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근식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 위원장."피해보상보다 제일 시급한 게 트라우마 치료입니다. 이런 곳만 오면 마비가 오고 미치겠습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와 같이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이 트라우마 치료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24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과거 군사정권 시절 최악의 인권 침해로 꼽히는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을 '국가에 의한 인권 침해' 사건, 즉 '국가 범죄'로 결론내렸다.
국가의 부당한 공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라는 사실이 정부 기관을 통해 공식 인정받기까지 35년이 걸렸다. 형제 복지원 피해자들은 진실규명이 늦은 만큼 정부의 사과와 트라우마 치유 방안을 요구했다.
진실화해위는 지난 24일 서울 중구 남산스퀘어빌딩에서 제39차 위원회를 열고 형제복지원 사건과 관련 '국가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에 의한 중대한 인권 침해 사건'이라고 판단했다.
사망자 105명 더 있다… "국가에 의한 인권 침해"
당시 형제복지원의 신상기록카드.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화보집 형제복지원은 1960년 형제육아원을 시작으로 1971년 형제원, 1979년 형제복지원으로 이어진 대규모 부랑인 수용시설이다. 해당 기간 복지원은 부산시와의 부랑인선도위탁계약, 내무부훈령 제410호를 근거로 장애인과 고아 등 3천여명을 마구잡이로 수용해 강제노역 시키고 학대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진실화해위는 형제복지원 사망자 수가 최종 657명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는 기존에 알려진 552명보다 105명이 많은 수치다. 또 형제복지원 입소자는 부산시와 '부랑인 수용보호 위탁계약'을 체결한 1975년부터 1986년까지 총 3만 8천여 명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또 형제복지원이 수용자들에게 정신과 약물을 과다 투약한 정황을 발표했다.
진실화해위는 형제복지원 정신과 약물 구입 목록에 정신과 전문의약품으로 정신분열증과 양극성 장애 치료제인 할로페리돌, 간질성 경련 및 부정맥치료제인 디펠과 마약류에 해당하는 향정신성의약품인 바리움, 달마돔 등도 포함돼 있었다고 발표했다.
이 밖에도 형제복지원이 사망진단서도 조작하고, 가족이 있는 아동을 강제 입소시킨 사실도 발표했다.
형제복지원 수송 차량.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화보집' 이같은 무차별한 부랑인 단속과 형제복지원 수용의 근거는 '부랑인의 신고‧단속‧수용‧보호와 귀향및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처리 지침'인 내무부 훈령 제410호에 있는데, 위원회는 해당 훈령의 위헌성과 위법성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해당 훈령에 따르면, 부랑인이라 지목된 사람을 어떠한 형사절차도 거치지 않고 시‧군‧구청과 경찰이 합동으로 구성한 부랑인 단속반이 수용시설에 보내 기한의 정함이 없이 강제수용할 수 있었다.
진상 규명까지 35년…왜 이렇게 오래 걸렸나
형제복지원 내에서 수십 년간 자행된 인권 유린. 진상 규명까지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
진실화해위는 형제복지원 설치와 운영 과정에서 국가의 지원과 묵인이 있었다는 사실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부산시와 경찰, 안기부 등 부산지역 모든 기관이 사건을 조직적으로 축소하고 은폐했다는 설명이다. 특히 이번 조사를 통해 부산시가 피해자와 가족들의 진정과 소송을 회유하고, 원장과 측근들이 다시 형제복지원 법인을 장악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지난 1987년 복지원을 탈출한 피수용자들이 인권침해 문제를 진정했지만, 당시 보건사회부는 강제수용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고 발표했다.
감금과 강제노역, 암매장 등을 자행한 고(故) 박인근 전 형제복지원 원장의 무죄 판결을 취소해달라며 검찰이 제기한 비상상고가 기각된 가운데 지난 3월 11일 오전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대법원 대법정 앞에서 울분을 토하고 있다. 황진환 기자피해자 진정과 소송을 묵살한 정황도 발표했다. 1982년 8월 자신의 형이 형제복지원에 수용돼 인권침해를 당한 사실을 알게 된 강모씨는 경찰 수사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오히려 형제복지원 원장이 진정인을 무고죄로 고소했다. 강씨는 징역 8월과 집행유예 받았고, 신문에 사과문까지 실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35년 만에 진실규명이 되기까지 지지부진한 과정을 거쳤다. 1987년 부산지검 울산지청의 수사와 형제복지원 운영진 구속으로 인권침해 실태가 일부 드러났다. 하지만 당시 박인근 형제복지원장은 횡령 등 일부 혐의만 유죄가 인정돼 징역 2년 6개월 형을 받는 데 그쳤다.
진실화해위 이재승 상임위원은 기자회견에서 "1987년 사회문제화했을 때 원장의 개인적 범죄로 축소돼 사회적 초점을 만들지 못했다"며 진상규명이 늦어진 이유를 설명했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2018년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위헌적인 내무부 훈령에 따른 부랑자 수용은 불법감금에 해당한다며 검찰에 사건 재조사를 권고했다. 당시 문무일 검찰총장이 과거 검찰 수사에 대해 사과를 하고 비상 상고하면서 '형제복지원' 진실 규명이 재점화하는 듯했지만 지난해 3월 대법원은 비상상고를 기각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 "트라우마 치유 방안 필요해"
24일 중구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열린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 진실규명 결정 발표 기자회견에 참석한 피해 생존자 연생모씨가 정근식 위원장(뒤)의 발표를 들은 뒤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모습. 연합뉴스"새어머니한테 구박당해서 대구에 있는 이모를 찾아가던 길이었다. 깜빡 잠이 드는 바람에 부산역에 잘못 내렸고 울면서 길거리를 헤맸다. 그러던 중 경찰이 다가와 '좋은 곳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경찰이 말한 '좋은 곳'은 부산 형제복지원이었고, 당시 10살이던 배기열(57)씨는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다. 배씨는 그곳에서 1년 6개월 동안 강제 노역을 하고 매일같이 구타를 당했고, 이른바 '기합'이라는 가혹행위에 시달렸다.
당시의 기억과 고통이 남아있는 형제 복지원 피해자들은 정부의 사과를 요구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모임 한종선 대표는 "이번 진실규명으로 피해당사자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났고 국가는 이 책임에 대해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국민에게 약속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어 "진실규명은 감사하지만, 피해자들은 국가로부터 정확한 확답을 받지 못해 불안한 것이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피해 지원과 트라우마 치유 방안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연생모씨는 "제일 시급한 건 트라우마 치료"라며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몸에 마비가 오고 미칠 지경"이라고 호소했다.
진실화해위는 이날 진실규명 이후의 후속 대책의 필요성을 말했다. 국가가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또 정부가 나서서 피해자들의 피해 회복과 트라우마 치유 지원 방안 등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한편, 진실화해위의 발표로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도 힘이 실릴지 주목된다. 현재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은 서울중앙지법 등에서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