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3일 북간도 용정에서 펼쳐졌던 3.13 만세운동 사진. 당시 북간도는 독립운동과 민족교육의 중심이었다. CBS 방송 캡처만주 또는 간도로 불리던 중국 동북지역은 우리 근대사의 한 페이지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의 현장이고 '별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기를' 바랐던 시인 윤동주가 태어난 곳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근대 만주에 대한 지식은 일송정 해란강이나 명동촌, 용정, 연길 정도에서 그친다.
한반도에서 동북지역으로의 이주 성격이 어떻게 변했는지, 한 때 우리 민족의 9%에 해당하는 210만 명 넘게 거주하면서 일본 침략군과 싸우고 국공내전 때는 중국 공산당에 힘을 보탰던 역사적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 한 때 금기시 됐었고 지금은 무시되거나 무지한 상태다.
가난 때문에 독립운동 위해 건너갔던 만주(간도)
중국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이주한 우리 민족의 한 갈래다. 조선족의 선조들은 19세기 후반부터 청나라가 자신들의 본거지였던 만주지역에 다른 민족이 들어오지 못하게 실시한 봉금령을 뚫고 동북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자연재해로 인한 생활고 때문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는 독립운동을 위해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독립 운동의 특성상 한반도와 인접한 연변지역과 동북지역 남부권에 자리를 잡았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엔 일본 치하에서 조선 땅에 발붙이고 살 수 없는 수 천 수 만 파산농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을 하려는 애국지사들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넜다.
1910년-1912년에 중국 동북의 조선인 숫자는 4만 여명이 증가했고 1910년부터 1920년 사이에 이주해온 조선인 수는 19만 여명에 달했다. 통계에 의하면 1922년 3월까지 동북 3성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은 65만명, 이중 69%인 44만 명이 두만강, 압록강 유역에 거주했다.
1930년대 이후의 이주 역사는 성격이 다르다. 일제의 강제 이민 정책에 의해 많은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 중국으로 오게 된다.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동북 지역을 전 중국 침략의 후방 기지이자 양식 기지로 만들기 위해 500만 일본인 이주 계획을 세우고 1939년부터 매년 조선에서 1만 가구를 이민시킬 계획을 세웠다.
일제 패망 당시 우리 민족의 9%인 216만명 동북 이주
연변토지개혁 한장면. 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 제공1937년부터 1940년까지 이른바 '집단개척민'으로 동북 각지에 이민시킨 가구가 1만여 가구였으며 1939년 말에 116만이던 중국 동북의 조선인 수는 해방 무렵에는 200만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먼저 이주해온 사람들이 자리를 잡은 두만강·압록강 인접 지역을 통과해 더 북쪽으로 더 서쪽으로 전진해 헤이룽장성이나 내몽골지역까지 들어갔다.
조상들이 대대로 살던 한반도를 떠나온 사람들은 동북지역에 이주해서도 한곳에 정착하지 않았다. 더 나은 조건들을 찾고 만들며 두 번 세 번 삶의 근거지를 옮기면서 중국 동북지역에서 조선인들의 분포지는 북쪽으로 서쪽으로 확대되었다.
한 사람, 한 가족이 자리를 잡으면 일가친척을 데리고 오고 같이 살던 사람들을 부르면서 자연스럽게 조선인 마을이 생겨났다. 조선인 마을에는 한반도에서 가져온 우리의 언어, 생활풍습, 문화가 그대로 녹아들었다. 조선인 마을엔 여지없이 학교가 세워져 민족학교로 발전하게 된다.
각종 사료에서 일제 패망 당시 중국 동북지역의 조선인 숫자는 216만 명으로 표시되고 있다. 당시 전체 한민족 수가 2천 5백만 가량이었음을 감안하면 우리 민족의 9%가 중국 동북지역에 똬리를 틀고 있었던 셈이다.
한반도와 중국 동북지역 일제 패망 뒤 절반인 110만명은 귀국 않고 남아…국적 문제 대두
일제가 패망하자 동북지역에 살던 많은 조선인들은 짐을 싸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절반 정도인 111만 명은 남았다. 차일피일 하다가 기회를 놓치거나 분배 받은 토지 때문에 귀국을 망설인 경우가 많았다. 이주 2세대들은 중국이 더 편해 돌아갈 필요는 못 느끼기도 했고 고향을 떠나온 지 오래돼서 기억이 희미하거나 마땅히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일제 패망 이후 중국 동북 지역에 남았던 사람들의 국적이 문제가 됐다. 중국인이 아니었지만 엄연히 중국 땅에 살고 있었고 이제 막 태어나기 시작한 남한 또는 북한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국공산당은 조선인의 이런 애매한 처지에 주목하고 우호적인 정책을 폈다. 조선인들이 동북지역에 이주하기 시작한지 반세기가 지나 삶의 터전을 마련한데다 항일운동이나 해방전쟁시기 함께 피를 흘린데 따른 자연스런 결과였다.
중국 동북지역에 거주하던 조선인 중 국공내전에 참가한 인원은 8개 사단 규모인 6만 2천명이었고 공안대 등 지방 무장 조직에도 10만 명이 참여했다. 희생도 컸다. 연변지역에서만 국공내전 기간에 희생된 사람이 3,041명인데 90%가 조선인이었다.
1952년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성립…3년뒤 연변조선족자치주로 변경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성립을 기념하는 인파. 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 제공 중국사회과학원 정신철 교수가 조선족 청년들을 위해 쓴 '자랑스러운 중국조선족'에 따르면 1945년 말 조선인의 국적 문제를 주목하기 시작한 중국중앙동북국은 동북 지역의 조선인이 중국의 소수민족이며 한족과 같이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향유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1946년 12월에는 동북민주련군 부사령관 겸 지린성 정부 주석 주보중이 중공길림성위원회 민족사업회의에서 동북조선민족은 연변 등 지역의 주요한 개척자이고 영광스러운 혁명전통을 소유했으며 "조선족은 중국의 한 개 민족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밝혔다.
1948년 8월 중국연변지구위원회의 <연변민족문제> 결의문에서는 "우리 당과 정부가 중국 경내 연변조선민족 인민들의 소수민족지위를 확정한 이 정책은 어디까지나 정확하다"고 강조했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천안문 망루에 올라 신중국 성립을 선언했다. 신중국은 전역에 산재해 있는 400여개 민족을 대상으로 소수민족 지위를 부여할 대상을 선정하기 위한 민족 식별사업을 벌여 1953년 1차 조사에서 38개 민족을 확정했다. 조선민족은 38개 민족에 들었을 뿐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중국의 11개 민족 가운데 하나로 확정된 상태였다.
조선인, 조선 사람으로 불리던 동북 지역의 우리 민족의 한 갈래가 '조선족'으로 굳어진 것은 1954년 제정한 신중국의 첫 헌법에 근거해 1955년에 2년 전 설치된 연변조선민족자치구를 연변조선족자치주로 바꾸면서부터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