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우리 정치권을 보면 힘겨루기가 한창입니다. 힘겨루기를 관찰해보면 한 가지 두드러진 점이 나타납니다. 누구든지, 그리고 어떤 세력이든지 힘만 맹신하게 되면 그 힘 때문에 스스로 힘을 잃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렇게 힘을 중요시할까요? 그것은 힘의 논리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힘의 논리가 모든 분야에서 가장 설득력 있게 사람들을 매혹합니다. 이것을 벗어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모양입니다. 이런 힘의 논리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성경의 가르침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예수님을 체포하려던 무리에게 저항하는 차원에서 베드로가 칼을 빼 들자,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말씀하셨습니다. 힘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기독교는 힘을 쓰는 종교가 아닙니다.
요즘 한국 교회의 염려스러운 한 면은 한국 교회 또한 힘의 논리에 지배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한국 교회의 교세 약화에 대하여 한국 교회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를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세라는 표현을 했습니다만, 그야말로 한국 교회가 '세력'의 약화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동안 한국 교회가 자랑하고 기뻐했던 것은 한국 교회가 가진 힘이었던가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CBS크리스천노컷뉴스 유튜브 채널 갈무리.교회 역사를 보면 기독교가 권력의 크기에 의존되어 있을 때 기독교는 언제나 침체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19세기 서구 열강 교회의 선교적 실패입니다. 19세기 선교사들은 제국주의를 기독교 전파를 위해 활용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제국주의의 침략과 약탈을 눈감아 주거나 동조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지구촌의 고통의 한 이유로 존재합니다.
교회 역사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역사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성군 다윗이 하나님의 책망 앞에 노출되었던 이유는 힘 자랑 때문이었습니다. 밧세바를 얻을 만한 힘이 있다고 착각했기에 밧세바를 우리야로부터 빼앗았습니다. 밧세바를 빼앗은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의 권력을 사용하여 우리야를 죽였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권력의 크기를 체감하기 위해 인구 수를 집계했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교회가 침체기를 극복하려는 기본적인 논리가 힘, 곧 권력의 회복에 기반을 두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교회 크기, 예배에 모인 수, 재정 능력 등이 힘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들을 권력적으로 사용할 유혹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교회가 진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전부터 일부 교회들은 윤석열 정부와 맞닿을 힘을 가진 것을 자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국가권력과의 관계에서 실패했다는 비판을 모면하기 어려운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친정부 세력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교회가 진정한 선교적 영향력을 회복하려면 교회가 먼저 성경의 가르침인 사랑과 생명과 정의의 논리에 충실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회복은 어떻게 최고의 전성기의 힘을 다시 찾느냐가 아닙니다. 힘의 논리에 취해 있는 이 세상에 어떻게 사랑과 생명과 정의의 논리로 교회가 존재하고 이야기할 것인가입니다.
기복주의 또한 힘의 논리의 다른 옷임을 인식하고 교회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과 생명과 정의의 논리에 집중할 때 한국 교회는 회복되고 세상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CBS 논평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