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 노역 현장인 사도(佐渡)광산이 일본 문화심의회의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 추천 후보로 선정됐다고 교도통신이 지난 27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문화심의회의 이런 결정에 따라 일본 정부는 사도광산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위한 추천서를 유네스코에 제출할지 여부를 내년 2월 1일까지 검토할 예정이다. 사도 광산 유적 중 하나인 도유(道遊)갱 내부의 모습. 연합뉴스일본 정부가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천을 검토하는 사도(佐渡)광산에 강제동원된 조선인이 2300명대로 추정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사도광산에 동원된 조선인에 대해 연구한 히로세 데이조(廣瀨貞三) 일본 후쿠오카(福岡)대 명예교수는 지난 10월 23일 강제동원 관련 온라인 강연에서 이런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29일 연합뉴스가 입수한 발표 자료에 따르면 히로세 교수는 "적어도 2천 명 정도의 조선인이 (사도광산에) 동원됐다"고 추정했다.
히로세 교수는 과거 논문에서 1940년 2월부터 1942년 3월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1천5명의 조선인이 동원됐다고 기술한 바 있다.
그는 사도광산에서 오랜 기간 근무한 히라이 에이치(平井榮一)의 논문을 소개하면서 해당 논문에 "쇼와(昭和) 19년과 20년도(1944년 4월~1946년 3월)에는 조선인 노무자 증가 수가 514명에 달해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노동자였다"고 기술돼 있다고 전했다.
1005명(히로세)에 514명(히라이)을 더하면 1519명인데 여기에는 1942년 4월부터 1944년 3월까지 2년간이 누락돼 있다.
히로세 교수는 1519명을 3.5년(추정 평균 근무기간)으로 나누면 연평균 434명이고 누락된 2년 동안 868명이 신규 유입됐다고 상정하면 총 2379명(연인원 기준)이 된다고 추정했다.
히로세 교수의 발표 자료에 따르면 1943년 5월 현재 사도광산에는 일본인 709명(54.8%), 조선인 584명(45.2%)이 근무했다.
'운반부'와 '착암(바위에 구멍을 뚫음)부' 등 갱도 내 위험한 작업에 조선인이 투입되는 비율이 높았다.
조선인 노무자 '모집' 당시 근로조건이 전달되지 않은 문제와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원인이 돼 노동쟁의가 발생하기도 했다.
히로세 교수는 "사도공업소(사도 광산 운영 사업체)와의 직접적인 투쟁에 이르지 않더라도 조선인은 도망으로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며 "1940년 2월부터 1943년 6월까지 3년 4개월 동안 도망자는 148명으로 전체의 14.8%에 달했다"고 전했다.
가혹한 노동 환경 속에 사망한 노동자도 있었고, 진폐증 등의 후유증에 시달린 노동자도 있었다.
한국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2019년에 발간한 자료를 보면 '강제동원 피해조사 등 지원위원회'가 판정한 사도광산 피해자는 148명으로 이 중 9명은 현지에서 사망했다.
후유증을 신고한 피해자 73명 중 45명은 진폐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