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겸 연주자 정재일. ©Young Chul Kim영화 '기생충', 드라마 '오징어게임' 음악감독으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작곡가 겸 연주자 정재일(41)이 클래식 레이블 '데카'에서 첫 앨범 '리슨'(LISTEN)을 발매했다.
정재일은 24일 '리슨' 발매 기념 간담회에서 "(데카에서) 처음 내는 앨범인 만큼 저한테 가장 내밀하고 편안한 악기를 골랐다. 가장 편안한 언어로 시작해보고 싶어서 피아노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는 "제게 피아노는 모국어나 다름없다. 말하는 것보다 피아노 연주가 더 편할 정도다. 더 깊은 얘기를 하려면 혼자 얘기할 수 있는 편성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다음 앨범에는 일렉트로닉, 국악을 접목하는 등 여러 실험을 해보고 싶기도 하다"고 했다.
이번 앨범은 지난달 선공개한 싱글 '더 리버'(The River) '리슨'(Listen) '오션 미츠 더 랜드'(Ocean Meets The Land) 등 7곡이 수록됐다.
녹음은 노르웨이 소재 레인보우 스튜디오에서 진행했고, 현악 사운드는 '기생충'과 '옥자' 작업에 참여했던 부다페스트 스코어링 오케스트라와 다시 호흡을 맞췄다. 정재일은 "수많은 명반이 탄생한 스튜디오다. 열흘간 하루 7시간씩 연주했다"고 말했다.
이번 앨범은 자연과 인류애,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서로 귀를 기울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피아노 중심의 오케스트라 사운드로 펼쳐냈다.
그는 '리슨'에 대해 "저는 다른 예술을 위해 작업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이기도 하다. 내 안에서 뭐라고 하는지 듣고 싶고, 사람들의 말도 듣고 싶고, 지구가 하는 말도 듣고 싶었다"며 "우리가 잘 듣지 못해서 팬데믹과 전쟁을 겪는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살고 있는 방법이 잘못됐다는 것을 모두 인식하고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할 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상황이다. 팬데믹으로 3년간 아무 것도 못하고 비극적 이별을 많이 보면서 '잘못됐구나' 생각했는데 전쟁까지 터졌다. 우리는 정말 듣는 귀가 없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리버'는 "침잠한 음악을 만들고 싶은" 바람을 담았다. 정재일은 "한강 하구 쪽에 거주하다 보니 겨울 철새, 습지, 갈대 등 자연 풍경을 자주 접하는데, 근처에 자동차와 고층빌딩을 보면서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만 없으면 너무 아름답겠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정재일은 대중음악과 클래식을 넘나드는 음악가다. 17살에 밴드 '긱스' 베이시스트로 데뷔한 후 패닉, 박효신, 아이유 등 유명 아티스트의 작곡과 프로듀싱을 맡았다. 바흐, 브람스, 아르보 패르트 같은 클래식 작곡가의 영향까지 담아낸다는 평이다. 클래식 레이블 '데카'와는 지난해 6월 계약했다.
특히 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오징어게임' 음악감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두 작품으로 이름을 알린 후 달리진 점이 있느냐'는 질문에 정재일은 "영화 '기생충' 덕분에 기회를 많이 얻었지만 제가 무대 뒤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보니 직접적인 변화를 느끼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다만 "'성덕'(성공한 덕후)이 된 건 맞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브로커'를 작업하면서 스스로 '나한테 굉장한 일이 생겼구나' 생각했다"고 웃었다.
얍 판 츠베덴 서울시향 차기 음악감독이 지난달 기자간담회에서 그에게 보낸 러브콜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제가 대학교에서 음악을 배운 게 아니라 근본이 없어서 그 분들이 생각하는 예술적 경지를 맞출 수 있을 지 두렵지만 위촉곡 제안을 주신다면 해보고 싶은 작은 소망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