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미국에서 북핵 문제는 흔히 불가능한 수수께끼라고 불린다. 30년 넘게 북핵문제 해결에 매달렸지만 역대 어느 정권도 풀지 못했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어렵고 복잡한 문제로 발전했다.
평화와 진보를 지향한다는 조 바이든 민주당 정권으로 바뀐 이후에도 북핵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처럼 소극적인 대북 정책으로 일관하다가는 전략적 인내로 8년을 허송한 오바마 대통령 시기의 판박이가 될 수 있다는 걱정도 나온다.
북핵문제가 꼬인 실타래로 악화될 수밖에 없었던 핵심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한번 쯤 던져볼 수 있는 의문이다. 그리고 그 의문에 대해 '미국 때문'이라고 진단하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물론 사석에서 하는 말이다.
그런데 북핵문제는 바로 '미국의 실패한 정책 때문'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한 글이 미국 매체에 게재됐다. 글쓴이는 참여정부 시절 외교장관을 역임한 윤영관 하버드대 방문교수다. 그는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해 친미성향의 국제정치학자로 분류됐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의해 발탁됐다.
윤 전 장관은 최근 '내셔널 인터레스트'에 A4용지 11매에 이르는 장문의 글을 실었다. '북한에 대한 대담한 접근이 필요하다'라는 글이다.
그는 글에서
"북한의 입장을 옹호하기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게 결코 아니다.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이 제3자적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문제를 바라보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악당을 응징하기 위한 도덕적 압박은 정치적으론 옳을지 몰라도 미국의 국익에 대한 냉정한 계산을 어렵게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CBS노컷뉴스와 별도의 통화에서도 "20년간 북핵 문제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연구하며 얻은 결론을 글로 정리했다. 글에서 밝힌 제안이 북핵과 한미동맹 관련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미국의 대북 정책 허점을 짚어서 미국측에서 껄끄럽게 받아들 일 수도 있겠지만 덮어 두고 있으면 한국, 미국, 북한 모두에 도움이 안되겠기에 용기를 냈다"고 부연했다.
독자들의 시간적 편의를 위해 윤 전 장관 글의 핵심적인 내용을 간추려 싣는다. 이해를 돕기 위해 글의 일부 구조를 바꾸고, 어떤 표현은 의역했다.
북한에 대한 대담한 접근이 필요하다(In Defense of a Bold U.S. Approach Toward North Korea)
미국의 북핵 문제 해결의 실패 원인은 뭘까? 다음 3가지로 요약이 가능하다.
1. 중국이 협조할 거라는 잘못된 믿음이다.
중국은 북한의 비핵화 보다는 북한 정권의 안정에 더 많은 우선순위를 뒀다. 만약에 미국이 바라는 대로 중국이 북핵 문제에 우선순위를 두게 된다면 미국에 그 대가를 원할 것이다. 한미동맹, 대만문제, 남중국해, 동중국해 이슈 등. 그런 중국의 희망을 들어줄 수 없다면 미국은 중국이 북핵문제 해결에 협조할 거라는 가정을 버려야 한다.
2. 북한의 안보 우려를 불식시키지 못했다.
연합뉴스북한이 핵개발을 하며 국제법을 어기자, 미국은 북한이 가장 중시하는 분야, 가령 경제에 더 많은 압박을 가했다. 어떤 사람들은 정권교체가 유일한 해법이라고 봤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북핵문제의 양면적 특징을 간과한 것이다. 북한은 핵개발에 나서기 이전에 자국의 안보를 위해 미국과 관계 개선을 원해왔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이를 외면했다. 사례를 보자.
사례1. 1991년 소련붕괴 직후 북한은 3중고에 시달렸다. 경제위기, 국방력약화, 외교적 고립이다. 1990년 9월, 소련 외상(에두아르드 세바르나제)이 남한과 소련의 수교를 알리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영남 외상이 역정을 냈다. 남한과 수교하면 핵을 개발하겠다고. 이어 1992년 1월, 뉴욕에서 첫 북미 고위급 회담이 열렸다.
당시 김영선 대표는 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싶다는 김일성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미국은 거절했다. 미국이 북핵 문제의 맹아를 제거할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사례2.
1994년 10월 북미가 영변 핵시설 동결을 핵심으로 하는 제네바 협정을 체결했다. 그 때도
북한 대표단은 '북미간 정치적 관계 개선' 조항을 협정에 삽입하길 원했다. 그러나 제네바 협정에서 합의된 북미관계 개선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쪽은 미국이었다. 대신 미국 의회 등 많은 정책결정자들은 북한이 곧 붕괴되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사례3.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들어 고위급 교차 방문 등을 통한 외교적 접근에 나섰다.
2000년 10월 조명록 차석이 워싱턴 방문했을 때, 북미간 적대관계를 종식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그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더 나아가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공개 규정했다. 그 것도 새해 연두교서에서. 이어 미국은 북한 정권 교체를 이야기했다. 그런 이야기는 북한의 안보 불안을 악화시킬 뿐이었다.
사례4.
부시 행정부 시절 6자회담이 개시됐다. 그러나 부시 정부는 6자회담을 주고받는 식의 실용적 협상장으로 삼기보다는 북한을 '다국적'으로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
2005년 9월 어렵게 합의(19차)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 무렵 대북 강경파들이 북한에 대한 금융제재를 만들어냈다. 그 때문에 6자회담 합의는 시행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 무렵 협상 중단은 북핵문제에서 상당한 해를 끼쳤다. 그 결과로 북한이 2006년 10월 핵실험을 강행했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접근도 북한의 안보 딜레마를 간과했다는 점에서 이전 대통령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18~2019년 북미 교섭시 미국은 북한 비핵화를 먼저 해야 행동에 나선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2018년 5월 평양 방문 때도 핵개발 장소 목록을 달라고 요구했다. 폼페이오는 2018년 7월 김영철과 회담 때도 그랬다. 그러나 북한은 그 것은 폭격 좌표를 달라는 것이라며 거절했다.
군사적 압박이 효과가 있으려면 그 것이 가정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북한에 대한 군사압박은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북한이 잘 알고 있다. 북한에 대한 공격은 남한에 대한 보복을 부르고 그 것은 전면전을 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북한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미국은 북미관계를 작용과 반작용으로 보지 않고 선과 악으로만 봤다. 미국은 약속을 어긴 쪽은 항상 북한이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도 미국은 소련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소련과 협상하라고 제안한 미국 유엔대사 아들라이 스티븐슨은 강경론자들에게는 겁쟁이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그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3차 세계대전의 위기를 막을 수 있었다.
쿠바 사태와 같은 해법이 북핵문제에 적용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북한과 소련이 동급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과 같은 소국의 안보 문제는 대국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절박하다.
3. 북핵문제에 종합적으로 접근하지 못했다.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 경제난, 외교적 고립이 서로 연관돼 있는 점을 고려하지 못했다. 북한은 1990년 소련 붕괴이후 외교적 고립 때문에 핵개발에 나섰다. 경제적 궁핍도 핵개발의 동기가 됐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국방력을 키우기에는 돈이 많이 드니 그나마 저렴한 방식으로 국방력을 키우기 위해 핵무기를 개발했다.
따라서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이 것을 핵문제로만 접근할 게 아니라 외교적, 경제적 관점에서도 종합적으로 접근해야한다.
북한이 지난 19일 시험발사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연합뉴스북한 붕괴는 미국에게 재앙이다.
북한은 중국에 90% 가까이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북한은 중국의 속국이 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고 하고 있다. 주체사상도 그런 측면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국의 대북정책은 북한을 더욱 중국 쪽으로 밀어 넣고 있다. 미국의 강경론자들이 바라는 대로 북한에 격변사태가 발생한 다면 한반도를 장악하는 쪽은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 될 것이다. 이 것이 현실이다.
북한을 미국의 파트너로 만들라
미국은 1970년대 중국, 1990년대 베트남에 대해 데탕트를 취했다. 북한에 대해서도 정치적 접근이 필요하다. 북한에 대한 새롭고 대담한 접근을 취해야 북한을 외교적 고립에서 탈출시키고, 완전한 비핵화도 만들 수 있고, 북한을 정상국가로 만들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북한을 미국의 파트너로 만들 수 있다. 따라서 과거와 다른 두가지 트랙을 밟아야 한다.
1번 트랙. 대담한 정책에 나서야 한다. 상호 연락사무소 개설, 군사 교류 프로그램 같은 신뢰 구축 조치, 종전선언, 북한 관료, 학생, 체육공연 팀 초청, 북한 경제재건 위원회 가동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특히 연락사무소 개설은 정치적 관여다. 북핵 프로그램은 너무 멀리 와 버렸다. 북한의 자발적 협조 없이는 북한의 비핵화는 기술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뉴욕타임스도 2018년 5월 6일 기사에서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감시원 전원을 북한에 투입한다 해도 북한 핵시설을 사찰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바 있다. 따라서
북한 협조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연락사무소 설치 같은 정치적 관계부터 맺을 필요가 있다. 북한과 미국의 데탕트는 북한이 국제사회로 진입을 의미한다. 상호주의가 게임의 법칙인 국제사회로 말이다. 미국은 베트남과도 데탕트 이후 전쟁포로 이슈, 캄보디아에서 철수, 인권 문제 등에 있어서 완전한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2번 트랙은 그 동안 해 왔던 핵협상이다. 1번 트랙의 정치적 관여가 핵협상에 인센티브를 제공할 수 있다. 물론 이 와중에도 대북 경제적 제재는 유지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핵이 이미 방어적 성격에서 공격적 성격으로 전환한 때문이다. 북한은 제재가 적대감의 증거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북한 역시 미국 본토 공격 언급을 여러 차례 해왔다. 따라서 제재 해제는 비핵화와 교환 대상이다.
이런 북핵 정책의 변화가 좋지 않게 전개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미국으로선 손해 볼 게 없다. 북한과 정치적 관여를 통해 북한이 비핵화 이후 미군 철수를 원하는지 그 진정한 의도 등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남한과 더 밀접한 공조도 가능해진다.