제 개혁을 도모했으며 그것이 일정 부분 성공한 점을 꼽았다.
이런 면모는 그가 죽은 다음 추봉된 그의 시호가 평안(平安)과 동의어인 헌안(憲安)인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는 것이다.
요컨대 김 박사에 의하면 "헌안왕은 비록 신라를 중대(中代)의 황금기로 다시 돌이키지는 못했으나 안정된 왕권기반을 구축함으로써 신라를 연장시킨 충실한 가교자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연합뉴스下代>中代>上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