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로드킬 인 더 씨어터' 극작 겸 연출 구자혜. 국립극단 제공 올림픽 성화대에서 불 타 죽은 비둘기, 우주선에 태워 쏘아 올려진 개 라이카, 독립하려 길을 나섰다가 자동차에 치인 고라니. 지난달 22일부터 명동예술극장 무대에서 공연 중인 신작 연극 '로드킬 인 더 씨어터'는 인간에 의해 고통받고 죽음을 당하는 동물들이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11명의 배우들은 감정을 배제한 채 대사를 발화한다. 발화는 드라마적 호흡을 싹 걷어냈지만 관객은 왠지 모를 슬픔에 잠긴다. 대사를 분절하는 방식 때문일까. 오히려 고통으로 절규하는 동물의 그림자가 더욱 선명해진다.
이 작품은 구자혜(39·극단 '여기는 당연히, 극장' 대표)가 대본을 쓰고 연출했다. 구자혜 연출은 최근 명동예술극장에서 가진 CBS노컷뉴스와 인터뷰에서 "동물의 고통을 대상화하지 않기 위해 드라마적 호흡을 지양하고 고통받는 동물의 말을 전달하는데 집중했다"고 말했다.
기존 연극에서 보지 못했던, 낯선 발화 방식 탓에 "세종대왕 뒤통수 갈길 법한 난해한 대사" 같은 평도 올라오지만 "'고통을 겪는 존재에게 얼마나 다가갈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관객들 덕분에 힘내서 공연한다"고 구 연출은 웃었다.
2010년 제13회 신작희곡 페스티벌(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주최)에서 희곡 '먼지섬'이 당선되어 연극계에 입문한 구 연출은 이 시대 가장 주목받는 연극 연출가 중 한 명이다.
연극 '우리는 농담이(아니)야', '가해자 탐구_부록:사과문작성가이드', '오늘의 4월 16일, 2015.8', '여기는 당연히, 극장' 등 실험적이면서 고통받는 존재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작품을 뚝심있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농담이(아니)야'로 2020년 동아연극상 연출상, 2021년 백상예술대상 백상연극상을 수상했다.
공연을 올릴 때마다 음성해설과 자막, 수어통역 등 배리어프리 공연을 충실하게 제공하기 위해 애쓰고 있기도 하다.
10년 넘게 극단 '여기는 당연히, 극장'(총 인원 11명)을 이끌고 있는 구 연출은 "훌륭한 퀴어 텍스트를 좋은 배우들과 그 텍스트에 맞게 드라마타이즈해서 더 많은 관객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내년에는 연극 말고 다른 공연예술 장르에 도전하고 싶다"는 포부도 수줍게 밝혔다.
▷연극 '로드킬 인 더 씨어터'에 대한 관객 반응이 궁금한데"공연이 진행될수록 작품을 깊이 있게 읽어주는 관객이 많이 생겼어요. 작품이 동물권을 다루지만 저 역시 공연을 올리고 나서야 스스로 동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들여다봤죠. 그 전까지 동물과 아이는 감히 제가 범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작품에 고통받는 동물들이 등장하잖아요. '내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라는 저의 고민을 읽어주고 '존재의 고통을 집요하게 밀어붙인다'고 이야기해줄 때 힘이 나죠. 공연시간(175분)이 길고 어렵다는 평도 있어요. '세종대왕 뒷통수 갈길 법한 난해한 대사'라는 후기를 봤죠. 극중 배우들이 대사를 분절하는 방식으로 발화하잖아요. 언어가 휘몰아치면서 같은 단어가 다른 의미로 넘어오는데 이 부분을 알아채는 관객이 있어 뿌듯해요."
▷배우들이 동물의 입장이 되어서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합니다. 연출자(작가)로서 특별히 주문한 사항이 있나"우리는 어떤 망령처럼 '대상화하면 안돼'라고 해요. 그렇다면 '대상화란 무엇이고, 인간이 아닌 존재의 고통을 다룰 때 대상화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배우들과 이 부분을 가장 많이 고민했어요. 또 한 가지는, 우리가 고통을 겪는 당사자나 고통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드라마적 호흡을 지양하고 고통받는 동물의 말을 전달하는데 집중하자고 의견을 모았어요. 드라마적 호흡이 생기면 슬픈 정서가 흘러서 공연이 끈적끈적해지거든요. 작품에 대한 배우의 해석과 사유가 중요해요. 큰 원칙을 세운 후에는 배우들이 주로 연기 전략을 짜고 저는 슬픈 정서가 생기지 않도록 템포 조절 정도만 신경 썼죠. 이 공연은 무대 위에 자막이 노출되기 때문에 배우들의 부담감이 엄청나요. 연기하기 편한 방식 대신 작품의 주제에 맞는 발화 방식을 직접 고안한 배우들의 창조력에 존중을 표합니다."
연극 '로드킬 인 더 씨어터' 공연 중 한 장면. 동물권을 다루는 연극의 주제에 맞게 비운 무대가 인상적이다. 매 장면 수어통역사가 무대 위에서 배우들의 대사를 수어로 전달한다. 국립극단 제공 ▷동물권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있나"개인적으로는 생애주기별로 채식을 실천하는 비건이고요.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기도 해요. 작품이 동물권을 다루지만 등장하는 동물들 안에 촘촘하게 계급을 나눴어요. '차별하는 건 바람작하지 않다'고들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어떤 존재는 차별해도 된다'는 인식이 있잖아요. 일전에 자율주행차 전문가와 대화하면서 '자율주행차가 동물을 인식하지 못하면 어쩌지'라는 생각도 들었죠. 한 관객이 '우리는 그렇게 눈이 마주쳤다고 한다'는 대사가 이 작품의 주제를 함축한다고 본데요. 이 말에 동의합니다. 이 공연은 고통의 당사자와 비 당사자를 도식적으로 나누기 보단, 고통을 겪는 존재와 내가 눈이 마주쳤을 때 서로에게 어디까지 다가갈 수 있을까를 전제하고 있어요."
▷누군가로부터 고통받는 존재 혹은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를 무대에 세울 때 경계하는 점이 있나
"트랜스젠더의 삶을 다룬 연극 '우리는 농담이(아니)야'를 하면서 연극의 힘을 깨달았어요. 이 작품으로 지난 5월 제57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에서 수상한 후 트랜스젠더 친구들로부터 '고맙다', '힘이 됐다'는 말을 많이 들었죠. 이 때가 창작자로서 터닝포인트가 됐어요. 예전에는 작품을 올리기 전 스스로 필터링을 많이 했는데, 이후로는 '동시대 시민인 관객을 믿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힘있게 전달하자'는데 방점을 찍게 됐어요."
▷창작자로서 공연 올리고 어떤 반응 들을 때 보람을 느끼나"관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에요. 이번 공연 올리고 '시대를 앞섰다'는 반응이 있었어요. '내가 연극을 만들기 위해 동물권이라는 이슈를 소비한 건 아니구나' 싶어서 흐뭇했죠. '구자혜가 명동예술극장을 부셨군' 같은 반응도 좋아요. '우리는 농담이(아니)야'로 2020년 제57회 동아연극상 연출상을 받았어요. 최전방에서 눈치 보지 않고 자기 언어로 작품을 열심히 탐구해온 노력이 인정받은 것 같아 보람을 느꼈어요. 다만 아쉬운 점은 58회까지 오는 동안 여성 연출가가 동아연극상 연출상을 수상한 건 저를 포함 3명 뿐이라는 거에요(1991년 제28회 동아연극상 연출상 김아라·2003년 제40회 한태숙).
▷지금보다 대중적인 작품을 해서 조금 더 많은 대중에게 다가가고 싶지는 않나"몇 년 전, 전박찬 배우가 공연하는데 계속 눈과 손을 떨었어요. 비 당사자가 그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려니 마음의 짐이 컸던 거죠. 그럼에도 대상화하지 않는 선에서 이 세상에 누군가의 고통이 존재한다고 힘있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연극은 소수자의 존재를, 누군가의 고통을 가시화하는 힘이 있잖아요. 훌륭한 퀴어 텍스트를 좋은 배우들과 그 텍스트에 맞게 드라마타이즈하면 더 많은 관객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극중 떠돌이 개 라이카를 연기한 배우 성수연. 국립극단 제공 ▷구자혜 연출이 올리는 공연은 배리어프리 서비스를 적용하기 위해 애쓰는데"3~4년 전쯤 시각장애인이 등장하는 공연을 만들어서 올렸어요. 시각장애인 관객들이 왔는데 그 분들이 관람할 수 있는 환경이 전혀 갖춰지지 않았죠. '내가 만드는 공연이 누군가는 애초부터 접근이 차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이듬해 공공극장인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할 때 먼저 배리어프리 서비스를 적용하자고 제안해서 '좋다'는 답변을 얻었어요. 그게 시작이었죠. 사실 이번 공연도 완전하지 않은 배리어프리에요. 음성해설과 자막, 수어통역 서비스만 제공했다고 생각해요. 창작진과 배우들의 노력과 수고로 부족한 예산·인력을 보완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나아져서 배리어프리 공연이 지속 가능하면 좋겠어요."
▷작품 계획이 궁금한데"제가 만든 공연에 출연시키지 못한 존재가 아이에요. 다음엔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고, 저의 당사자성을 발현한 연극으로 관객을 만나고 싶습니다. 아울러 내년에는 연극 말고 다른 공연예술 장르에 도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