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이미지 제공"이미 유연근무제가 정착된 상황인데 정말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일방적으로 근로시간이 늘어나는 제도가 도입되진 않을 것" (대형 게임사 직원) "여전히 수시로 크런치(Crunch, 기한을 맞추기 위해 야근을 장기간 이어가는 것)가 발동되는데, 제도가 근무시간을 늘리는 형태로 바뀐다면, 벗어날 방법이 없어질 것" (소형 게임사 직원) 정부의 근로시간 개편안을 바라보는 게임업계 내부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업계 특성상 야근이 잦지만, 대형 게임사에서는 근무 형태 개선에 대한 정치권의 압박이 계속돼왔고, 개발자 모시기 경쟁이 치열해 현 근무체계의 틀을 깨는 제도 도입이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소규모 인디 업체 직원들은 주 최대 69시간 근무제라는 신호가 열악한 근무환경을 더 고착화시킬 것이라 우려하고 있다.
정부는 현재 근로자들이 1주일에 52시간까지만 일하도록 하는 제도를 개선해 바쁠 땐 최대 주 69시간까지 일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개편안을 발표했다. 현행 주 단위 연장근로 단위는 노사 합의를 거치면 월·분기·반기·연' 등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된다. 만약, 단위를 월로 설정하면, 월 최대 212시간을 근무할 수 있는데, 4주 평균 64시간 근로를 지켜야 한다.
현재 대부분의 대형 게임업체에는 주 52시간제 적용 이후 정부안과 유사한 형태의 유연근무제가 정착된 상황이다. 월 단위로 산정해 1~2주차에 각각 60시간씩 일했다면 3~4주차에는 훨씬 적게 일해 주 평균 근무시간이 52시간을 초과하지 않으면 되는 식이다. 직원 수가 네 자릿수에 달하는 한 게임사의 직원은 "크런치가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못하겠지만, 맡은 업무가 개발이든 기획이든 관계없이 월 최대 근무시간이 정해져있고, 넘기면 컴퓨터가 꺼진다"며 "퇴근시간에 맞춰 우르르 집에 돌아가는 모습이 일상화됐다"고 언급했다.
이들은 주 최대 69시간 근로제가 법제화되더라도 근무시간이 현재보다 급격히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가 덜한 상태다. 특히, 넥슨, 스마일게이트 등 노동조합이 설립된 게임사는 사측이 근로시간 연장을 희망하더라도 노사간 협의를 통해 접점을 찾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넥슨 노조 '스타팅포인트'의 배수찬 지회장은 "정부 개편안에 따르면 근무시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보지만, 노조 입장에서는 사실 걱정이 없다"며 "회사 측에서 일방적으로 늘리려 해도 노조 반대로 합의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마일게이트 노조 'SG길드'의 차상준 지회장도 "정부의 개편안대로 제도가 바뀐다고 하더라도 노동조합이 있는 곳에서는 단체협약의 내용이 있기 때문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고 본다"고 언급했다.
업계에서는 노조가 없는 곳이라도 일정 규모 이상이라면, 주 최대 69시간제 도입이 남발되지 않을 것이라 보는 분위기다. 개발자들의 몸값이 오르며 사측이 원하는 대로 근로시간을 늘리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대형 게임사의 한 개발자는 "노조가 있는 곳에서 특정한 근무 형태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면, 다른 라이벌 게임사들도 따라가는 분위기"라며 "업계 특성상 이직이 매우 잦기 때문에 복지든 근무 조건이든 뒤처지면 바로 티가 난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규모가 작은 게임사는 상황이 다르다. 개발 중인 게임에 사활을 거는 상황 속, 포괄임금제(실제 근무한 시간과 관계 없이 고정 임금을 받는 계약)에 기반해 크런치를 발동시키고 일부 업체는 악의적으로 법정 근로시간을 어기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22 대한민국 게임백서에 따르면, 종사자들이 크런치 모드를 경험한 비율은 2019년 60.6%, 2020년 23.7%, 2021년 15.4%로 나타나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5인 미만 회사에 소속된 종사자들의 48.3%가 크런치 모드를 경험했다고 응답했고, 그 시기에 주 평균 61.4시간을 근무한 것으로 나타났다. 회사 규모가 적은 곳일수록 크런치 모드의 경험 비율은 물론 노동 강도도 높은 셈이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예전보다 근무환경이 많이 개선된 것이 사실이지만 있는 휴가조차 못 쓰는 경우가 있다"며 "업데이트를 앞두고 있거나 크리스마스 같이 중요 시즌에는 어디든 크런치를 피할 수 없는데, 1~2개 게임에 회사 운명을 거는 경우라면 그 빈도와 강도가 훨씬 더 심한 현실"이라고 언급했다. 또다른 관계자도 "포괄임금제가 적용되는 곳은 아예 근무시간을 계산조차 하지 않는데 정부의 개편안이 시그널이 돼 장기간 근로가 더 보편화되지 않겠나"라고 내다봤다.
노동계에서는 업계 특성 상 추가 근무를 피할 수 없다면, 일단 정확한 근무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포괄임금제를 폐지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그래야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는 문화가 사라지고 정당한 보상과 휴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세윤 화섬식품노조 IT위원장은 "포괄임금제를 폐지해 근로시간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 다음 근로시간 상한 문제를 다뤄야하는 데 순서가 바뀌었다는 생각"이라며 "업계가 언제까지나 장시간 노동으로 굴러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고, 적절한 휴식을 통해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하는 데, 포괄임금제 자체가 이를 막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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