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원자력발전소. 연합뉴스유럽연합(EU)이 녹색분류체계(택소노미)에 원자력을 포함시키면서 윤석열 정부의 '친원전' 기조가 더욱 설득력을 얻는 분위기다. 그러나 EU는 원자력이 탄소배출이 적은 에너지원이라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한 까다로운 조건을 달았다.
오는 9월 중 한국형 녹색분류체계(K-택소노미) 역시 원전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확정을 앞둔 가운데 EU에서 제시한 지속가능성 기준 등이 K-택소노미에 어떻게 반영될 지 주목된다.
EU가 원자력을 택소노미에 포함시키면서 제시한 전제조건 중 핵심 사항은 '2025년부터 사고저항성 핵연료(ATF) 기술 적용'과 '2050년까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 마련 계획 제시' 두 가지로 꼽을 수 있다. 기존 원전을 계속 운전하고 앞으로 제3세대 원전 건설 또는 제4세대 원전 기술 개발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안전한 연료와 핵폐기물의 처리는 필수 조건이라는 것이다.
한화진 환경부 장관은 지난 18일 대통령 업무보고에 앞서 "K택소노미에도 EU에서 강조한 사고저항성 핵연료, 고준위 방폐물 처분장 마련 같은 안전 강화 요건을 포함시킬 계획"이라며 "안전이 전제될 필요가 있지만 EU와 우리 현실이 다르기 때문에 조정될 부분들도 있다"고 말했다.
EU 택소노미에 대해서는 "당분간 어느 나라도 원전 관련 기준을 만족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오는 가운데, K-택소노미는 해당 기준을 차용하되 다소 완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이에 따라 K-택소노미에서도 관건은 사고저항성 핵연료 개발·적용과 고준위 방폐물 처분장 마련 시기, 방법 등이 될 전망이다.
우선 사고저항성 핵연료의 경우 2017년 12월 정부과제로 개발이 시작돼 이제 소재개발이 거의 완료된 상태다. 한전원자력연료 관계자는 "현재 연소시험을 위한 절차를 밟고 있고 개발이 마무리되면 2029년 인허가 보고서를 제출할 계획"이라며 "이르면 2033년쯤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원전이 냉각기능을 상실해 핵연료 온도가 상승하거나 수소가 발생할 때 이 속도와 규모를 적극적으로 낮추기 위한 것이 사고저항성 핵연료 기술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처럼 냉각수 공급 펌프가 멈췄을 때에도 심각한 노심 손상이나 수소 폭발에 의한 방사성 물질 누출 등 대형사고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EU는 2025년을 사고저항성 핵연료 적용 시기로 못박았지만 업계 선두주자인 미국도 상용화 시기를 기존 2020년대 중반에서 2030년까지로 다시 잡고 있다.
목표 기준과 다소 차이가 나더라도 국내 사고저항성 핵연료는 개발과 실증 단계를 밟아가고 있지만 고준위 방폐물 처리는 갈 길이 먼 상황이다. 정부는 내년부터 부지 선정 작업에 돌입할 방침이지만 방폐물 처리시설이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은 기존 원전 부지 인근 주민들은 벌써부터 격렬한 반대 입장을 내비치고 있다.
고준위 방폐물 처분에 관한 기술 개발 정도도 앞선 나라들에 비하면 절반 수준에 그쳐 주민 설득은 더욱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산업부는 "국내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기술 중 처분 기술은 미국·스웨덴·핀란드 등 선도국과 비교하면 57% 수준"이라고 밝혔다.
세계적으로 수십년간 고준위 방폐물 처분에 대한 논의가 이어져왔지만 아직까지 영구처분장을 운영 중인 나라는 한 곳도 없을 만큼 어려운 과제다. 핀란드가 최초로 처분시설을 건설했지만 운영 허가 단계를 밟고 있어 이르면 2024년부터 운영될 예정이다. 이외엔 스웨덴이 처분시설을 건설 중이며 프랑스는 건설 허가를 구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은 부지 확보를 위한 절차를 밟는 등 4~5개 국가 만이 고준위 방폐물 처리에 관한 의견을 모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원전 업계의 한 관계자는 "EU 택소노미에서 제시한 기준들을 무리하게 적용할 필요는 없지만 또 너무 괴리된다면 국내 정치상황 변화에 따라서 친원전 기조가 뒤집히는 원인이 될까 우려스럽다"며 "당장 원전 수출이 아니라 구체적인 처분장 마련 계획에 정부가 온 힘을 쏟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