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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납치·육영수 여사·땅굴·도끼만행에도 南北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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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요약

통일부, 70년대 남북 적십자 회담 문서 3028쪽 공개
70년대 내내 지속된 남북 회담…최근 北 무응답과 비교

통일부가 30일 1970년대 남북회담 문서 및 사진들을 일반 국민에게 두 번째로 공개했다. 사진은 사료집에 담긴 평양 대동강회관에서 개최된 남북적십자 제1차 본회담 모습. 통일부 제공통일부가 30일 1970년대 남북회담 문서 및 사진들을 일반 국민에게 두 번째로 공개했다. 사진은 사료집에 담긴 평양 대동강회관에서 개최된 남북적십자 제1차 본회담 모습. 통일부 제공
남북이 1972년 8월부터 1977년 12월까지 진행한 남북 적십자 회담 분야 문서 3028쪽이 30일 공개됐다.
 
남북은 당시 김대중 납치 사건,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 남침용 땅굴 발견,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등 정치군사 분야의 주요 사건들을 둘러싸고 격한 공방을 벌이면서도 5년 이상 적십자 회담을 이어갔다. 당시 회담에서 남북간에 오간 주요 발언을 발췌해 소개한다.
 

김대중 납치사건 北 "중정요원 빼라" VS 南 "중정요원 없다"

1973년 11월 28일 열린 남북적십자 제1차 대표회의에서 북측은 석 달 전인 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 사건을 꺼내 들었다. 북한은 납치를 저지른 중앙정보부를 강하게 비난하며, 회담에 중정요원들이 참가하는 것에 대해서도 불쾌감을 드러냈다. 남측은 회담에 참석 중인 중정 요원은 없다고 대응했다.
 
남북적십자 제1차 본회담서 합의서를 교환하는 모습. 통일부 제공남북적십자 제1차 본회담서 합의서를 교환하는 모습. 통일부 제공
(北 대표) "남조선 중앙정보부는 날이 갈수록 민주주의와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갈망하는 애국자들, 청년 학생들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행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지난 8월에는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는 야당계 민주인사 김대중을 잔인한 방법으로 납치해 오는 행위까지 저질렀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나라의 통일과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인민들의 의사를 유린하는 행위이고 숭고한 인도주의에 대한 엄중한 도전으로서 내외의 격분을 지금 자아주고 있는 것입니다"
 
(南 대표) "첫째는 중앙정보부 인원들이 적십자회담에 참가하고 있다, 이 사람들과 마주 앉아서 이야기할 수 없다, 말하자면 적십자회담에 중앙정보부 인원들이 참가한 사람들을 빼라는 의제고 (…) 세 번째는 이러한 분위기로는 서울회담 개최가 불가능하다, 때문에 평양에서 개최하자, 그런 점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 측 견해로는 우리 회담요원들 가운데 중앙정보부 요원은 없습니다."
 

육영수 여사 피격 南 "더러운 흉기로" VS 北 "이게 정치회담?"

1974년 8월 28일 남북적십자 3차 실무 회의에서는 남측이 당시 8.15 광복절에 발생한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제기하며 공세의 수위를 높였다. 당시 범인으로 지목된 재일동포 문세광의 배후에 북한이 있다면서 책임을 추궁한 것이다. 북측은 적십자회담에서 논의할 의제가 아니라고 일축했다.
 
남북적십자 회담 장면. 통일부 제공남북적십자 회담 장면. 통일부 제공
(南 대표) "북한 맹동분자들은 우리 민족의 가장 신성한 경축일인 8.15 광복절 기념식 날을 택하여 대한민국 대통령을 암살하도록 지령하는 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 암살자는 더러운 흉기로 민족의 영도자인 우리 대통령을 저격하였으며, 끝내는 온 국민의 존경과 추앙을 한 몸에 받은 대통령 영부인을 온 국민이 지켜보는 눈앞에서 시해하고야 말았습니다. 우리의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자는 곧 5천만 우리 민족 모두를 암살하려는 자입니다."
 
(北 대표) "회담에 나왔어요? 어떻게 나왔어요? (…) 회담을 하자는 게 아니구만 (…) 말 좀 삼가쇼, 이게 정치회담이요? 적십자 회담이요? 이거……(회의 탁자를 쳤음) 예의는 무슨 놈의 예의야……. 적십자 회담을 하자는 게 아니구만, 중앙정보부 특무들을 제거하라우."
 

땅굴 발견 南 "우리 토목 기술로 발견" VS 北 "거 좋은 기술외다"

1975년 3월 26일 개최된 남북적십자 9차 실무 회의에서는 남침용 땅굴을 놓고 공방이 이어졌다.
 
(南 대표) "휴전선 비무장지대 남방으로 지하 땅굴을 뚫어 대규모의 전쟁을 도발하려는 음모까지 꾸미게 되었습니다. 북한의 호전분자, 맹동분자들이 파게 한 남침용 땅굴이 한 개도 아닌 여러 개가 이미 우리 측의 현대적인 토목 공학적 기술에 의하여 발견되었습니다."
 
(北 대표) "거, 좋은 기술이외다. 어째 청와대 밑에 있는 땅굴에 대해서는 말 안하오. 우리가 「팟소」 ……뻔뻔하고만……"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南 "살인명령" VS 北 "집어치우시오"


사료집에 담긴 판문점 실무회의에 앞서 악수하는 남북 적십자 대표단 모습. 통일부 제공사료집에 담긴 판문점 실무회의에 앞서 악수하는 남북 적십자 대표단 모습. 통일부 제공
1976년 8월 18일 북한군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2명의 미군을 살해한 '도끼만행사건'에도 남북 적십자 회담은 열렸다. 도끼만행 발생 이틀 뒤인 남북 적십자 18차 실무회담이다. 물론 남북 간 공방은 계속됐다.
 
(南 대표) "심지어 엊그제 18일에는 신성한 회담장소가 마련되어 있는 이 곳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귀측 경비병에 의한 「도끼살인사건」이 귀측 경비장교의 「살인명령」에 의하여 발생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北 대표) "집어 치우시오. (책상을 쳤음) (…) 우선 나는 귀측의 발언에서 매우 엄중시하는 것은 우리 최고사령부 동지의 명령을 헐뜯는 민족반역적인 발언에 대해 엄중히 규탄하는 바입니다."
 
한국전쟁 이후 전후 복구에 성공한 북한은 국력 면에서 남한을 압도했다. 적어도 70년대 중반까지는 북한의 국력이 남한보다 앞선 것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70년대에 진행된 적십자 회담 곳곳에서 북한의 자신감을 읽을 수 있다.
 
남북은 70년대 발생한 각종 도발 사건에도 불구하고 회담을 이어가며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을 일정하게 관리했다. 북한의 무응답으로 남북 당국 회담은 물론 민간 차원의 회담도 열리지 않는 최근 상황과는 비교되는 대목이다.
 
한편 이번에 공개된 문서는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국립통일교육원 △북한자료센터 등 3곳에 마련된 「남북회담 문서 열람실」에서 열람할 수 있다. 아울러 남북회담 문서 공개 목록 및 공개 방법, 열람 절차 등은 남북회담본부 누리집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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