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달 철거를 앞둔 제주시민회관. 고상현 기자▶ 글 싣는 순서 |
①제주 첫 호텔 동양여관…명성 사라진 자리 남은 건 삶 ②개발 광풍에도…제주 일식주택 100년간 서 있는 이유는 ③포구 확장하고 도로 건설…사라지는 제주 어촌 '소통의 빛' ④택지 개발로 사라질 위기 제주 4·3성…주민이 지켜냈다 ⑤'아픈 역사 축적' 제주 알뜨르비행장,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⑥무성영화 시대 제주 마지막 극장 철거…사라진 기억들 ⑦4·3으로 초토화 된 제주 중산간 마을…뿌리 내린 사랑 ⑧제주 최초 철골 건물 시민회관…허물어져도 기억은 유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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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지을 때 바로 옆집에 살았거든. 당시 제주에 있는 건물 중에서 제일 크고 단단히 지었다고 들었어. 제주에서 처음으로 철골조로 지은 건물이야. 큰 행사는 모두 여기에서 했지." 지난 21일 제주시 이도1동 제주시민회관 인근에서 만난 이성노(92)씨는 과거 시민회관 모습을 떠올리며 이같이 말했다. 시민회관은 제주 최초의 철골조 건축물이자 문화시설이다. 다음 달부터 복합문화시설을 새로 짓기 위해 철거가 시작돼 허물어진다. 다만 그 기억과 철골조는 살아남는다.
제주 최초의 철골조 건축물, 시민회관
제주시민회관은 지난 1963년 7월 공사가 시작돼 이듬해 6월 준공됐다. 한국 대표 건축가인 김태식 씨가 설계했다. 문화시설을 지을 여력이 없었던 제주에서는 보기 드문 큰 규모의 시설이었다. 건물 주춧돌을 보면 공사 감독자가 두 명이었다. 당시로서는 큰 공사였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시민회관은 제주 최초의 철골조 건축물이다. 지금은 철골조(철재를 뼈대로 하는 건축)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지만, 50여 년 전만 해도 혁신적인 공법이었다. 당시 한국전쟁과 4‧3을 겪으며 건축 예산이 부족했고, 기술력도 떨어졌다. 벽돌이나 변변찮은 콘크리트로 건물을 지었던 게 대부분이다.
다목적 문화시설답게 건축물의 기본 구성은 무대와 객석, 그리고 중앙의 경기장으로 돼있다. 이를 위해 건물 정면과 후면이 모두 평지붕으로 된 '라멘구조(수직으로 힘을 받는 기둥과 수평으로 힘을 받는 보가 강하게 결합된 구조)'로 돼있다. 중앙 부분은 철골조의 경사지붕으로 마무리됐다.
제주시민회관. 고상현 기자특히 지붕의 주요 부분을 기둥이 없는 철골 트러스트로 처리한 점이 눈에 띈다. 이를 통해 무대와 객석, 경기장에 필요한 넓은 공간을 확보한 것이다. 철골조의 경사지붕과는 달리 건물 전면과 후면은 대칭 구조로 설계된 점도 특이하다. 단순한 형태의 이 부분은 사무공간으로 사용됐다.
제주대학교 건축학부 이용규 교수는 "지금은 철골을 다룰 때 볼트와 너트로 연결한다. 시민회관 공사 때는 쇳물에 못을 달궈서 지붕 위로 던지면, 한쪽에서 망치로 두들기며 같은 모양으로 철골을 고정시켰다. 당시 흔치 않고 쉽지 않은 기술이다. 서양에서 주로 사용한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시청은 몰라도 시민회관은 알았었지"
1964년 7월 3일 문을 연 제주시민회관은 이후 수십 년 간 제주의 대표적인 문화시설로 자리매김했다. 영화 상영부터 정치행사, 징병검사, 체육행사, 예술제, 음악제 등이 이뤄졌다.
디지털제주문화대전에 따르면 지금은 제주도립교향악단으로 이름이 바뀐 제주시립교향악단 창단연주회가 1987년 9월 3일 제주시민회관에서 개최됐다. 공영방송인 제주문화방송은 1968년 9월 14일 개국하면서 특집으로 시민회관에서 축하쇼를 펼쳤다. 가수 윤복희, 남진 등이 출연했다.
올해로 62번째를 맞는 탐라문화제의 전신인 제주예술제뿐만 아니라 지금은 사라진 미스 탐라선발대회도 이곳에서 진행됐다. 오랜 기간 다목적 문화시설로 도민에게 사랑받았다.
시민회관 인근에서 수십 년간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홍영희(78)씨는 "옛날에는 촌 할머니들이 제주시청은 몰라도 시민회관은 알았어. 그만큼 큰 건물이 없었거든. 제주의 중심지가 시민회관이었어. 사람들 만날 때도 시민회관에서 만나자고 했었지. 제주의 상징적인 건물이야"라고 기억했다.
지금은 문을 닫은 시민회관. 고상현 기자비록 철거되지만…기억과 철골조는 보전
수십 년간 제주 유일의 다목적 문화시설로 자리매김한 시민회관은 지난 1984년 한라체육관과 1988년 제주문예회관이 들어서며 서서히 그 자리를 내줬다. 급기야 인근 원도심 쇠퇴와 맞물리면서 최근까지 민방위대원 교육장소로만 활용됐다. 건물 노후화로 안전문제도 불거지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쇠퇴해가는 원도심 활성화를 위해 시민회관을 허물고 새 건물을 올려야 한다는 의견과 근대사적 가치가 있는 시민회관을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 도민사회에서 엇갈렸다.
행정의 선택은 과거와 미래의 공존이다. 시민회관은 2021년 정부의 생활SOC복합화 사업에 선정됐다. 이에 따라 제주시는 2025년 12월까지 국비 68억 원과 지방비 311억 원 등 모두 380억 원을 투입해 시민회관 자리(연면적 1만1천㎡)에 지하 2층, 지상 6층 건물을 짓는다.
새로운 건물에는 도서관과 체육관, 상업시설, 건강생활지원센터, 가족센터가 들어선다. 눈에 띄는 점은 기존 시민회관 건축의 특이점인 7개의 철골 트러스트를 원형 그대로 보전한다.
건물 설계를 담당한 ㈜엠엠케이플러스와 ㈜아란건축사사무소앤파트너에서 제출한 자료를 보면 '시민회관의 철골 트러스트 역사중정을 중심으로 각 시설 내부의 순환 동선과 연결된다. 시민회관은 역사와 자연, 문화와 복지 시설이 입체적으로 중첩되는 새로운 형식의 공원'이라고 설명한다.
새로운 제주시민회관 조감도.
제주 근대건축사적으로 가치 있는 옛 제주대학 본관과 옛 제주시청사, 옛 현대극장 등을 그대로 헐려버린 것과 다르게 시민회관에 얽힌 역사적 기록도 '아카이빙'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제주대학교 건축학부 김태일 교수는 "제주 최초의 철골조 건축물인 시민회관을 그대로 보전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철골조 등 상징적인 흔적을 남기는 것도 좋은 보전 방식 중 하나다. 특히 새 건물에는 과거 모습이 어땠는지 설명하는 역사적 기록도 전시돼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