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 연합뉴스윤석열 정부의 노동 정책 방향이 '노란봉투법'에 대한 반대 입장부터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김문수 위원장 임명까지 급격한 우향우 행보를 보이면서 노정 갈등이 본격화될 조짐이다.
'신중론'에서 '불법 조장론'으로…'노란봉투법' 둘러싼 노동부 장관의 변화
고용노동부 이정식 장관은 지난달 29일 '노동 동향 점검 주요 기관장 회의'에서 노란봉투법에 대해 "위헌 논란은 물론 노동조합의 불법 파업이나 갈등을 조장한다는 국민적 우려가 있다"며 사실상 반대 입장을 드러냈다.
이어 "전체 노사 관계가 안정적인 기조이고, 법과 원칙 내에서 갈등을 해결하는 관행이 정착 중인 상황에서 해당 법안에 대한 논의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일명 '노란봉투법'은 파업의 범위를 합리화해서 파업 노동자에 대한 사측의 과도한 손해배상청구를 예방하려는 노조법 개정안을 말한다.
현행법은 합법 파업의 범위가 지나치게 좁기 때문에 대량해고나 부당노동행위에 저항해도 '불법 파업' 딱지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사측으로부터 수십~수백억 원 규모의 손해배상을 청구 받고 재산을 가압류당해 노동자들이 목숨까지 버려야 하는 현실을 개선하자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그동안 이 장관은 '기본적으로 합법적인 쟁의를 벌여야 하지만, 사측의 무분별한 손배소도 문제가 있다'는 신중한 입장을 지켜왔다.
이 장관은 지난 8월 기자간담회에서는 "(불법 파업이 있을 경우) 손배 가압류가 들어가고 노사관계를 더 악화시키고 때로는 극단적 선택도 있는 굉장히 불행한 일"이라며 "이런 부분은 다양한 방식으로 개선될 수 있고, 개선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노란봉투법에 대해 "우리 사회가 아픔을 안고 있는 것인데, 대우조선해양 사태가 계기가 돼 손배 가압류 문제가 다시 국민적 관심사가 됐고 (국회에서) 논의가 될 것"이라며 "법이 현실과 맞지 않고 법 간 정합성, 현실과의 적합성이 없다면 그 부분은 정치권에서 논의할 일"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정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인 이은주 의원이 지난달 15일 오전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노란봉투법 발의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지난달 15일 국회에서도 노란봉투법에 대해 "준법·적법 투쟁은 언제든지 면책이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불합리한 부분이 있어 입법 논의를 하시겠다는 것으로, 이제 입법의 시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다음 날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가 "민주당이 일방적으로 법안을 처리할 경우 대통령께 거부권을 행사해달라고 건의하겠다"고 밝힌 뒤 이 장관의 입장도 무게 중심이 바뀌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 장관은 지난달 22일 국회에서도 "무분별하게 손해배상·가압류를 행사하는 것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봐야 한다고 했다"면서도 "자칫 불법파업이나 갈등을 조장한다든지, 불법행위에 면죄부를 준다든지 하는 국민적 우려도 있는 만큼 매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노동계 출신 장관으로 그동안 보수 성향의 윤석열 정부 내에서 노동 이슈의 '브레이크' 역할을 하던 이 장관조차 노란봉투법의 '불법파업·갈등 조장론'을 거론한 데 대해 노동계와 시민사회는 "지탄받아야 할 일"이라고 반발한다.
손잡고(손배가압류를잡자,손에손을잡고) 윤지선 활동가는 "손배 가압류로 불법 파업을 제한할 수 있었다면 지난 33년 동안 불법 파업이 없었느냐"며 "애초 노사 관계에 불법이 없도록 감독할 노동부가 제 역할은 방기해놓고, 고용노동부 장관이 별다른 근거도 없이 경영계 이익집단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은 지탄받아야 할 일"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사측이 단체교섭이나 단협 이행을 거부하거나, 부당해고, 불법파견을 벌이는 등 불법을 저지르고 해결하지 않으면 노동자로서는 최후의 저항으로 파업을 벌일 수밖에 없다"며 "(노란봉투법 반대 주장은) 사용자들이 어떤 부당한 일을 저질러도 노동자들은 노동권을 행사하지 말고 참으라는 얘기나 다름없는데 대통령이나 행정기관 수장, 국회가 주장할 수준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경사노위 김문수 위원장 위촉에…"사회적 대화 폐기하려는 인사" 맹비난 쏟아져
연합뉴스정부 노동 정책에 오른쪽 깜빡이가 켜진 또 다른 조짐으로 경사노위 김문수 위원장의 임명 강행 소식도 주목받고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김 전 경기도지사를 경사노위 위원장으로 지명하고, 30일 위촉장을 수여했다.
김 위원장의 발탁 배경에 대해 대통령실은 "노동현장 경험이 많아 정부, 사용자, 노동자 대표 간 원활한 협의와 이견 조율은 물론 상생의 노동시장 구축 등 윤석열 정부 노동 개혁 과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주장했지만, 노동계의 반응은 싸늘하다.
김 위원장은 1980년대 노동운동을 상징하는 전설적인 인물로 꼽혔던 이력을 갖고 있고, 정계 입문 이후에도 국회의원 3선 재임 동안 환경노동위원회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극우적인 정치 성향을 드러내면서 노골적으로 노조를 비난하는 등 '노조 혐오' 행보를 보였다는 평가를 노동계로부터 받고 있다.
최근에도 김 위원장은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하이트진로 화물연대 파업에 대해 "노동자들이 손해배상을 가장 두려워한다. 민사소송을 오래 끌수록 굉장히 신경이 쓰이고 가정이 파탄 나게 된다"며 "불법파업에 손배 폭탄이 특효약"이라고 주장해 구설수에 올랐다.
김 위원장 지명 직후 민주노총은 "윤석열 정부의 노동 개악 추진에 들러리로 그 소임을 다해야 하는 경사노위와 그 위원장에 그간 색깔론과 노조혐오에 가득한 시각과 발언으로 문제를 일으킨 김문수 씨를 임명한 것은 그 속이 너무 뻔하다"고 비난했다.
경사노위에 대화 파트너로 참여하고 있는 한국노총조차 "몇 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구속에 반대하는 태극기부대에 합류하고 이후 자신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등을 통해 반노동 발언을 일삼는 행보 등으로 노동계가 환영할 만한 인물이라고 말하긴 어렵다"고 우려할 정도다.
이에 대해 윤 정부가 경사노위의 역할을 잘못 설정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사회적 대화와 타협을 이루는 역할이 아닌, 정부가 세운 정책 방향에 대한 노동계의 반발을 틀어막으려는 인선이라는 지적이다.
특히 정부가 발족한 '미래노동시장연구회'가 이달 말 노동시간·임금 체계 개편안을 비롯한 개혁과제를 발표할 예정인 점도 흥미롭다. 미노련이 노동시간 유연화, 성과급 도입 등 정부의 정책 과제를 제시하면, 경사노위가 이를 이어받아 본격적인 '명분쌓기' 작업을 추진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종진 선임연구위원은 "최근의 행보를 볼 때 사회적 대화 기구에 적합한 인물인지 우려가 되는 인사"라며 "정부는 노동개혁을 완수할 인사라고 하는데, 결국 장시간 노동, 성과급 개편 등을 김 위원장처럼 고집을 갖고 밀어붙이도록 선택된 인선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고 우려했다.
또 "최근 산업구조, 기술의 변화나 노동과 노동 환경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고민할 인사도 아니다"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고민할 인사가 아니라는 것이 (발탁 배경의) 가장 큰 핵심 중 하나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 박태주 선임연구위원은 "현 정부 들어 사회적 대화는 이미 제 위상을 잃었고, 김 위원장의 인사로 이를 재확인한 것뿐"이라며 "윤석열 정부의 노동 배제적, 탄압적인 노동 정책의 연장선"이라고 말했다.
또 "지난 정부만 해도 (경사노위에) '명분쌓기용'이라는 의미라도 있었다면, 이번 정부는 이렇게 활용할 의지조차 없이 정치적으로 활용만 하겠다는 것"이라며 "사회적 대화에 의미를 뒀다면 있을 수 없는 인사"라고 비판했다.
박 선임연구위원은 "정부가 '밀어붙이기'를 하더라도, 여소야대에서 법·제도적 개편이 어렵고 사회적 대화도 포기했다면 남은 영역은 '시행령 정치'와 '물리적 폭력'뿐"이라며 "앞으로 노동 이슈가 터질 때마다 '경찰력을 동원하겠다'는 말이 수시로 나올 것"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