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파친코'를 보고 한일 관계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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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파친코'. 애플TV+ 제공드라마 '파친코'. 애플TV+ 제공
애플tv플러스가 투자한 드라마 <파친코>를 보다가 소설 <파친코>를 읽었다. 2~3년 전쯤 '파친코'라는  제목 때문에 도박에 관한 책으로 치부해 버리고 서점에서 스쳐 지났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드라마 덕분에 <파친코>가 식민지 시절, 강제로 또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먹고 살려고 일본에 들어가 정착한 재일 조선인들에 대한 서사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소설을 읽고 강력한 힘은 서사, 즉 이야기에 있다고 생각되었다. 솔직히 재일 동포를 일본에 사는 코리언으로만 인식했지, 해방부터 시간이 멀어질수록 그들의 존재 자체를 거의 떠올린 적이 없는 것 같다. 단지, 칠팔십년대 민단과 조총련을 둘러싼 남북간 대결, 그리고 일본의 강제지문날인에 따른 인권 문제가 심각했었던 것으로만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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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책을 덮고 궁금했던 것은 작가가 어떤 캐릭터를 가진 분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이민진 작가. 아버지는 북쪽 출신이고 어머니는 부산 출신으로 작가가 일곱 살 즈음 미국으로 이민 갔던 재미동포 2세대라고 한다. 책을 읽는 사람이면 작가의 치열한 취재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생존해 있는 재일교포 1세대부터 3,4세대까지 공들여 만난 사전 조사와 취재가 책 속에 온전히 녹아져 있다. 소설이지만 다큐멘터리로 생각될 만큼 생생하다. 재일 조선인들의 시련과 고통, 슬픔과 애환, 눈물과 설움, 무시와 차별, 고통과 굴레, 좌절과 역경이 전 페이지에 걸쳐 절절하게 묘사되고 있다.
 
작가는 "일본에서 살아가는 조선인들의 삶 대부분이 경시당하고 부인당하고 지워진다는 이야기를 글로 써야 한다는 고집스러운 내 믿음은 확고했다"고 말했다. 소설은 첫 문장부터 인상적이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고난으로 점철된 한국 근현대사에서 최대의 피해자는 국민이지만 아무도 국민이 당하는 고난에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무능한 정치가들은 국민을 일본, 중국, 러시아로 떠나보냈지만 그들의 비참한 삶을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그러나 온갖 고초와 수모,차별 속에서 역경을 견디며 그들은 지금도 가족을 건사하고 있다. 
 
애플TV+ 제공애플TV+ 제공
특히 작가의 역사 인식은 이럭저럭 살고 있는 이에게 죽비를 내려치는 듯 했다. 작가는 "일본 사람 모두가 '악하다'라는 것은 터무니 없는 얘기다. 제가 '악'이라고 생각하는 건 '역사에 정직하지 못하다'라는 것이다. 역사에 정직하다면 우리는 화해를 고려하는 것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 강연에서 강조했다.
 
드라마는 위안부 사건의 졸속 합의를 날카롭게 풍자한다. 주인공 중 한 명이고 재일 조선인 3세대인 솔로몬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와 부동산 투자회사에서 일한다. 그는 회사에서 재일 조선인 동포 1세 할머니가 소유한 '부동산 빅딜 사업'에 관여하게 된다. 임무는 조선인 할머니를 설득해 마지막 남은 땅을 매입하는 것이다. 솔로몬은 할머니에게 자식들을 생각해 그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땅을 팔라고 종용한다. 그의 설득은 무척 건조하다. 그 땅에 녹아있는 할머니 삶과 정신은 고려대상이 아니다. "할머니, 자식들은 할머니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떻게 집을 이뤄왔는지 몰라요. 언제까지 과거에만 매달려 사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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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땅 가격은 공교롭게 10억 엔, 한국 돈 100억원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 이뤄진 위안부 합의금과 같은 금액이다. 드라마에서는 반전이 일어난다. '더러운 피를 가진 조센징'이라는 굴욕과 차별을 견디며 일궈 온 삶과 역사를 100억원으로 가름할 수 있는 있는 건지 할머니는 차분하지만 냉철하게 솔로몬에게 묻는다. 가슴 아픈 동포 조선인 할머니의 역사를 들은 솔로몬은 같은 동포로서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회사를 퇴직한다.
 
일본에 대한 작가의 역사 인식은 소설에서도 분명했다. 일본인인 첫 여자 친구가 죽음을 앞두고 솔로몬에게 아버지의 파친코 사업을 물려받으라 권유한다. "일본은 절대로 변하지 않아. 외국인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내 사랑, 넌 언제나 외국인으로 살아야 할 거라고. 절대로 일본인이 되지 못해. 알겠어? 자이니치(조선인)는 여행을 떠날 수 없는 거 알지? 하지만 너만 그런 게 아냐. 일본은 우리 엄마 같은 사람들도 다시 받아주지 않아. 나 같은 사람들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지. 우리는 일본인인데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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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파친코>에 대한 높은 관심은 K-문화 성공과도 연관이 깊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 킹덤과 기생충, 오징어 게임 같은 작품이 한국의 서사로 전 세계 시청자를 매료시키고 있다. 덕분에 변방에 지나지 않던 한국과 아시아 서사를 전 세계인들이 이해하는데 큰 걸림돌이 사라지고 있다. "자막이라는 1인치의 장벽을 넘으면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고 봉준호 감독이 말한지 불과 2년 만에 세상은 많이 달라지고 있다. 한국에서 만든 작품은 아니지만 드라마 <파친코>가 일제 강점기 시절 한국인에 대한 착취와 억압의 역사를 세계 시민들에게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한국에서 새정부가 출범하고 한일관계 개선이 중요한 현안으로 떠오른 시점이다. 역사문제로 갈등을 겪어 온 두 나라 관계는 코르나로 민간 왕래마저 뚝 떨어져 악화일로를 걸어왔다. 양국 관계 개선의 필요성은 차고도 넘친다. 윤석열 대통령도 한일관계를 중시하고 발전시킨다는 복안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역사문제는 여전히 떠돌고 있다. 역사 문제를 무조건 앞세우자는 얘기는 아니다. 그럼에도 역사문제를 창고 속에 인위적으로 감금시킬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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