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 외교장관은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지방변호사회관에서 진행된 강제징용 피해자 및 유족과의 면담에 참석했다. 외교부 제공지난 2019년은 한반도에서 두 가지 사건이 시작된 해였다. 북한은 북미 비핵화 협상으로 중단했던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그해 5월 재개했다. 일본은 8월 2일 각의(국무회의)에서 전략물자 수출심사 우대 대상국, 이른바 '백색국가'에서 우리나라를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그 뒤로 3년 반이 흐르는 동안 한일관계는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이 이렇게 한 가장 큰 이유인 2018년 강제동원 손해배상 대법원 확정판결에 대해 윤석열 정부가 최근 '제3자 변제'라는 이른바 '해법'을 내놓으면서 양국은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물론 그 이유가 한미일 안보협력에 대한 미국의 요구 때문이라는 점은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다.
문제는 이 '해법'이 한일 양국에서 공감을 얻지 못한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추진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한미일과 북중러의 '신냉전' 구도가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굳어지고, 새로 출범한 윤석열 정부의 전략이 한미일 관계 위주로 짜이면서 우리는 이런 구도를 이런 방법으로 걸어나갈 수밖에 없는 외통수에 걸렸다.
사망 뒤에야 '수출규제 = 대법원 판결 보복' 시인한 아베…급히 나섰던 미국
한일 관계. 연합뉴스고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지난달 출간된 회고록에서 2019년 수출규제 조치에 대해 "징용공(徴用工, 일본에서 강제동원 피해 노동자를 칭하는 용어) 배상 판결이 확정된 뒤 아무런 해결책을 마련하지 않은 문재인 정권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수출규제 강화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그는 "국가 간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상황에서 무역관리는 당연하다"면서 "굳이 두 문제가 연결된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은 한국이 징용공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당시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는 부인했지만, 사실상 배상 확정판결에 대한 정부 차원의 보복조치였음을 세상을 뜨고 나서야 시인한 셈이다. 그는 한 술 더 떠 강제성을 그나마 인정하기는 한 기존의 '징용공' 대신 '구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旧朝鮮半島出身労働者)'라는 용어를 만들어내 강제성마저도 숨기려고 했다. 일본은 현재도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한국은 여기에 대해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의 종료 통보로 맞대응했고 이에 놀란 미국이 여러 외교 채널을 통한 항의, 고위 당국자의 방한 등을 통해 다급히 중재에 나섰다. 한국은 이를 버티지 못하고 그 해 11월 조건부 종료 유예 통보에 나섰다.
한일간 군사정보보호협정을
한일간 갈등 때문에 종료하겠다고 통보했는데 미국이 나섰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GSOMIA의 체결 배경을 알면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론 '중국 견제' 성격의 한미일 군사협력…전제조건은 '역사 문제 해결'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Free and Open Indo-Pacific)'. 2016년 아베 총리가 처음 제안해 미 트럼프 행정부와 함께 수립한 전략으로, 다른 말로는 우리에게 익숙한 '인도-태평양 전략'이라고도 불린다. 이른바 '중국 포위 구상'이라고 불리듯, 그 목적은 중국의 해상 실크로드라고도 불리는 '일대일로' 전략 대응에 있다.
당시 집권했던 박근혜 정부는 역대 보기 드물었던 '친중 외교'를 추진했다고 평가받을 정도였다. 한중 FTA 체결과 함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지지, 그리고 2015년 9월 전승절 행사 참석 등이 이를 방증한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며 그전부터 중국 견제를 위해 한미일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미국이 나섰다. 특히 2015년 9월 전승절 행사 참석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는 독소조항으로 인해 '굴욕적'이라는 평가까지 받은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피해자들과 지원단체가 쓰는 용어는 '일본군 성노예제')' 합의와 2016년 11월 GSOMIA 체결로 이어진다. 양국 안보협력의 전제조건이 바로 역사 문제 해결이기 때문이다.
주오사카 총영사를 지냈던 북한대학원대 조성렬 초빙교수는 당시 상황에 대해 "전승절 직전이었던 8월 15일 아베 총리가 내놓은 70주년 담화가 과거 무라야마 담화 등을 부정했었다면 우리가 참석할 명분이 생기는데, 그 담화 내용이 그렇지 않았다"며 "박근혜 대통령은 과거사 문제 해결 없이 안보 현안에 대한 협의나 협력은 없다는 '원샷딜' 입장이었고, 아베 정권은 과거사와 안보협력을 분리하자는 '투 트랙'이었는데 당시 박 대통령이 전승절 행사에 가는 바람에 미국의 개입을 부르게 됐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더해 한국군과 일본 자위대가 서로 군수지원을 할 수 있게 하는 상호군수지원협정(ACSA) 체결도 추진됐지만 2015년 10월 한일 국방장관회담에서 나카타니 겐 방위상이 "한국의 유효 지배영역이 미치는 영역은 군사분계선 이남"이라며, 우리의 영토고권(領土高權)을 부인하는 일이 벌어져 무산됐다.
쉽게 말해, 우리는 자위대가 북한에 군사행동을 하려면 우리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인데 일본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해서다. 양측의 이러한 입장은 지금도 비슷한데 일본이 최근 장거리 미사일 도입을 전제로 한 '반격 능력' 보유를 선언하면서 문제가 되고 있다.
3.1절에 '파트너' 언급까지 하며 한일관계 회복 노리지만…
윤석열 대통령. 연합뉴스이렇게 어렵게 맺은 한미일 안보협력 그리고 한일 갈등구도는 중간에 강제동원 문제가 불거졌던 2023년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한일관계 회복을 내세운 윤석열 정부가 3월 초 현재까지 내놓은 키워드는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정치적 결단' 그리고 '파트너'다.
전자는 2월 말 독일 뮌헨안보회의에서 한일 외교수장이 만난 뒤 외교부가 기자들에게 설명한 내용이다. 박진 장관은 "주요 쟁점에 대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다 했다"면서 "일본 측에 성의 있는 호응을 위한 정치적 결단을 촉구했다"고 말했다.
여기에 더해 윤석열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3.1 운동 이후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일본은 과거의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협력 파트너로 변했다"며 "특히 복합 위기와 심각한 북핵 위협 등 안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미일 간의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고 언급했다.
지난해 9월 동해에서 열린 한미일 대잠전 훈련. 해군 제공이를 방증이라도 하듯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한미일은 미사일 경보와 방어 그리고 대잠훈련을 잇따라 진행하며 군사협력에 가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해 11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3국 정상이 미사일 경보 정보 실시간 공유에 합의했고, 이를 위해 국방부가 구체적 방안을 발전시키고 있는 것도 이와 맞물려 있다.
표면적으로는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2015~16년의 움직임이 그러했듯 이러한 움직임 모두 중국 견제 성격을 짙게 띄고 있다. 최근 이뤄진 일본의 장거리 공격용 미사일 도입 등 '반격 능력' 보유를 선언한 안보전략문서 개정에 미국이 전면 지지를 표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국립외교원장을 지냈던 한동대 김준형 교수는 지난달 22일 열린 세종국방포럼에서 "프놈펜 공동선언은 한국이 중국-러시아 등 대륙을 견제하는 해양 세력에 본격 동참을 천명한 것으로, 대중 견제를 확실하게 구축한다는 미국의 전략을 수용한 것"이라며 "미국이 한미일을 묶어 북중러를 견제하고 싶은 것은 미국의 이익이 될 수는 있지만, 우리가 맹목적으로 추종해야 할 전략이 될 수는 없다. 특히 일본을 신뢰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고 말했다.
반발 사는 제3자 변제 '해법'…상황 장기화? 일본 기업 참여 없는 신속 타결?
서울광장에서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6.15남측위원회 주최로 열린 104주년 3.1절 범국민대회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류영주 기자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이번에 우리 정부가 낸 '해결책' 또한 한일 양국에서 반발을 사고 있다. 이미 한 번 '위안부' 합의를 졸속으로 진행한 경험이 있는데다 일본이 사과할 기미가 전혀 없고, 2019년 수출규제가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한 자의적 보복조치라는 점이 크게 작용하고 있어서다.
당사자인 다수의 강제동원 소송 원고들과 소송대리인단, 민족문제연구소 등 지원단체도 정부가 내놓은 제3자 변제안이 실제 '해법'이라기보다, 일본 기업에 대해 강제집행이 이뤄질 경우 여기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채권을 소멸시키고자 하는 쪽에 더 가깝다고 주장하며 반발하고 있다.
강제동원 소송 법률대리인 임재성 변호사(왼쪽)와 민족문제연구소 김영환 대외협력실장(오른쪽)이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서초구 변호사회관에서 열린 외교부의 설명회 이후 취재진에게 결과를 브리핑하고 있다. 연합뉴스지난달 28일 외교부의 설명회에 참석했던 법무법인 해마루 임재성 변호사는 이날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을 받은 미쓰비시 손해배상 소송 원고의 자녀가 "
한국 정부의 안은 구걸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오랜 시간 소송하는 걸 봐 왔고, 결코 돈 때문에 이런 소송을 했다고 기억하고 있지 않다"며 "아버지는 자신의 피해뿐만 아니라 강제동원되시고 사망하시고 피해 입으셨던 많은 분들을 대표해서 이 소송을 하셨기 때문에, 단순히 돈으로 아버지의 판결을 없애려고 하는 이 절차를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40명 가까이 모였기 때문에 현재 정부의 입장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판단하시는 분들부터, 당신들(한국 정부)부터 사과해야 하고, 지금 당신들이 해야 될 것은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어떻게 받을지에 대해서 같이 작전과 전략을 짜야 하는 것이지, 우리의 판결을 없애려고 하는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아주 호되게 비판하셨던 분들도 계셨다"고 현장 분위기를 설명했다.
일본 자민당의 핵심 지지층인 보수세력도 이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 또는 기업이 사과를 표명하고 판결금을 지급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 대법원의 확정판결과 달리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이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으니 지금 와서 해결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다. 이들은 2015년 '위안부' 합의에 대해서도 강제성이 없었으니 사과할 필요도 없다는 식의 비슷한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때문에 해당 합의 뒤 일본 정부가 10억엔을 실제로 재단에 냈다는 점에서
일본 치고는 전향적이었다고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그런데 오는 5월 윤석열 대통령이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G7 정상회의에 참석하려면 늦어도 4월에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미국의 압력도 있는 우리 입장에선 이 문제를 얼른 해결해야 하지만 G7 의장국인 일본 입장에선 굳이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할 필요가 없다. 결과적으로 일본이 꽃놀이패를 쥐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만약 우리가 일본에 요구한 '정치적 결단'이 일본 정부의 사과와 일본 기업의 제3자 변제 참여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면, 이 문제는 결국 장기화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 일본 기업의 참여를 필수조건으로 하지 않은 채 정치적인 수사(rhetoric)만 나오는 선이라면, 한일간의 강제동원 '합의' 자체는 생각보다 빠른 시일 내에 나올 수도 있다. 물론 이를 우리 국민들이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을지는 또다른 문제다.
주니가타 총영사를 지냈던 세종연구소 정미애 객원연구위원은 지난달 22일 포용과 혁신 주관으로 열린 '세계안보와 한일관계 개선 및 제언' 세미나에서 "역사 문제는 해결하려 하기보다 문제를 극복하고 협력해야 한다"며 "한일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선 한일 협력의 필요성을 국민들이 납득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런 구도 알면서 도발 계속하는 북한의 속내…외통수에 걸린 한국
한미일 군사협력의 표면적인 이유를 제공하고 있는 당사자인 북한도 한반도에 이러한 복잡한 정세가 얽혀 있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도발을 멈출 생각은 별로 없어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런 구도는 더욱 강화될 전망이고, 그만큼 우리는 외통수에 걸리게 됐다.
1월 1일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석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8기 6차 전원회의 보고에서 "국제관계 구도가 '신냉전' 체계로 명백히 전환되고 다극화의 흐름이 더욱 가속화되는 데 맞게 우리 당과 공화국(북한) 정부가 국위제고, 국권수호, 국익사수를 위하여,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위하여 철저히 견지해야 할 대외사업 원칙이 강조되었다"고 보도했다.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연합뉴스김정은 위원장의 동생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도 2월 20일 담화에서 "최근 조선반도(한반도) 지역에서의 미군의 전략적 타격 수단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며 "
태평양을 우리의 사격장으로 활용하는 빈도수는 미군의 행동성격에 달려 있다"고 협박에 나섰다. 물론 북한이 그렇게 할수록 표면적으로는 북한, 실제로는 중국까지 노린 한미일 안보협력은 더욱 가속화되는데 이러는 이유는 뭘까.
조성렬 교수는 "2019년 하노이 노딜 이후 북한은 '더 이상 벼랑 끝 전술은 없다'로 선회한 것 같다. 즉 핵으로 위기를 고조해 봤자 미국이 제재를 해제할 가능성이 없다고 본 것이다"면서 "이에 대해선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핵무력의 강화를 통해 핵을 '협상 카드' 정도가 아니라 그냥 보유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중국과 러시아와의 협력을 통해 다른 길을 찾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기존 (유엔 안보리) 제재를 푸는 것은 어렵지만, (중러가 대놓고 북한 편을 드는 상황에서) 더 이상의 제재는 없다고도 볼 수 있다"며 "러시아가 지금은 기존 제재에 대해 동의하지만, 좀더 시간이 흐르면 북한에 대한 제재를 무시 즉 무력화시킬 것이라고 본다. 서방이 러시아를 총력으로 제재하고 있기에 러시아만 북한에 대한 제재를 유지할 이유도 없다"고 진단했다.
쉽게 풀이해 북한이 더이상 북미 협상에 기대를 걸지 않고, 독자적인 생존을 추진하면서 그 방법을 신냉전 사이 중국·러시아와의 연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찾았다는 얘기다.
결과적으로 신냉전의 한복판에 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사실상 좁아졌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하노이에서 타의로 무산된 뒤 맞닥뜨리게 된 우리의 현 주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