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대통령 서태지, 30주년 맞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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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요약

1992년 3월 서태지와 아이들로 가요계 데뷔, '난 알아요'으로 댄스 음악 시대 열어
'환상속의 그대' '하여가' '발해를 꿈꾸며' '교실 이데아' '필승' '컴백홈' '시대유감' 등 연속 히트
1996년 팀 해체…이후 솔로 가수로 본격 활동
신선한 음악 선보이면서도 음악을 사회 문제로 확장해 영향 끼친 인물

2014년 정규 9집 발표 기자회견 당시 서태지의 모습. 노컷뉴스 자료사진2014년 정규 9집 발표 기자회견 당시 서태지의 모습. 노컷뉴스 자료사진'문화 대통령'. 수많은 스타들이 출현해 연예계에 한 획을 그었지만 이 같은 수식어가 붙는 경우는 서태지가 유일하다시피 하다. 대중음악이나 문화계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어마어마한 파급력과 영향력을 자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어느덧 쉰을 넘긴 가수 서태지가 올해 데뷔 30주년을 맞았다. 스쿨밴드 하늘벽을 결성하고 밴드 활화산을 거쳐 시나위의 베이시스트로 활동했던 서태지는 1992년 자신의 이름을 건 팀 '서태지와 아이들'로 정식 데뷔한다. 이들은 3월 23일 첫 번째 정규 앨범 '서태지 앤드 보이즈 1'(Seotaiji And Boys 1)를 내어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데뷔 25주년이었던 2017년 나온 기념 LP에 담긴 서태지의 코멘트에 따르면, 데뷔곡 '난 알아요'가 실린 이 앨범은 "아무것도 없던 때에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새로운 음악이 하고 싶어 만들었던 앨범"이었다. 누가 자신들의 팬이 되어줄지 한 치 앞도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팬이나 인기에서 오는 부담도 전혀 없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딱 한 번밖에 만들지 못하"는 앨범이 되었다.

'난 알아요'는 '랩'이라는 형식을 접목한 첫 번째 곡은 아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랩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댄스 음악에 주력했고 시선을 끄는 독특한 안무도 선보였다. 데뷔 무대에서 평론가들에게 혹평받았으나 이들의 음악을 신선하게 받아들인 대중은 열광했다. '환상속의 그대', '너와 함께한 시간속에서', '이밤이 깊어가지만' 등 수록곡도 고르게 사랑받은 이 앨범은 170만 장 이상 판매됐으며 '난 알아요'는 당시 지상파 음악방송 1위를 휩쓸었다. 화려한 첫발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팀명으로 짐작할 수 있듯 이 팀의 핵심은 서태지였다. 그는 팀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기획자이자, 작사·작곡·편곡을 하는 창작자이며, 팀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리더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들려주는 음악과 퍼포먼스, 공연을 포함한 다양한 활동과 음악 외적 행보까지, 서태지는 팀의 중심에 있었다.

2008년 8월 싱글 앨범 '모아이'를 발매했을 당시 서태지가 서울 강남구 코엑스 야외 무대에서 게릴라 콘서트를 하는 모습. 노컷뉴스 자료사진2008년 8월 싱글 앨범 '모아이'를 발매했을 당시 서태지가 서울 강남구 코엑스 야외 무대에서 게릴라 콘서트를 하는 모습. 노컷뉴스 자료사진두 번째 앨범 '서태지 앤드 보이즈 2'(Seotaiji And Boys 2)는 서태지가 처음으로 자신의 스튜디오를 만들어 더 자유롭게, 실험적인 음악 할 수 있는 여유 속에서 탄생했다. 고려 말 이방원이 지은 시조에서 제목을 따온 '하여가'(何如歌)는 국악을 대중음악에 접목한 시도로 주목받았다. 록, 팝, 일렉트로니카 등 다채로운 장르가 어우러진 두 번째 정규앨범으로 서태지와 아이들은 소포모어 징크스란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해동성국 발해를 빗대어 통일 한국에 관한 메시지를 담은 '발해를 꿈꾸며', 한국 교육 시스템을 비판적으로 다룬 강렬한 하드코어 사운드 '교실 이데아', 전국의 수많은 가출 청소년들을 돌아오게 했다는 '컴백홈'(Come Back Home), 사전 음반 심의 제도 때문에 가사를 삭제하고 삽입된 '시대유감'(時代遺憾) 등의 곡도 큰 사랑을 받았다.

1992년 데뷔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역사는 4년을 채우지 못했다. 이들은 1996년 1월 31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학교 유림회관에서 은퇴 기자회견을 열어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다. 새로운 앨범을 만드는 작업을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의 연속"이라고 표현한 기자회견문의 한 구절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회자하고 있다.

서태지는 은퇴 기자회견 이후 약 2년 6개월 만에 솔로 가수로 다시 대중 앞에 섰다. 1998년 7월 발매한 '서태지 5'(Seotaiji Ⅴ)를 두고 서태지는 "오랜만에 또 다시 아무 생각 없이 어떤 제약도 없이 음악을 만들 수 있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그다음 앨범 '서태지 6'(Seotaiji Ⅵ)에는 붉은 레게 머리로 비주얼적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 '울트라맨이야'가 타이틀곡이었다.

이후 서태지는 싱글과 정규 앨범, 라이브 앨범, 베스트 앨범 등 다양한 형태의 앨범을 내며 2015년까지 활발히 활동했다. 가장 최근작인 정규 9집 '콰이어트 나이트'(Quiet Night)의 첫 번째 공개 곡이자 아이유와 함께한 '소격동' 프로젝트는 특히 화제를 모았다.

서태지는 국내 최초 도심형 록 페스티벌 'ETPFEST'를 개최하기도 했다. 사진은 2008년 기자회견 당시 모습. 노컷뉴스 자료사진서태지는 국내 최초 도심형 록 페스티벌 'ETPFEST'를 개최하기도 했다. 사진은 2008년 기자회견 당시 모습. 노컷뉴스 자료사진공연에도 열심이었다. 국내 최초 도심형 록 페스티벌 'ETPFEST'를 시작한 것이 대표적이며, 한국 가수 공연이 드물었던 2004년 한-러 수교 120주년과 한국인의 연해주 이민 14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공연을 열었고 TV로도 방송됐다. 25주년 기념 공연에는 그룹 방탄소년단(BTS)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음악가로서의 권리 향상에 앞장서기도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정규 4집 수록곡 '시대유감'이 한국공연윤리위원회(공윤)가 사회비판적인 가사를 문제 삼는 바람에 사전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자 가사를 삭제한 채로 수록한 것은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이후 사전 심의제를 향한 문제제기와 비판 여론에 힘이 실렸고 1996년 6월 마침내 음반 사전 심의가 폐지돼 '시대유감'은 온전하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며'(1995) '나는 서태지와 아이들을 듣는다'(1995) '서태지를 읽으면 문화가 보인다'(1995) '서태지와 아이들, 그리고 아무도 없는가'(1997) '서태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1999) '서태지 담론'(1999) '서태지 담론 : 신화의 부활'(2001) '서태지-"평범하게 사느니 죽음을 달라"'(2016) 등 서태지와 아이들, 서태지를 주제로 한 분석과 비평이 담긴 책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조직적이고 열정적인 팬덤의 존재도 서태지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다. 서태지의 팬덤은 현재 K팝 아이돌 팬덤 문화의 기초가 되는 많은 부분을 시작했다. 1996년 서태지와 아이들 은퇴 후 팬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서기회(서태지와 아이들 기념사업회)가 대표적이다. 소식지 발간, 영상 콘서트 개최는 물론 청소년 보호법 관련 성명서 발표, 대중음악 특강 등 다채로운 활동을 펼쳤다.

서태지 팬덤은 또한 라이브 무대 사전 녹화 요구, 가요 순위 프로그램과 연말 가요 시상식 폐지 운동, 자극적인 연예 보도 공개 비판, 유료 문자 투표 폐지 운동 등 여러 개혁적인 활동 선봉에 서 화두를 던졌다. 서태지 팬덤은 현재 아카이빙 사이트를 통해 대중문화예술인으로서 서태지의 활동과 의의, 나아가 서태지 팬덤 활동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자료를 정리해 공개하고 있다.

2013년 서울 세종로 광화문역 지하보도 내 세종문화회관 광화랑에서 열린 '서태지 아카이브 전시회-서태지를 기록하다'. 황진환 기자2013년 서울 세종로 광화문역 지하보도 내 세종문화회관 광화랑에서 열린 '서태지 아카이브 전시회-서태지를 기록하다'. 황진환 기자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는 "문화 대통령으로 불리는데, 웬만한 인물에게는 '대통령'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다. 이게 곧 서태지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서태지는 남들이 하지 않은 음악을 했다. 해외에서 유행하던 당대의 음악을 들려줬는데, 힙합, 국악, 테크노 등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솔로 때는 하드코어, 랩, 메탈 음악을 했고. 음악적으로 대단한 영향력을 보여줬다"라고 말했다.

김 평론가는 "아주 강력한 팬덤의 존재도 중요하다. '시대유감' 심의 결과에 불복하며 적극적으로 목소리 낸 끝에 사전 심의제를 폐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K팝 팬덤이 강하고 조직적이라는 이미지가 있지 않나. (서태지 팬덤이) 각종 의제를 이끌고 행동하는 팬덤의 시초가 아니었나 싶다"라고 부연했다.

박희아 대중문화 저널리스트는 "음악을 가지고 사회 문제로 확장해서 사회적으로 영향을 끼쳐 어떤 변화를 이끌어낸 사례, 그 시작점에 서태지가 있었다. 서태지는 자신의 음악을 직접 만드는 사람이었기에, 개인이 가진 가치관이 사회 문제로 확장되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본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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